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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옥(55) 전 경정에게는 롤모델(본보기)이 없었다. 1987년 순경 공채에 합격해 19살부터 경찰 생활을 했다. 교통순찰대, 민원실 업무 등을 하다 1991년 서울지방경찰청이 여성 대상 범죄를 전담하기 위해 만든 여자형사기동대에 선발됐다. 그렇게 박 전 경정은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강력범죄를 수사하는 여성 형사가 됐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끝이 아니었다. 강력계에서 경감으로 승진해 강력반장이 된 최초의 여성 경찰, 서울 마포·강남경찰서 개청 이래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 등이 붙었다.
33년 경찰 인생에서 30년을 강력형사로 사는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도 그의 손발을 거쳤다. 1990년대 후반 교도소를 탈옥해 2년6개월간 도피생활을 한 신창원 사건 수사, 2000년대 중반 연쇄살인범 유영철·정남규 사건 수사, 2008년 서울 숭례문 방화 사건에서 화재현장 감식, 2010년 서울 한강변 여중생 살해·시신유기, 2011년 만삭 의사 부인 살해 등 각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에겐 롤모델이 없었지만, 뒷세대 여성들은 ‘형사 박미옥’을 롤모델로 삼았다. 그를 보고 여성 형사의 꿈을 구체적으로 그리게 된 후배 경찰이 찾아왔다. 6년 전 한 초등학생은 ‘형사가 되고 싶은데 궁금한 게 많다’며 경찰서 누리집을 통해 박 전 경정에게 연락해오기도 했다. 그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다.
정년을 7년 남겨둔 시점인 2021년 초, 박 전 경정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했다. “현장을 뛸 만큼 뛰면 떠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고 했다. 현재 그는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집을 짓고 후배 경찰과 같이 살고 있다. 이웃들은 그를 ‘박 반장’이라 부른다. 마당 한쪽에는 자신의 서재 겸 지인들이 찾아와 책을 보고 쉴 수 있는 책방을 82.64㎡(25평) 규모로 만들었다.
그의 선택을 두고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서장은 달았어야지’ ‘서울로 왔어야지’와 같은 말을 얹었다. 2023년 5월8일, 제주 자택의 서재에서 만난 ‘하도리 박 반장’은 동일한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그런 형식은 내 인생에서 큰 의미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사 박미옥으로 충분했다.”
최근 박 전 경정은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이라는 책을 펴냈다. 잔혹한 범죄의 양상과 악랄한 범인의 실태, 수사 과정에서 범인과 형사가 벌인 두뇌 싸움 등을 담은 흥미진진한 후일담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그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자신이 수사에서 핵심 역할을 한 살인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책은 인간 박미옥이 형사라는 직업을 통해 어떻게 사람과 세상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책에서 몇 번씩 강조한다.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란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형사, 감성으로 했다”는 말은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이다.
1991년 창설된 여자형사기동대는 인신매매·성폭력 등 여성 대상 강력범죄가 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 사랑은 폭력이라는 인식이 희미한 시절이었다. 사랑한다며 스토킹을 반복하다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람,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파트너’ 관계였다고 변명하는 사람, 어린 자녀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친아버지 등 인간의 바닥을 봤다. 환멸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일 테다. 형사를 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엔 출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제대로 해보기 전에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30년 동안 여러 사건의 수사를 맡으며 새로운 판례를 만드는 데 힘썼다. 그사이 세상의 인식이 달라졌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옛날의 범죄처럼 지옥은 여전하다. 텔레그램 ‘엔(n)번방·박사방’ 등과 같이 범죄의 양상과 수법이 교묘하게 진화한 까닭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산꼭대기로 운반한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다시 옮겨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형사들이 수사해야 할 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책에는 그렇게 썼지만 사실 ‘지옥을 한 뼘 줄인다’까지도 생각 못한다. 최소한 내 세상 안에서라도 그게 지켜지길 바라는 거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는 거다. 형법에도 총론이 있고 각론이 있다. 큰 원칙이 있고 방법론이 있는데 대원칙은 변함없고 각론은 판례를 갖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범죄가 바뀌고 진화하는 것처럼 형사도 진화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세월이 지나 직급이 올라갔으면 그 직급만큼의 시간 투자와 기술, 리더십이 분명해야 한다. 시대가 변화하듯 내 세월과 경력도 끊임없는 확장성이 있어야 견딜 수 있다.”
형사 초년 시절에 그도 가해자들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박 전 경정은 “분노가 그 사건을 해결해주지 않았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대신 가해자에게 ‘왜?’를 묻기 시작했다. 형사 17년차인 2007년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행동분석(프로파일링)팀장 겸 화재감식팀장으로 기꺼이 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형사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범인이 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고 속단하기 이전에 “왜 순간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했을까?”를 물었다. 범인과 대화하는 과정도, 그리고 수사의 접근 방식에도 차이가 생겼다. 그래서 범인이 범죄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알려고 하는 수사와 알려 하지 않는 수사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박 전 경정은 “실제 ‘왜?’를 묻기 시작하자 사건이 더 잘 풀렸다”고 했다.
제주도로 터전을 잡은 건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20대 시절 제주도로 여행을 자주 가곤 했다. 올레길이 생긴 뒤로는 수시로 제주를 찾았다. “미옥씨는 가만 보면 제주 살 사람 같은데 땅 필요 없어요?”라는 지인의 말에, 다음날 바로 가계약을 했다. 그는 2017년 경정으로 승진한 뒤 “악착같이 제주도를 선택해 희망지로 왔다”고 했다. 스스로 1년 동안 물었다. ‘내가 혹시 번아웃(소진)으로 위장하고 거창하게 제2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1년이 지난 뒤에도 제주 생활에 가슴이 뛰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이듬해부터 후배와 함께 집을 지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작은 집을 짓고 마당을 공유하며 산다.
“열심히 일하면서 승진도 해보고, 팀장이나 강력계장을 할 때까지는 괜찮았다. 현장과 아주 가까웠고 그래서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상사의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점점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에너지가 죽는 느낌이었다.”
박 전 경정은 바로 옆집에 사는 윤정원 작가와 가깝게 지낸다.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글이 잘 써지지 않자 윤 작가가 도움을 줬다. ‘글이 안 써지면 도구를 바꿔서 그림이라도 그려보라’며 윤 작가가 캔버스와 화구를 건넨 것이다. 바비인형·샹들리에 등 오브제 작품으로 잘 알려진 윤 작가는 코로나19 기간에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박 전 경정의 집에 머물게 됐다. 2주가 한 달, 두 달이 되며 1년을 머물렀다. 제주 생활이 마음에 든 윤 작가는 박 전 경정의 집 바로 옆에 작업실과 집을 지었다. 박 전 경정은 액자 리폼 등 윤 작가의 작업을 보조하는 어시스턴트 겸 활동을 지원하는 매니저 역할을 한다.
일이 없을 때는 집에서 커피콩을 볶거나 서재에 머무른다. 지인들이 오가던 서재는 사랑방처럼 쓰인다. 사람이 몰려올 때는, 지인의 지인까지 하루에 28명이 제각각 들르기도 했다. 반도네온 연주자를 초청해 공연을 연 적도 있다. 인근 주민을 포함해 8살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서재에 모여 음악을 감상했다.
10대 박미옥에게 경찰은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지키려는 삶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에게 경찰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연히 들어선 강력형사의 길은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줬다. 서재를 만들어 지인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머물게 하는 것도 “형사 일의 연장선상”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좀더 있기를, 그리고 그 사람이 잠깐이라도 호흡하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위로받기를 바란다. 박 전 경정의 서재에는 범죄 관련 서적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 죽음, 문학, 예술과 관련한 책이 즐비하다. 사진과 조형물 등 예술작품도 곳곳에 배치됐다. 편안히 쉬다 잠들 수 있게 안락한 자리도 마련해뒀다. 그는 유독 이 공간에서 우는 사람이 많다고 느낀다.
인터뷰가 진행된 이날 오전, 박 전 경정은 인근 우체국에 차를 타고 다녀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여전히 형사를 꿈꾸는 학생에게 책을 보내주기 위해서다. 저자 사인과 더불어 고심한 문장을 적었다. “꿈을 꾼다는 건 좋은 것 같다. 꿈을 시작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성장통도, 확장성도 필요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버겁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 삶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한테 큰 동력이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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