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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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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키는 것마다, 집는 술마다

에밀 졸라 <목로주점>을 맛본 여행
등록 2012-12-08 00:00 수정 2020-05-03 04:27
신소윤 기자

신소윤 기자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십 몇 년 전 대입 수능 제2 외국어 영역 프랑스어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정도? 그런데 사실 그 해는 제2외국어 시험을 수능에서 본 첫해인 터라 난이도 조절에 실 패했는지 전혀 변별력이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1개 틀리면 망 한 점수였다. 솔직히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별명이 ‘니불포’(니 땜에 불어 포기했다)였던 선생님 밑에서 2년 배우며 (사실 은 졸며) 2년째에는 30점대 점수를 받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두 차 례나 프랑스어 수업을 재수강하는 정도? 도대체 후한 점수 따위는 모르는 이 오만한 언어가 나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분노는 엉뚱한 곳 으로 튀어서 나는 프랑스 여행 따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화는 사그라지는 법. 고등학교·대학교 때 받 은 프랑스어 점수 따위가 내 삶에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데 나 는 왜 그렇게 화를 내야 했을까. 주말에 만나는 남자와 2년 전 이 무 렵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그런데 ‘겨울 날씨 좋아봐야 믿을 것 못 된 다’는 우리 속담이 유럽에서도 통할 줄이야. 일주일 중 하루 반짝 해 를 본 우리는 내내 얼음 조각 같은 빗속을 다녀야 했다. 발열 내복의 발명은 정말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 내내 사람들은 그다지 친 절하지 않았고, 호텔은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고, 길에서 만난 사기꾼은 우리의 멱살을 잡았다. 프랑스는 나의 무엇이 그렇게 미워 서 이렇게 혹독함만 안겨다주는가. 스페인에 가기를 주장하는 동반 자에게 뭐에 홀린 듯 프랑스를 우겼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떠나는 공항에서 우리는 다른 여행지에서 그러듯 꼭 다시 오 자고 약속했다. 우리의 마음을 녹인 것은 그 나라의 음식이었다. 파 리는 우리를 너무 잘 먹여줬다. 어쩜 모든 식당이 그렇게 맛있을 수 있지? 음식의 신이란 게 있다면 우리 편인 것 같았다. 우리는 분자 요리를 한다거나 세계적인 요리사가 음식을 내주는 식당을 예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끼니때만 되면 자연스레, 사람이 북적이는 평범한 식당이 눈앞에 반짝이며 나타났다. 우리가 가리키는 모든 메뉴는 성 공적이었고, 우리 손이 집어드는 모든 와인은 맛이 깊었다. 춥고 외 딴 골목에서 서성이던 우리를 식당의 안온한 불빛과 한 접시의 따뜻 한 음식이 보듬어줬다.

에밀 졸라의 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음식의 정 서는 그때의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에는 결결이 음식 냄새가 배 어 있다. 파리 민중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린 서글픈 이야기 사이에는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이야기도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예컨대 제르 베르의 생일을 맞아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 같은 것. “포타주(걸쭉한 수프)와 삶은 쇠고기는 언제나 맛있지. …그런 다음에 소스를 곁들 인 요리를 먹는 거야.” 그리고 몇 장에 걸쳐 이어지는 소박한 음식들, 돼지 등뼈로 만든 감자탕, 베이컨을 곁들인 완두콩, 거위 구이 등등. “냄비 뚜껑을 열자 은밀한 떨림과 같은 보글보글 소리가 조그맣게 들 려왔다”와 같은 섬세한 문장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의 찌든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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