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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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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김영희를 모른다

등록 2026-08-06 20:55 수정 2026-08-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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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김영희. 한국에서 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이름은 애석하게도 둘째가 못 된다. 한 신용정보회사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4266만2467명의 이름 중 ‘김영희’는 3만5190명. ‘김영숙’과 ‘김정숙’에 이어 세 번째로 흔한 이름이다.(이럴 줄 알았으면 필명을 김영숙으로 짓는 건데.)

내 본명은 성도 이름도 흔치 않은데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와 동명이라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고들 한다. 막 학교에 입학한 수진이나 지혜가 이름의 한자 뜻을 외울 때 나는 이름에 얽힌 사연을 구구절절 외웠다. 제가 태어난 해에 그 작가님께서 사형 구형을 받아서 우리 부모님이 이거다, 하고 이름을 지으셨는데 말이죠. 사전을 찾아보니 또 순우리말 뜻이 예쁜 단어였더라고요. 그 뜻이 뭐냐면….

 

튀는 본명이 주는 덤을 내려놓고

 

1990년대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자 부모님은 나를 앉혀놓고 신신당부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컴퓨터로는 절대 아무 글이나 쓰면 안 된다. 지금도 내 본명을 검색하면 초등학생 때 쓴 백문백답부터 대학생 때 시작한 정기 후원 내역, 지금까지 제작한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과 사례자 모집 글까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인터넷에 자신의 흔적을 쿠키 조각처럼 흘리게 된 세상에서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다소 성가신 족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족쇄는 한편으로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출연이나 자문을 부탁해야 하는 방송작가에게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유리한 면이 있다. 도무지 밋밋한 자기소개가 불가능한 내 본명은 그에 얽힌 사연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처음 만난 사람과 아이스 브레이킹이 가능한 아이템. 애쓰지 않아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니 빈 밥상 위에 올려놓을 숟가락 하나는 타고난 셈이다. 대기업에 입사할 재주도, 주식투자로 떼돈을 벌 배포도, 서울 자가 마련을 위해 끌어모을 영혼도 없는 이에게 이름값이란 어쩌면 마지막 남은 인생 역전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인플루언서’가 직업 사전에 등재되는 시대, 방송사에서 일하는 나는 매일 이름을 알리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살고 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먼저 달리는 제목. 지금까지 나는 몇 개의 제목을 지었을까?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고 사연을 궁금하게 만드는 제목을 짓기 위해 매일 머리 싸매는 일을 하면서, 김영희는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지은 밋밋한 제목이다. 수많은 이름이 반짝 떠올랐다 잊히기를 반복하고 ‘듣보’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를 이어가는 와중에 어째서 타고난 이름 수저를 걷어차고 김영희인지. 이거야말로 괜한 허세나 과한 자의식은 아닐까.

 

김영희라는 이름으로 쓸 이야기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김영희의 이야기가 계속 읽히는 세상. 유명하지 않은 이름, 특출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에도 귀 기울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어 3만5190명의 김영희가 제각각 하고 싶은 말을 떠드는 것. 이름이 아니라 글이 읽히는 시대. 그리하여 모두가 헛된 이름에 속지 않고 더 좋은 사람과 이야기를 스스로 찾는 눈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이 궁금한 것은 내 본명인가, 김영희가 앞으로 쓸 이야기인가? 인생에 딱 한 번 널리 이름을 알릴 기회가 온대도, 나는 과연 무명의 김영희로 남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영희 방송작가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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