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사에서 저녁 시간대에 15살 이상 시청가로 방송하는 설 특선 영화라는 점을 진중하게 고려한 편집일 뿐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지난 설 연휴 ‘세계 최초 공중파 상영’이라고 선전하며 <보헤미안 랩소디>를 편성한 뒤 동성 간 키스 장면을 삭제 편집해 방영한 SBS 관계자의 말이다. 동성 간 키스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 주제와 관련한 것임에도 “지상파 채널에서 영화를 방영할 때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이나 흡연 장면을 임의로 편집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삭제했다고 한다. 이것 참 어디서부터 문제 삼아야 할지 난감한 와중에,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이 “명백한 차별이며 검열”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완전히 동의한다. 마음 같아서는 2020년 코로나19 서울 이태원 감염 확산이 성소수자 혐오로 이어졌던 상황에 대해 “비말이 가장 위험한 감염경로라니 최소한 ‘키스 금지령’이라도 나오려니 고대했다”는 구술생애작가 최현숙의 일갈처럼 유머러스한 글을 쓰고 싶지만, 유머는 젬병이니 포기하기로 한다.
폭력은 나쁘다거나 폭력을 예방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어려운 건 무엇이 폭력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는 특히 배움이 더디고 자주 퇴행을 반복해왔다. 유서도 깊다. 성매매를 ‘윤락’이라 부르며 이중적 성문화를 조장해왔던 반세기 전부터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 유통을 ‘4대악’으로 묶었던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불평등과 부정의(injustice)의 문제를 도덕과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에 익숙하다. 때로는 성폭력을 ‘불미스러운 일’이라 칭하며 미추의 문제로 치환하기도 한다.
십수 년째 제정되지 못한 ‘스토킹처벌법’은 또 어떤가. 스토킹을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를 다루는 경범죄로 처벌해온 것이나, 가정폭력처벌법의 주요 목적으로 ‘가정 보호’를 둔 것도 잘 알려진 예다. 모두 폭력이 무엇인지, 왜 나쁜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총체적으로 왜곡한다. 이 오래된 문제를 바꾸는 데 언론이 앞장서도 부족할 판에, 뜬금없이 키스가 문제라니?
‘벽치기’나 ‘기습키스’ 같은 것을 남자의 ‘박력 있는 애정 표현’으로 재현해왔던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생각하면, 지상파 방송이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이 아닐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수많은 이성애 키스 장면이 아닌가? 물론 배우자가 스킨십을 시도하면 “가족끼리 왜 이래?” 하며 피한다는 중년 부부의 농담이 드러내듯, 실제로는 이성애자라고 뭐 대단히 열심히 이성애를 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이성애가 ‘정상’이라는 관념은, 오직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차별한 것의 결과물일 뿐이다.
차별은 ‘자연스럽다’그렇지만 이번 사건에서 내가 가장 ‘꽂힌’ 것은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는 대목이다. 공적인 책임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특별한 의도가 없다’는 말을 마치 중립성과 무고함의 표지처럼 사용하는데, 엄청난 오해라고 생각한다. 구조화된 차별이 재생산되는 데는 원래 ‘특별한 의도’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직장 내 성희롱 판단 기준에 “행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오직 강자만이 ‘특별한 의도가 없었다’는 말을 쓴다. 반면 약자는 일거수일투족을 해명하며 산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라 동의 없는 키스가 문제다. 이 당연한 문장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 바로 지배체제다. 강자의 폭력을 키스로 둔갑시키는 것은, 약자의 키스를 폭력으로 둔갑시키는 것과 짝을 이룬다. 동성 간 키스를 문제 삼는 동안, 이성애 관계에서의 폭력은 ‘남자의 본능’ ‘호감 표시’라며 보호된다. 그러니 SBS 쪽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차별과 혐오가 ‘특별한 의도 없이’ 공기처럼 자리잡은 사회에서, 적어도 지상파 방송이라면 그 공기를 바꾸는 데 기여하겠다는 ‘특별한 의도’가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지.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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