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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믿음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어쩌면, 산 만큼 쌓였다. ‘생명 OTL-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7회는 이 명제에 물음표를 달아본다. 과연 부유하면 건강할까? 이 명제가 진실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혹은, 조건에 따라 더 이상 이 명제는 진실이 아니다. 부와 건강 사이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멀리 영국 노팅엄대학의 2009년 연구 결과를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연구 결과는, 건강 불평등의 내리막길로 떨어지는 우리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지난 6회에 걸친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일대기에 걸쳐 우리가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건강 불평등의 숨은 ‘지뢰’들을 한 번씩 꾹꾹 밟아보았다. _편집자
‘수준측량기’라는 기구가 있다. 건설 현장에서 쓰이는 도구다. 건물을 한 층 쌓아올릴 때마다 구조물이나 바닥의 수평도를 측정하는 도구다. 원리는 간단하다. 기구에 담긴 액체 속의 기포가 평평한 장소에 가면 가운데로 모이도록 만들어놓고, 공사 현장에서 수시로 구조물 위에 놓고 바닥이 평평한지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수준측량기 같은 기구가 고장 나면, 건물의 균형은 무너진다. 균형을 잃은 건물은 구조적 위험에 처하게 된다. 자칫 애써 지은 빌딩이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
사회역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학 교수가 2009년에 새 책을 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이 책은 낯선 건설 현장 기구에서 제목을 따왔다. (Spirit Level: Why Greater Equality Makes Societies Stronger)는 세계 각국의 소득분포과 건강 수준의 함수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각국의 소득과 건강 지표에 ‘수준측량기’를 대본 뒤,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 연구 결과를 냈다. 그의 이야기는 전세계 국가들의 소득과 수명을 그려낸 표 하나에서 시작된다.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미국의 기대수명은 77.3살이다. 코스타리카보다 낮다.1인당 국민소득이 5배 가까이 많지만, 삶의 길이는 반대로 짧다.소득 5배의 미국이 코스타리카보다 수명은 더 짧아
마치 화산에서 수직으로 터져나오는 용암 같다. 을 보면, 소득과 기대수명의 관계는 그만큼 극적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밑도는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소득이 한 뼘 늘 때마다 수명은 한 길씩 늘었다. 이 나라들의 바닥에는 아프리카의 빈국 잠비아가 있다. 잠비아는 1인당 국민소득이 구매력지수 기준으로 943달러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잠비아에서 뜨거운 여름을 40번 이상 맞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균수명이 고작 37.4살이다. 소득이 1만달러에 못 미치는 국가 집단 가운데 잠비아의 대척점에는 중미의 코스타리카가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9천달러를 조금 넘는다. 코스타리카의 평균수명은 78.1살이다. 잠비아에서 대서양을 건너면서 소득이 약 8천달러 증가하는 동안, 수명은 무려 50살 넘게 늘어났다. 표를 보면, 두 나라 사이에 100여 개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게 늘어섰다. 마치 모두 나란히 줄을 서서 ‘소득이 늘면 수명이 는다’라는 흔한 통념을 한목소리로 외치는 듯하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조금 돌리면, 성글게 모여 있는 또 하나의 집단이 있다.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는 부자 나라들이다. 이 집단으로 오면 가난한 나라에서 통하던 상식은 무너진다. 소득과 수명의 비례관계는 깨진다. 일단 선진국 그룹에 속하는 23개국의 분포를 확대해봤다(표2 참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미국의 기대수명은 77.3살이다. 코스타리카보다 낮다. 카리브해를 지나 미국으로 오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5배 가까이 늘었지만, 삶의 길이는 반대로 짧아졌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국가들의 좌표는 어떠한 일반화도 거부했다. 세계 최장수국인 일본도 국민소득 기준으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에 못 미쳤다.
이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윌킨슨 박사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나라들의 소득이 늘고 생활수준이 올라갈수록, 경제성장과 기대여명의 관계는 흐려진다. 그리고 (국민소득 2만달러를 지나면서) 그 관계는 사라진다. 부유한 나라에서 소득이 증가하는 것은 기대여명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 해석이 심상찮은 이유는 ‘경제성장=후생증가’라는 인간 역사 이후의 등식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생활의 질을 이끌고 진보를 낳았던 ‘경제성장’이라는 기관차는 그 기능을 멈췄다. 적어도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의 선진국에서는 새로운 상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윌킨슨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우리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새로운 답을 줘야 하는, 인류 사상 첫 번째 세대다.”
소득분배 공평한 일본의 평균수명 최장그 새로운 답으로 무엇이 있을까? 윌킨슨 박사가 책에서 찾는 것도 인류가 마주친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먼저 답에 닿기 전에, 그는 의 기준을 조금 수정해보았다. 우선 ‘x축’의 척도인 소득 지표를 ‘불평등 지표’로 바꿨다. 불평등 지표는 하위 20%의 소득에 견준 상위 20%의 소득수준인 ‘5분위 배율’로 표시했다. 1인당 소득 순서대로 줄을 섰던 23개 선진국은 다시 흩어모였다. 가장 앞에는 싱가포르가 나왔다. 양극화가 가장 심한 싱가포르에서는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9.7배를 더 벌었다. 가장 끝에는 일본이 섰다. 최상·최하위 소득 격차가 3.40배로 가장 적었다. 이 수치를 x축에 넣고 표를 다시 그리면 전혀 새로운 분포가 그려진다(표3 참조).
소득 분배가 가장 공평한 일본의 수명이 가장 길기 때문에 가장 왼쪽 위에 놓이고, 소득 분배가 네 번째로 평등한 스웨덴의 수명이 그다음에 놓였다. 수명이 가장 짧은 나라는 소득 격차가 세 번째로 큰 포르투갈이었다. 나라별 분포를 보면, 불평등 수준과 수명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반비례했다. 소득으로는 볼 수 없던 ‘법칙’이 불평등을 통해서는 거짓말처럼 드러났다. ‘불평등하면 오래 못 산다.’ 뒤집으면 ‘평등하면 오래 산다’가 결론이다.
우연의 일치는 아닐까? 저자는 미국의 50개 주에 대해 같은 연구를 해보았다. 소득과 수명의 관계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과 수명은 반비례했다. 한 사회나 국가의 전반적인 소득수준이 아니라, 내부 성원들 사이의 불평등 수준이 평균수명을 좌우했다.
도대체 ‘불평등’이 무슨 일을 한 걸까? 저자는 불평등이 사회 및 개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불평등과 사회문제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이를 위해 10개의 사회·건강 문제를 골라냈다. 이들은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 △정신질환 △평균수명과 영아사망률 △비만율 △15살 학생 학업성취도 △10대 임신 비율 △살인율 △교도소 수감 인구 비율 △계층 사이의 유동성 등이었다. 국제적으로 비교가 가능하되, 사회의 건전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었다. 개인의 수명과 건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기도 했다.
불평등은 비만을 부르고 아이를 죽여
먼저, 개인 건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살펴보자. 를 보면 불평등 수준과 정신질환 빈도의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y좌표에는 1998년 세계보건기구(WHO)가 9개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정신건강 설문조사 결과를 반영했다. 설문에서는 조사 시점으로부터 1년 사이에 정신적인 질환을 앓은 경험이 있는지를 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캐나다에서도 각자 국민을 대상으로 유사한 설문을 했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미국에서는 100명당 25명 이상이 정신질환을 앓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일본에서는 그 비율이 8.8명으로 떨어졌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영국 등 7개 나라가 약속한 듯이 나란히 줄을 섰다. 불평등과 정신질환은 거의 정확하게 비례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마약 소비 성향도 불평등 수준과 비례했다. 유엔이 2007년에 전세계의 마약 소비 현황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불평등 수준이 다섯 번째로 높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이 마약을 가장 ‘애용’했고, 마약을 상대적으로 멀리한 국가는 일본·스웨덴·핀란드 등이었다. 윌킨슨 교수는 “돈과 소유물을 늘리는 데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거나 유명해지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개인은 더 자주 우울, 불안, 약물 남용이나 인격 장애를 겪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풀이했다.
불평등한 사회의 시민은 허리둘레도 굵었다(표5 참조). 미국 사회의 비만율은 30%를 넘어섰지만, 일본인 가운데 비만일 확률은 2.4%에 불과했다. 국가들의 분포를 보면, 각국의 음식문화에 따른 차이를 감안해도 비만율과 불평등은 통계적으로 유의한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는 2002년 핀란드 오울루 지역의 한 건강연구소에서 5150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내용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은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칼로리가 많은 소시지나 햄버거, 피자, 초콜릿 등을 더 많이 먹고, 술도 더 많이 마셨다. 특히 여성에게서 이런 특징은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2003년 잉글랜드에서 벌인 건강조사에서도 여성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비만율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불평등이 심하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잦았다(표6 참조). 유엔이 2000년에 내놓은 범죄 자료를 보면, 양극화가 두 번째로 심한 미국에서 100만 명당 64명이 다른 사람의 손에 살해당했다. 일본(5.2명)보다 무려 12배나 높았다. 다만 소득 분배가 고른 핀란드의 살인율이 28.2명으로 세 번째로 높은 것이 이례적이었다. 핀란드는 민간 총기 소지 비율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했다.
어른들의 건강에 금이 간 사회에서 아이들의 사망도 잦았다. 23개 국가의 유아사망률 추이를 보면(표7 참조), 불평등과 유아사망률 사이에서도 상관관계가 또렷했다. 일본(10만 명 출생당 3.2명 사망), 스웨덴(3.2명), 핀란드(3.7명), 노르웨이(3.8명) 등 ‘평등국가’들이 표의 왼쪽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미국(6.9명), 포르투갈(6명), 뉴질랜드(6명) 등 소득 차이가 심한 나라에서 아기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불평등 → 불신 → 수명 단축
다음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을 비교하기 위해 미국 미시건대학 등에서 실시한 ‘세계가치관조사’ 결과를 끌어왔다. 여기에는 나라별로 ‘대부분의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라는 명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한 사람의 비율이 나와 있다. 결과를 보면(표8 참조), 나라를 옮길 때마다 격차는 극적으로 벌어졌다. 소득이 고른 북유럽의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은 모두 60%가 넘는 사람들이 타인을 신뢰했지만, 소득 격차가 큰 싱가포르와 포르투갈은 ‘불신국가’였다. 특히 포르투갈에서 타인을 신뢰하는 비율은 10.0%에 불과했다.
타인에 대한 신뢰와 건강은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까? 직관적으로는 두 변수 사이의 거리는 멀어 보인다. 저자가 제시한 몇 가지 근거 중 하나를 살펴보자. 1998년 미국 학술지인 (Journal of Behavioral Medicine)에 나온 ‘신뢰, 건강 그리고 수명’(Trust, Health, and Longevity)이라는 논문에서는 55~80살 성인 100명을 대상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을 물어본 뒤, 14년 뒤 이들의 건강 및 사망률을 분석했다. 결과를 보면, 타인에 대한 신뢰가 높을수록 건강 상태가 좋고 수명도 길었다.
이 논문이 다분히 ‘심리적’ 입장에서 신뢰 문제에 접근했다면, 1995년 700여 명이 사망에 이른 ‘시카고 폭염 사태’는 불신의 ‘사회적’ 부작용을 보여준다. 당시 시카고시에서는 폭염에 대처하기 위해 냉방장치를 갖춘 임시 숙소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흑인 주거지역에서
는 주민들이 높은 범죄율 때문에 도둑이 들까봐 집을 아예 비우지 못했다. 심지어 폭염 속에서도 집의 창문을 열지 않았다. 흑인 밀집지역의 사망 비율은 이웃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불신은 사회적 결속을 무너뜨리고, 재난 상황에서 서로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불신과 불평등은 서로 강화한다. …그리고 불신은 사회의 안녕은 물론이고 개인의 안녕에도 영향을 미친다.” 윌킨슨 교수의 설명이다.
그 밖에 학생 학업성취도나 10대 임신 비율, 교도소 수감 인구 비율, 계층 이동의 유동성 등에서도 더 평등할수록 더 ‘착한’ 통계치가 나왔다.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드러났다. 평등 수준에서 ‘모범국가’인 일본과 ‘불량국가’인 미국만을 비교해보자. 전세계 15살 학생들의 국어·수학 성취도를 묻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일본은 516점(23개 나라 가운데 일곱 번째)을 받았지만, 미국은 489점(열여섯 번째)을 받았다. 또 15~19살 여성 1천 명당 출산 횟수를 나타낸 10대 임신 비율은 일본이 23개 비교 대상 국가 중 가장 낮은 4.6명, 미국이 가장 높은 52.1명이었다. 교도소 수감 인구 비율은 미국이 10만 명당 576명이었고, 일본에서는 10만 명당 40명만이 철창 안에 있었다. 두 수치 모두 비교 대상 국가들의 리스트에서 양쪽 끝에 걸렸다. 또 개별 가정의 부모와 자식의 성인 시절 소득수준을 비교한 뒤 이를 집단적으로 집계한 ‘계층 이동의 유동성’ 항목에서도 미국은 조사 대상 8개 나라 가운데 유동성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런던 정경대 학자들의 2005년 연구 결과였다. 미국에서 아버지의 부가 자식에게 고스란히 옮겨갈 확률이 가장 높다는 뜻이다. 일본은 이 연구 대상이 되지 않았다. 노르웨이가 계층 간 이동이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자유로웠다.
지금까지 살펴본 10개 사회·건강 지표를 종합해 지수를 뽑은 뒤, 이를 불평등 지표와 비교했다(표9 참조). 비례관계는 선명했다. 여러 나라에 잠복한 불평등은 유아사망률을 높이고, 살인율을 높이고, 수감 인구를 늘리고, 학업성취도를 낮추고, 정신건강을 해치고, 10대의 임신 비율도 높인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는 국가 집단에 속한다.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소득 증대가 ‘수명 연장’으로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수명을 늘리려면 불평등 수준을 줄이라’는 처방은 우리나라에서도 유효하다.
결국 대부분 사회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득 불평등’과 마주치게 된다. 이것이 책의 중간 결론이다. 따라서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만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모든 사회문제는 다른 문제와 상관없이 각자의 해결책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위해 운동을 더 하라고, 피임을 하라고, 마약을 하지 말라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고 권유한다. 이런 식의 정책적 접근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성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사실은 모두 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이라는 한 원인에서 비롯됐다는 눈부시도록 또렷한 사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윌킨슨 교수의 얘기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 해답도 ‘소득의 불평등 감소’에 있다. 경제성장이 구실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시대에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길은 결국 ‘소득의 평등’에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소득이 평등하게 되려면 소득 격차를 줄여야 하고, 그러려면 많이 버는 이들의 몫을 덜어 적게 버는 이들에게 퍼줘야 한다. 여기에 더 높은 수준의 평등이 어려운 까닭이 있다. 가진 이들이 자신의 몫을 쉽사리 양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어디까지 정당한지를 두고도 논란의 여지는 남는다. 이 대목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뤄지고 있는 ‘복지 논쟁’과 궤를 함께한다.
평등한 사회에선 전 계층의 사망률 낮아져
로 다시 돌아가보면, 우리나라는 뉴질랜드와 슬로베니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윌킨슨 교수의 분석 대상 국가에서는 빠졌지만,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는 국가 집단에 속한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소득 증대가 ‘수명 연장’으로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윌킨슨 박사가 내놓은 ‘수명을 늘리려면 불평등 수준을 줄이라’는 처방은 우리나라에서도 유효하다. 윌킨슨 박사는 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소득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재분배적인 성격을 가진 세금을 활용하거나 복지 혜택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되는 복지 논쟁에서 핵심적으로 부상되는 무상복지와 재원 마련 문제는 그의 처방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결국 복지 논쟁은 윌킨슨 박사의 처방을 따라 가진 자들의 몫을 줄여 불평등을 줄이려는 입장과 이에 저항하는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갈등을 풀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윌킨슨 교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요지는 평등 수준을 높여도 부유층이 손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등 수준을 높여서 돌아가는 혜택은 빈곤층뿐 아니라 모든 계층에 고루 미친다.” 이 주장을 펴기 위해 그가 제시한 근거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영국의 잉글랜드·웨일스 지역과 스웨덴의 생산연령대 남성의 사망률 통계를 보면(표10 참조), 스웨덴의 사망률이 하류층뿐 아니라 상류층을 포함한 전 계층에 걸쳐 낮았다. 스웨덴의 평등 지향적 정책의 혜택이 모든 계층에 고루 퍼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경향은 영국과 ‘복지 후진국’ 미국을 비교한 연구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당뇨와 고혈압, 암, 폐질환, 심장병의 유병률이 모두 미국에서 높게 나타났는데, 두 나라의 인구를 교육 수준에 따라 세 계층으로 나눠도 모든 계층에 걸쳐 영국의 유병률이 낮았다. 구매력 기준으로 미국이 1인당 소득은 2004년 3만9676달러, 영국의 3만821달러였고, 스웨덴은 2만9541달러였다. 소득수준만 보면 ‘선진국 순위’는 미국·영국·스웨덴 순이었지만, 건강 수준은 그 반대였다. 또 그 혜택은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더 많이 죽는 길로 갈 건가윌킨슨 교수는 “연구들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평등 수준을 높이면 최고의 직업군, 최고 부유층,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에게도 현저한 이득이 돌아간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복지효과가 이미 인간이 이뤄낸 성취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유토피아나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완벽한 사회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북구나 일본 정도로 불평등 수준이 낮은 사회를 인간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2000년대 들어 빈부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 비율을 나타내는 ‘5분위 배율’은 2003년 시장소득 기준으로 5.0에서 6년 만인 2009년 6.1로 크게 늘었다. 우리 사회는 ‘모든 계층이 골고루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죽는’ 길로 굳이 함께 걸어가고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리처드 윌킨슨 교수 인터뷰
“세금 회피 막아 건강한 사회를”
의 저자인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학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의 2005년 저작 <the impact of inequality: how to make sick societies healthier>이 지난 2008년 우리나라에서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책에서도 그는 평등한 사회일수록 사회 성원들의 건강 수준이 높다고 설명했다. 2005년 책이 건강과 불평등의 관계에서 일정한 ‘경향’을 드러냈다면, 새 책에서는 그 주장의 근거를 보강해서 불평등과 건강에 관한 하나의 ‘이치’를 구성해냈다. 그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최근 책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68살의 노교수는 A4용지 3장을 가득 채운 답을 보내왔다. 그는 미래에 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우리가 더 평등하고, 더 지속 가능하고, 더 민주적인 노동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 새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선 책과의 변별점은.
= 앞선 책에서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주로 근거로 제시했다. 이번에는 직접 동일한 불평등 척도를 사용해 선진국 그룹의 불평등 수준과 건강 수준을 비교했다. 또 미국의 50개 주를 비교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평등한 사회가 건강, 신뢰, 학업성취도, 계층 간 이동, 사회적 통합에서 더 나은 결과를 보였고, 정신질환이나 폭력, 마약 남용, 비만 등 부정적 요소는 더 적게 보이는 점을 확인했다.
-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 우리가 아는 사회문제들이 대부분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불평등이 사회의 분열을 낳고 기반을 잠식한다고 생각해왔다. 우리의 연구를 통해 이런 직관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평등 수준을 높이면 최상류층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데,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 물론 평등 수준을 높이면 빈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부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종종 소득 상위 10%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데 놀라기도 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건강 및 사회 문제는 빈곤층뿐 아니라 전체 계층에 영향을 미친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이르기 위한 경쟁이 격하고, 그 과정에서 불안은 사회 전체에 두루 퍼진다. 물론 그 파급은 상류층에도 미친다.
- 더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은.
= 장·단기적 해법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누진세를 도입하거나 사회복지 혜택을 늘리는 것이 좋겠지만, 많은 나라에서 이런 정책을 펴기에는 정치적 환경이 좋지 않다. 이런 정책이 어렵게 등장해도, 정권이 바뀌면 손쉽게 사라지기도 한다. 우선 부유층이나 기업의 세금 회피를 막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기적인 해법으로는 모든 형태의 경제적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를테면 상호조합이나 공제조합, 근로자 이사 제도, 종업원 소유 기업, 생산자·소비자 생산조합 등이 그 예가 되겠다. 보통 이런 회사 안에서 직원들의 소득 격차가 적다. 또 노동자가 기업을 사들이면 회사는 자산의 한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 거듭나기도 한다. 정부는 더 민주적인 회사들이 생겨나도록 장려하기 위해 이런 회사들에 세금 혜택을 줄 수 있다. 또 소비자들은 이런 회사의 제품을 사주는 식으로 윤리적인 소비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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