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9년 되는 ‘주말에 만나는 남자’와 매 주말 식도락을 즐겨왔음에도 그는 내 입맛을 꿰지 못한다. 20년 넘게 같은 식탁에서 젓가락을 부딪혀온 가족도 해를 지나며 미세하게 변하는 내 입맛을 간파하지 못한다.
백영옥의 소설집 (문학동네 펴냄)의 표제작을 읽고 내 미감을 가장 잘 읽을 이는, 내 한 달치 카드 영수증을 보는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잡지사 관리팀에서 일하는 ‘한아’는 기자들의 영수증과 외부 필자들의 원고료를 정산하고 입금하는 일을 맡아서 한다. 출장비, 인터뷰, 화보 촬영을 위한 진행비, 사진가나 스타일리스트와의 미팅을 위해 쓴 식사비와 교통비, 취재 및 회식비 등 모든 내용의 영수증을 관리하는데, 그중 먹는 행위에 사용한 내용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리라. 출장을 가도 먹고, 누군가를 만나도 먹고, 취재를 하다가도 먹고, 야근을 하다가도 먹으니까. 심지어 회식은 모여서 먹는 행위가 아닌가.
한아는 영수증을 정리하며 영수증 주인들의 취향도 정리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최 차장은 알코올중독자다. 마감 때면 편집팀 야식비 명목으로 지출하는 맥주와 와인의 양이 도를 넘고 있다.” 기자들이 다녀온 식당을 좇다가 본의 아니게 사내의 은밀한 연애를 추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 이사는 불륜에 빠졌다. …상대는 패션지 의 유 차장. 이들의 영수증엔 같은 장소가 유달리 많다.”
몰래 연정을 품은 이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좀더 면밀한 조사가 이뤄진다. “의 패션팀 수석 이정우는 중독자다. …늘 야근을 하고, 터무니없이 많이 읽고, 지나치게 마신다. 하루 다섯 잔의 에스프레소, 다섯 캔의 맥주가 마감 때면 어김없이 두 배로 늘어….” 이뿐만이 아니다. 한아에 따르면, 이정우는 밀푀유를 좋아하고, 회사에서 혜화동 집까지 야근 때마다 1만2800원짜리 영수증을 끊고 택시를 타며, 같은 식당에서 같은 음식을 자주 먹는다.
매달 18일, 책상에 수북이 쌓인 영수증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한아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취향이라는 이름의 정제된 일상, 흡연처럼 고치지 못한 악습들, 다이어트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삼십대 도시인의 정체성까지. 그날 밤 그는 일기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요한 사무실에서, 남의 일기를 엿보며 한아는 이정우의 취향을 읽고, 그의 일상을 되짚어 상상하고, 은밀하게 짝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간다. 영수증 정리를 손에서 털고 나면 한아는 “꼭 함께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데이트를 즐긴다. “나는 영수증이 알려주는 대로 그가 갔던 식당으로 돌아가 오도독 소릴 내며 오돌뼈를 먹고, 그가 마셨던 하이네켄 맥주를 사서 마셨다.”
한아가 밝히듯, 영수증은 내가 먹은 것을 알고 있다. 날씨 탓인지 단것이 당겨 요즘 유독 컵케이크며 설탕이 잔뜩 들어간 커피며 초콜릿 따위를 영수증에 연속해서 찍고 있는 내 영수증을 누군가 주목하고 있다면, 내 일기를 엿보고 있다면, 그리고 행여 한아처럼 일상 복제를 시도한다면, 당신은 이제… 살찔 일만 남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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