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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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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증세를 위한 변명

부자 증세는 복지 재원 마련과 별개로 소득 불평등 완화 위해 도입한 것
불평등 커지는 한국 사회에서 세율을 미래 불평등에 연동시키는 방안 필요
등록 2013-08-27 15:25 수정 2020-05-03 04:27

새 정부의 세법개정안이 큰 소동을 빚었다. 그 와중에도 시민사회와 진보언론은 이성적인 목소리를 냄으로써 배가 산으로 가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데 힘을 보탰다. 개정안으로 세금을 더 내게 된 사람들이 거세게 저항했던 것은 추가 부담을 감당 못할 ‘폭탄’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과세의 공평성이 무너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세금이란 문명화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값진 비용이므로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는 호주머니를 더 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도 잘 부각시켰다. 그런데 이 논의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진보 진영 내에 미묘한 차이가 관찰된다. 이번 소동이 복지 공약 축소로 악용돼서는 곤란하다거나 법인세의 실효세율을 높이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부자 증세와 보편적 증세의 우선순위나 강조점과 관련해서는 다른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경제성장에 끼치는 영향력

부자 증세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이나 소득세 구간 신설 또는 최고세율 적용 소득수준을 낮추는 방식 등을 통해 부자의 세금 부담을 대폭 늘리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복지와 관련해 중산층에게 더 많은 세 부담을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부자가 정당한 몫의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잘못된 조세체계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보편적 증세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세금폭탄론’으로 인해 세 부담 기준선이 완화된 것에 아쉬움을 표명한다. 이들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능력에 맞게 복지국가를 만드는 비용을 공동으로 부담할 때 비로소 보편적 복지국가가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부자 증세는 모든 시민이 진정한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쪽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부자 증세만으로는 보편적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인식도 이를 경계하는 이유일 게다.
물론 부자 증세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은 보수 진영에서 찾을 수 있다. 부자 증세라는 용어 속에 부자와 부자가 아닌 사람을 가르는 분열의 논리나, 부자를 사회적 응징 대상으로 삼는 뒤틀린 심리가 깔려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또한 부자의 세금 부담을 늘릴 경우 상대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경제활동 의욕이 꺾여 경제성장이 둔화된다는 아인 랜드의 ‘부자 파업’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처럼 부자 증세는 보수 진영에서는 반자본주의적인 위험한 시각으로, 진보 진영에서는 보편적 복지국가 만들기의 논점을 흐릴 수 있는 불편한 우군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부자 증세는 복지 재원 마련과는 별개의 문제의식 위에 제기된 논의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는 미국의 사례에서 확인된다.

미국은 대공황 직전에 불평등이 가장 컸고, 뉴딜 정책 등으로 평등한 사회가 됐다가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인 1980년대부터 불평등이 다시 커졌다. 뉴딜 정책으로 실시된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미국은 대공황 직전에 불평등이 가장 컸고, 뉴딜 정책 등으로 평등한 사회가 됐다가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인 1980년대부터 불평등이 다시 커졌다. 뉴딜 정책으로 실시된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불평등의 역사적 추이에 관한 전문가로는 이매뉴얼 사에즈와 토머스 피케티가 있다. 이들에 따르면, 미국은 대공황 직전에 불평등이 가장 컸고, 뉴딜 정책 등으로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가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인 1980년대부터 불평등이 다시 커졌고, 최근에는 대공황 직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구체적으로 보면,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상위 1%에게 돌아간 시장소득 몫은 9.03%에서 19.77%로 늘어났고, 상위 0.1%의 몫은 2.78%에서 9.52%로 3배 이상 늘어났으며, 상위 0.01%의 몫은 1%에서 4.63%로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하위 90%의 평균소득은 인플레이션을 반영했을 때, 3만2천달러에서 2만9천달러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불평등이란 경제성장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됨에 따라 불평등과 경제성장의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전통적으로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여긴 외국인 투자, 시장 개방, 환율 경쟁력, 정치적 안정보다도 (불)평등의 영향력이 더 컸음이 확인됐다.

불평등 문제를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

이처럼 불평등의 사회·경제적 부작용이 드러남에 따라 불평등을 심화시킨 원인에 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되면서, 불평등의 추이가 세율의 변화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집권기에 94%까지 올랐고, 소득 구조가 비교적 평등하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70% 수준에 머물렀으나, 이후 레이건 집권을 계기로 계속 하락해 35%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최근 미국에서는 시장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면 세제를 통해 이를 ‘교정’한다는 과거의 사회적 합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과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진짜 전성기인 1960년대에는 고세율·고평등·고성장이 공존했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부자 증세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고세율을 어느 정도까지 어떤 방식으로 높여야 할지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재 워싱턴에서의 증세 논쟁은 부시 시절의 세율(35%)과 클린턴 시절의 세율(39.6%)을 놓고 전개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논쟁이 되려면 레이건 초반기의 세율(50%)과 존슨 시절의 세율(73.4%)을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피터 다이아몬드의 발언이 주목할 만하다. 물론 미국의 정치 지형상 세율을 당장 대폭 인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세율을 미래의 불평등에 연동(Inequality Indexation)시키자는 로버트 실러의 제안도 눈길을 끈다. 이는 특정 수준의 세율을 법으로 규정해 운영하는 현행 방법과 달리, 세율을 미리 규정된 불평등 척도에 연동시킴으로써 자동으로 오르내리도록 하는 제도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세율은 올라가고, 불평등이 완화되면 세율은 내려가게 된다.

불평등 연동 세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실러에 따르면, 1979년에 불평등이 당시 수준보다 더 악화되지 않도록 이 세제를 입법화했다면 최고세율은 이후 75%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을 것이라고 한다. 불평등 연동 세제는 보험계약이 그렇듯이 한 사회가 불평등 문제를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제도는 불평등이 악화됐다는 점을 알기 이전에, 그리고 누가 높은 세율을 적용받을지 알기 이전에, 세제를 통해 불평등 문제를 대비하는 것이므로 사회적 합의가 비교적 쉬울 수 있다. 불평등 연동 세제는 현재의 불평등 수준을 점진적으로 반전시킬 의도로 설계될 수도 있고, 단지 현재 수준에서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할 의도로 설계될 수도 있다.

보수주의의 신념 구현하려는 시도

우리나라에서 부자 증세는 미국과 달리 복지 재원 조달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는 등 미국과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으며 이대로는 사태를 개선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부자 증세는 그 자체만으로도 깊이 검토돼야 할 주제다. 부자 증세는 극심한 불평등을 누그러뜨리고 기울어진 경기장을 평평하게 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기회가 열린 공정하고도 역동적인 사회의 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주의의 신념을 진정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절제와 책임, 그리고 자기규율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추상적 덕목의 차원에서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들의 문제는 그 미덕을 보통 사람에게만 요구하는 비일관성에 있다. 반면 부자 증세는 이 덕목이 우리 사회의 경기 규칙에 관한 결정권을 사실상 독점하며 그 규칙을 통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기득권층에게 적용돼야 한다고 믿는다. 요컨대, 부자 증세는 기득권층이 절제와 자기규율을 통해 책임 있고 존경받는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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