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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곶감, 나의 밧도

<같이 먹고 일하면서 놀았다네>의 어린 시절 먹거리
등록 2013-02-19 22:32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윤운식 기자

한겨레 윤운식 기자

어릴 적 시골에 친척집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방학 때마다 할머 니댁에 간다는 짝꿍은 손이 큰 할머니가 쉼없이 내주는 옥수수며 복 숭아며 수박이 지겹다는 듯 이야기하곤 했다. 내가 부러워하는 기색 을 보이면 한술 더 떴다. 계곡물이 지난해에는 가슴까지 왔었다는 둥, 그곳의 친구 누구는 어떻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했다. 나의 친척들은 대부분 같은 도시에 살았다. 지하철만 타도 할머니집에 갈 수 있었다. 근처에 놀 데는 아스팔트길 따라 걸어가면 나오는 초등학교 운동장 이었다.

딱 두 번, 아버지 친구의 고향집인 경남 밀양 근처 작은 마을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대추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여름 대추가 사 과처럼 아삭하고 달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할머니는 밤마다 수박과 복숭아를 한밤중에 오줌보가 터질 지경으로 내주셨다. 낮에는 동네 어디에서 잡았다는 돼지를 숯불에 구워 먹었다. 시골집이 있는 친구 들이 자랑하던 호사를 제대로 누렸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일기 는 아마 다른 날보다 풍성했을 것이다. 노는 것이 일이었던 시절에 그 런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간직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김용택의 (문학동네)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 김용택이 1948년부터 2012년까지 섬진강변 작은 마을 진메에 살며 겪은 크고 작은 이야기를 기록한 글들을 다시 정비해 올해 초 8 권의 산문집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를 내놓았다. 개중 는 맨 먹는 이야기다. 지금처럼 고깃값이 채소 가 격을 밑돌지 않던 시절,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 잡는 날은 축제일과 마찬가지였나보다. 돼지 잡는 과정부터 시시콜콜 썼는데, 소박한 얘 기들이다. 여름밤 잠든 물고기를 몰래 사냥하던 기억, 평소에 멍청해 서 잡으려 해도 잘 도망가지 않아 ‘멍청이’라는 이름이 붙은 물고기는 밤에는 깊은 잠에 빠져 손으로 들어올려도 자고 있단다. 왠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돼 웃음이 새나왔다. 겨울밤 곶감 서리를 하고 이웃 마을을 향해 씨를 훌훌 뱉어내고, 다음날 노발대발하는 어른들 앞에 서 이웃 마을 아이들에게 혐의를 씌우는 이야기는 곶감 빼먹듯 잠 안 오는 밤에 다시 읽고 싶다. “마을 구석구석이 몸과 마음에 섞여 있다” 는 시인은 그러고도 할 이야기가 잔뜩이다.

머리가 크고 내내 타향살이를 하다보니 어릴 적엔 별 재미없던 도시 가 내게도 고향이 되어버렸다. 설 연휴 고향집에 내려가 예전에 자주 먹던 음식들을 조곤조곤 씹어 삼켰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생선전이 다. 자갈치시장에서 파는 ‘밧도’(달고기)로 부친 생선전은 명태전에 비 할 수 없다. 보드랍고 하얀 살코기는 비린 맛 하나 없이 담백하고 고 소하다. 뜨거울 때 먹어도 맛있고 식어도 맛있다. 명절이면 나와 사촌 들은 어린 김용택과 친구들이 곶감 서리하듯 소쿠리에 널린 생선전 을 살금살금 빼먹곤 했다. 시인만큼 풍성하진 못하겠지만 고향에서 멀어지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면서 심상히 지나갔던 이야기들이 흐 르다 쌓이는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이 를 먹어간다는 건가. ㅠㅠ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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