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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띵하게 짜릿한

‘남아 있는 나날‘의 코코아
등록 2013-01-19 00:27 수정 2020-05-03 04:27
안아달라고 다리 잡고 매달리는 아기. 젖먹이는 엄마 껌딱지다. 한겨레 임지선 기자

안아달라고 다리 잡고 매달리는 아기. 젖먹이는 엄마 껌딱지다. 한겨레 임지선 기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민음사 펴냄)에서 스티븐슨 은 딜링턴홀의 유능한 집사다. 스티븐슨의 자존감은 35년 동안 저명 한 가문에 속해 집사 직무를 빈틈없이 해냈다는 데서 비롯한다. 총 무인 켄턴 또한 유능하고 합리적으로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을 처리 한다. 스티븐슨이 완벽주의자에 워커홀릭이라면 켄턴은 일과 자기 삶의 무게를 놓고 저울질하는 인물이다. 어쨌거나 둘은 대체로 합을 맞추며 저택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주로 의견을 교환할 때가 저녁 시간의 티타임이다. 두 사람은 언제나 코코아를 마시며 회의한다.

어느 날 스티븐슨은 6년째 일해온 하녀 루스와 사라를 유대인이라 는 이유로 해고하라고 한 주인의 지시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 고, 켄턴에게 통고한다. 켄턴은 “식료품 주문 목록을 논하듯” 전달되 는 그 이야기에 분통을 터트리고 반발하지만 스티븐슨은 끄떡없다. 이들의 코코아 회동은 이후로도 습관처럼 이어지지만 한동안은 냉 랭한 기운이 감돈다.

두 사람이 만약 홍차나 녹차를 잔에 담아 회의를 했다면 나는 그들 이 회의 때마다 무엇을 마셨는지 기억 못했을 테다. 이전의 코코아가 따뜻하고 익숙하고 서로 간 호의의 상징으로 비쳤다면 삐걱대기 시 작한 코코아 회동에서 이 음료는 그 특유의 따뜻함과 부드러움 때 문에 오히려 겉돈다.

그러니까, 코코아는 그런 기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고체 상태의 초콜릿을 우유에 녹인 것에 불과한데, 따뜻한 온도에 액체가 되면 서 초콜릿은 더 풍부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고 강렬해진다. 우유를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여러 빛깔의 맛을 내는 것도 재미있다. 스티 븐슨과 켄턴이 마신 코코아는 초콜릿 맛이 진했을까, 우유 맛이 진 했을까. 둘의 감정 상태에 따라 코코아도 농도를 달리하며 널을 뛰 었을까.

프랑스 파리를 여행할 때 빗길을 헤치고 찾아갔던 카페 레 되 마고 는 사르트르, 생텍쥐페리의 단골 카페였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 나 그들은 이미 저 먼 곳으로 떠났고 남은 것은 여전히 명성이 자자 한 진한 핫초콜릿이다. 레 되 마고의 핫초콜릿은 전쟁 때 식사 대용 으로 먹은 핫초콜릿을 재현했다 할 정도로 묵직하고 달다. 따뜻한 컵을 손에 쥐고 한 모금 마셨을 때, 너무 진해서 초콜릿이 이렇게 짜 릿할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걸 마시겠다고 파리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좀 울적하 고 위로받고 싶을 때는, 간단한 노력으로 집에서 레 되 마고 핫초콜 릿 짝퉁을 재현할 수 있다. 크기가 다른 냄비를 두 개 꺼낸다. 큰 냄 비에 물을 끓이고 작은 냄비에 초콜릿을 담아 중탕으로 녹인다. 따 뜻하게 데운 우유를 취향대로 섞는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고 진 하게 먹고 싶다면 우유를 거의 섞지 않아도 괜찮다. 느끼하다면 계 핏가루를 조금 넣는다. 이도저도 귀찮다면 그냥 컵에 초콜릿을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된다. 다만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금세 새까맣 게 타 곤란한 지경에 처할 것이다. 뭐, 초콜릿이 주는 또 다른 짜릿함 을 맛보고 싶다면야….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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