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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 하나 없는 적막한 부엌

성석제의 <소풍>, 제삿밥
등록 2012-10-13 13:44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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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무나물, 숙주나물 등등을 얹은 뒤 간장을 가볍게 넣어 비빈다.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정성만큼 먹는 데도 정성이 필요한 것 같다. 이윽고 나물 씹히는 소리와 참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퍼지는 가운데 탕국 훌쩍이는 소리가 곁들여진다.” 눈빛에 달빛이 더해 낮보다 더 환하던 겨울밤에 이웃집 친구 선종이가 눈밭을 헤치고 놋그릇에 제삿밥을 담아 심부름을 왔다. 은은하게 퍼지는 참기름 냄새가 한밤의 시장한 배를 자극한다. 할아버지가 먼저 잡숫고 차례가 오길 기다린다. 소설가 성석제가 산문집 에 실은 글 ‘눈 내린 들판 환한 달빛처럼’에서 추억하는 제삿밥이다.

다음은 나의 이야기. 교회에 다니는 외가와 달리 아버지네 집에서는 명절에 차례를 지냈다. 손이 큰 할머니는 그때마다 부엌이 차고 넘치도록 음식을 했는데, 간장에 달게 조린 해산물이며 살이 잘 오른 민어며 조기, 조갯살과 고기를 다져넣은 탕국 모두 맛이 좋았다. 제사를 지내고 식어 덩어리진 밥에 탕국 몇 숟갈을 넣어 보드랍게 풀어헤치고 여기에 고소한 나물을 넣어 쓱쓱 비비고,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생선전이며 산적을 얹어 먹는다. 좋은 재료들이 서로 뽐내지 않고 하나로 얽혀들었다. 배가 불러도 밥숟가락이 절로 움직인다.

소설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던 풍습을 되새기며 서울에는 이웃끼리 쟁반에 음식을 담아 돌릴 일도 없다며 못내 서운해하는 듯했다. 재작년 이 무렵이었다면 그 서운한 마음에 조금 동감을 할 수도 있었으련만, 이제 나는 제사며 명절 음식에 대한 낭만을 잃었다. 추석에 남편의 큰댁에 가서 내내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릇 하나 집어들 때마다 울컥하는 심정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왜 낯선 부엌에서 끝없이 그릇을 부시고 있어야 하나.

올해 결혼을 해 얼렁뚱땅 큰며느리 노릇을 하게 된 동생은 “명절이 없어졌음 좋겠다”고 말했다. 북에 고향을 둔 동생의 시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단다. 나물에 조갯살을 다져 넣는다든지 정성스런 음식을 배우는 게 처음에는 흥미진진했지만 그다음은…. 결국은 냉동실에 차곡차곡 들어갈 그 많은 음식을 보며 우리는 좀 허탈했고, 이제 어떤 굴레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에 좀 막막하기도 했다.

엄마는 30여 년 전 처음 결혼해서 아버지 집의 제사 음식을 보고 손윗동서에게 양을 좀 줄이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가 타박을 한 바가지 들었단다. 언젯적 이야기인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외로움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자기 편 하나 없는 낯선 부엌에서 엄마가 느꼈을 적막함을 나와 동생은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나물에 비빈 밥은 우리의 고단함과는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은은한 맛을 내뿜었다. 그걸 씹어삼키며 우리는 예의 낭만은 잃었지만 예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감정의 결을 하나 얻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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