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자료
“수박을 먹는 기쁨은 우선 식칼을 들고 이 검푸른 구형의 과일을 두 쪽으로 가르는 데 있다.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김훈 세설, , 생각의나무 펴냄)
‘선홍색의 바다’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온몸 땀구멍의 존재를 확인하는 요즘이다. 덥다, 정말 덥다. 얼마 전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바깥에서 이런저런 사람 붙들고 취재를 했다. 끝나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보니 입술에 하얀 소금 결정이 붙어 있었다. 얼마나 모양이 우스웠을까. 이런 날에는 일이고 뭐고 그늘에 앉아 수박 한 통을 쩍 하고 쪼개 와작와작 씹어 먹고 씨를 훌훌 경박스럽게 뱉어내다가 입가에 단물을 그대로 묻힌 채 잠이나 들었음 좋겠다 싶지만, 알량한 직장인에게 이런 사소한 바람이 가당키나 한가.
햇볕을 많이 머금은 여름 과일은 달다. 수박, 복숭아, 자두, 참외, 포도 등 온통 물 많고 단내 나는 것들. 이 중에 가장 좋은 걸 꼽으라면 복숭아겠지만, 가장 여름 과일다운 것을 꼽으라면 수박을 선택하겠다. 수박은 애초에 불과 거리가 먼 과일이다. 복숭아나 자두는 설탕물을 끓여 절여놓을 수도 있고, 파이의 속재료가 될 때도 있다. 포도는 알알이 바락바락 씻어 설탕과 함께 뭉근하게 끓여 잼을 만들 수도 있다. 아, 생각만으로도 덥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더운 계절에 포도알은 웬 말이며 불 앞에서 설탕물을 끓이는 건 무슨 미련한 짓이란 말인가. 그러면 수박은? 수박은 응용이 부족한 과일이다. 껍질로 무침이나 김치를 만들어 먹는다지만 아삭거리는 식감이나 맛이 무나 배추에 따라갈까. 과육을 긁어 화채를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이 또한 수박이 맹탕일 경우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수박은 그저, 김훈이 책에 쓴 대로 “입과 코와 가능하면 턱까지 모두 빨간 과육 속에 깊숙이 파묻고 손가락 사이로 과즙을 줄줄 흘러가면서 입을 크게 벌려서 걸신 들린 듯이 아귀아귀 먹어야” 제맛이다.
그러니 수박은 혼자 먹으면 또 맛이 안 난다. 시끄러운 소리 내가며 단물을 뚝뚝 흘려가며 먹어야 하는데, 집에서 혼자 앉아 무슨 재미가 날까. 주말이 돌아오니 수박을 한 통 사서 냉장고에 쟁여둬야겠다. 주말에는 사람을 불러다 아귀아귀 수박을 베어 먹어야지. 이러자고 주중에 얼굴에 소금 뿜어가며 일한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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