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매 학년 초, 모든 교사는 그해 담당할 동아리를 선택한다. 보통 나는 영어 관련 동아리를 개설한다. 그동안 ‘영어 노래 패러디반’ ‘영자신문반’ 등을 운영해봤고, 지난해에는 ‘영어야, 놀자반’을 담당했다. 모두 영어를 재미 또는 실생활과 연결 지어 학생들에게 긍정적 영어 학습 경험을 만들어주려는 시도였다.
올해는 시대적 흐름을 좇아 인공지능을 접목한 영어 동아리를 개설했다. 회심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웬걸, 지원자가 0명이었다. 만약 성인 대상 동아리였다면 결과가 정반대였으리라! 영어에도 인공지능에도 무관심한 아이들에겐 둘의 조합은 최악이었던 모양이다. 실소를 머금고 있자니 동아리 업무 담당 선생님이 홀연히 나타나 내 손에 동아리 출석부를 하나 쥐여주셨다.
“다른 동아리에 신청자가 몰려서 반을 나누려는데, 샘이 이 동아리 한번 맡아봐요.”
그렇게 얼떨결에 맡게 된 동아리가 ‘좋은 글 필사반’이었다. 책을 손글씨로 베껴 쓰는 동아리라니, 두 가지 점에서 아이러니였다. 먼저, 내가 의도했던 인공지능 중심 동아리와는 정반대인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동아리를 맡게 됐다는 점. 다음으로, 이게 더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정작 아이들의 손글씨를 단 한 글자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첫날, 동아리에 들어온 8명에게 지원 동기를 물었다. “존경하는 이상 작가님의 작품 같은 고전 작품을 직접 손으로 써보고 싶어서”부터 “통기타부에 지원했다가 떨어져서”까지 다양했다. 말하자면 나 역시 후자에 가까운 케이스였다. 하지만 교사라 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학생들에게 유익한 교육 경험을 제공할 책무가 있지 않던가? 학생들과의 첫 만남 이후 어떤 책을 필사 대상으로 선정할지부터 동아리 운영 방식까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가장 중요한 필사 책으로는 김영민 교수의 에세이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어크로스 펴냄, 2018)를 선정했다. 내가 무척 재미있게 읽은데다, 문장의 짧은 호흡과 재치, 사유의 깊이에서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진행 측면에선 필사 전에 오디오북으로 먼저 들어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필사반이라고 해서 덩그러니 책만 던져주고 필사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 매시간 필사할 부분을 오디오북으로 먼저 함께 듣고 감상평을 나눈 뒤 필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첫 필사 전 근처 문구점에서 필사노트를 사 학생들에게 줬다. 자기 손으로 남기는 글인 만큼 그 기록물도 소중히 간직하길 바랐다. 이런 소소한 준비 시간이 내게도 작은 설렘을 가져다줬다.
“그럼, 시작해볼까?”
마침내 내 신호와 함께 교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각사각 서걱서걱 펜이 종이를 스치는 리듬이 들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 풍경 하나가 펼쳐졌다. 아이들이 곱게 펜을 쥐고 열중해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 그리고 그 행간에서 어떤 시공간이 열리며 아이들의 내면세계가 종이 너머로 펼쳐지는 상상을 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읽은 다른 책들을 함께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아이는 이 시간이 끝나면 찾아올 해방의 시간을 꿈꿀 것이다. 또 다른 아이는 김영민 교수가 풀어낸 사유와 씨름하며 곰곰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일 것이다. 그렇게 10분, 20분, 30분이 침묵 속에 흘러갔다. 모처럼 충만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난생처음 필사를 마친 아이들은 생각보다 힘들다고 했다. 노고를 치하할 겸 학교 근처를 산책하며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아이들은 룰루랄라 즐겁게 집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필사를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평소처럼 수업을 끝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 얘기했다. 필사반 동아리에 속한 남자애였다.
“동아리가 기다려져요.”
그 아이는 개인적으로 필사할 책도 따로 샀다고 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필사반을 맡길 잘했구나!’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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