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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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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격차가 몸의 격차로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

당뇨 앓는 동갑내기 남자 2명의 ‘건강사’ 비교…

잦은 부상과 합병증으로 몸 망가진 쪽방촌 이씨,

정기 검진과 자기 관리로 건강 지키는 중소기업 사장 고씨
등록 2011-01-19 17:09 수정 2020-05-03 04:26

글 싣는 순서
① 다섯 빈민의 임종
②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③ 중환자실에서 만난 외상환자들
④ 응급실에 숨어 있는 차별
⑤ 사는 곳에 따라 다른 사망률
⑥ 학력·소득 따라 갈린 두 남자의 건강

여기, 2명의 남자가 있다. 둘 다 1953년생, 계사년 뱀띠다. 형제 가운데서 장남이고, 아내와 2명의 자녀를 뒀다. 두 사람 다 당뇨를 앓고 있다. 여기까지는 얼추 비슷하다. 차이점은 여기서부터다. 한 사람은 산자락 달동네에서 컸고, 한 사람은 서울의 평범한 주택가에서 자랐다. 한 사람은 초등학교에서 배움이 멈췄고, 다른 사람은 명문대학을 나왔다. 2011년 1월에 만난 한 사람은 서울 종로구 한 평 쪽방에서 몸을 누이고 있고, 다른 이는 서울 서초구 빌딩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기초생활수급권자이고, 한 사람은 중견기업 대표이사다. 2명 모두 하나의 생을 품고 세상에 나왔지만 그 생이 그려온 궤적은 크게 달랐다.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6회는 58살 동갑내기 이상오씨와 고영각씨의 인생 이야기를 소개한다. 짧지 않은 인생에서, 두 사람 중 하필 한 사람만 많이 다쳤고, 많이 아팠고, 많이 앓았다. 우연만은 아니었다. 사는 동네가 달랐고, 먹는 음식이 달랐고, 예방의 수준이 달랐다. 두 사람의 ‘건강사’는 우리 사회의 건강 불평등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소박한 표본이다.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서술 형식으로 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풀었다. _편집자

1. 이상오씨 이야기

션찮게(시원찮게) 살았어요. 말할 만한 ‘건데기’도 없는 인생인데…. 고향은 부산 서구 아미동이오. 부산대학교 병원 뒤편 아미산이에요. 화장터 뒤쪽이었지. 나라 땅이었는데 촌 사람들이 ‘얼카가꼬’ 살다 보이 동네가 됐어요. 그때는 전쟁이 끝나고 시골 사람들이 먹을 걸 찾아 부산으로 왔는데, 오갈 데가 없으이 산에 ‘맹성맹성’ 모이 살았지.

뱃일·막일 전전… 당뇨 판정 받고도 방치
이상오씨가 한 평 남짓한 쪽방에 앉아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중풍을 앓고 있는 이씨는 하루 종일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날도 있다.

이상오씨가 한 평 남짓한 쪽방에 앉아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중풍을 앓고 있는 이씨는 하루 종일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날도 있다.

먹을 게 없으니까 노다지 굶었어요. 학교 가는 게 좋았어요. 학교에 가모 강냉이죽이라도 줬으니까. 집에 돈이 없어서 국민학교까지만 갔어요.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어요. 어릴 적 다친 일이 기억나네. 애들끼리 ‘찰떡, 주먹떡’ 하면서 서로 등을 타고 넘는 놀이를 했는데, 그러다 넘어져서 팔이 부러진 건지, 팔이 빠진 건지, 어쨌든 아팠어요. 그런데 병원에 갈 돈이 없었어요. 시장통에서 ‘콩나물집’ 할머니가 뼈를 맞춰줬어요. (왼팔 팔꿈치 위쪽을 보이며) 지금도 이렇게 뼈가 튀어나와 있어요. 뼈가 어긋났지. 국민학교를 나오고 압정 공장에 다녔어요. 한 달에 50원 받았어요. 거도 몇 달 다니다 그만뒀어요. 그다음에 간 곳이 마을 양복점이었어요. 말이 양복점이지 옷만 몇 개 걸어놓는 곳이었어요. 지게 지는 사람들이 모이 사는 동넨데 누가 양복을 맞췄겠어요. 우째다가 한 달에 한 벌 팔면 연명하는 정도였지. 거서는 월급도 없었고, 그냥 점심때 밥만 얻어먹으러 다녔어요. 그나마도 원깡 조금 못하면 때리싸꼬 해서 치아뻐렸어요. 그다음에는 부산극장 앞에서 신문도 팔고, ‘아이스케키’ 장사도 했고.

배를 탄 건 19살 때부터였어요. 지금은 저인망어선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줄대구리’ 배라고 불렀어요. 고기가 잘 잡혔어요. 칼치(갈치), 조구(조기), 삼치가 고루 잡혔으니. 원깡 벌이가 좋았어요. 선장도 마이 묵고, 기관장·갑판장도 마이 묵고, 나머지는 갈라 묵었는데, 그래도 육지보다 벌이가 좋았어요. 한 달에 10만원씩 벌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한 300만원 정도 되나. 제주도나 동지나해까지 가서 작업을 했어요. 한 달 작업하고 이틀은 들어와서 쉬고. 요즘은 유압으로 줄을 당기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줄을 당겼어요. 한번은 ‘로라’(롤러)로 줄을 풀다가 장갑이 말려 들어갔어요. (끝 마디가 없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그때 ‘와이아’ 줄에 손가락 마디도 끊겼어요. 24살 때 더 큰 사고가 났어요. 물고기를 담은 박스를 어창으로 ‘옇다가’(넣다가) 갑판에서 어창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척추 6번이 깨졌어요. 병원에서 6개월 동안 입원했어요. 당시 어선을 100척 넘게 가지고 있던 사장이 병원비도 주고, 150만원도 줬어요. 그걸 산재라고 하나(50쪽 기사 참조). 그땐 가족들이 부산에서 통영으로 이사간 뒤였어요. 아프니까 통영으로 내려갔어요. 허리가 쿡쿡 쑤셨어요. 한 2년 놀았어요. 군대는 제2국민역이에요. 크크. 학교를 몬 다녔으니까. 군대라도 갔으모 밥이라도 안 굶었겠구먼. 크크.

결혼은 26살에 했어요. 여동생이 저그가 잘 안다고 (아내를) 소개해줬어요.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어요. 한 5년 잘 살던 사람이 집을 나갔어요. 신이 들렸다 그러던가. 그때 사람이 좀 이상하더라고. ‘무당질’ 한다고 나가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대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봤더니, 정말 그거 하더라고요. 그래 마, (설득하는 걸) 그만두고. 그때부터 아이들은 친할머니가 돌봤고. 사람을 잊기 어려워서 술에 ‘쩌들어’ 살았어요. 집에서 2남3녀 가운데 장남이에요.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마이 좋아졌지, 그때는 사람도 아니었지. 술에 절어서. 사람이 생각나서 아예 잊어뿌리려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글쎄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나요. 그때도 종로 여기(쪽방촌)가 싸다고 해서 여서 살았어요. 그때부터 (고향에) 잘 내려가지도 않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막일은 하고. 몇 년 전까지 일했어요. 저기, 국일관 건물을 지을 때도 내가 일했으니까.

협심증이 10년 전에 왔어요. 부천에 막일을 하러 갔다가 쓰러졌지. 아주 혼났어요. 죽을 고비를 넘겼지. 부천 세종병원에서 수술을 했어요. 보름 입원했는데, 수술비는 동사무소에서 도와줬어요. 요새 말로 기초생활수급자로 처리해줬어요. 돈이 마이 드는 건데, 11만원만 내고 수술을 받았어요. 중풍은 또 7년 전에 왔어요. 여름날 더워서 방바닥에서 잤는데, 깨고 보니 전신을 몬 움직였어요. 그래, 겨우 아래층 주인집에 전화해 119가 왔어요. 뇌경색이라고 국립의료원에서 그랬어요. 두 달 동안 입원했어요. 그 뒤로 왼쪽 팔다리는 제대로 힘을 줄 수 없어요. 걷는 것도 제대로 몬하고. 200m 정도 걸으면 쉬어야 해요. 장애판정을 받았고, 기초생활수급자도 됐어요.

병원에서는 당뇨가 원인이라고 했어요. 20살 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 얘기를 들었어요. 당뇨가 있다고 해서 ‘없는데요’ 그랬더니 검사에서 그렇게 나왔대요. 그리고 잊었어요. 건강하니까, 그다음에 병원 한 번 안 갔어요. 그런데 그 당뇨가 다 병을 만들었대요. (종로구 보건소의 간호사 방문기록 카드를 보여주며) 아가씨(방문간호사)가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혈당량을 봐주는데, 혈당량이 260이다가 식후에는 350까지 올라가요. 고지혈증도 있어요.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약은 네 봉지를 먹어요. 중풍, 당뇨, 심장, 고지혈증 약이에요(48쪽 기사 참조). 한 달에 한 번 병원 가서 다 받아와요.

요새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요. 텔레비전을 봐도 (상이) 두 개가 겹쳐 보여요. 찬바람을 쐬면 눈물이 나요. 의사가 당뇨 때문에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대요. 뭐를 하겠어요. 배고프면 밥 많이 먹는 것 말고. 약을 마이 먹어서 밥을 조금 먹으면 속이 쓰려요. 그런데 밥을 많이 먹으면 당이 올라가고.

 

안 좋은 얘기 듣기 싫어 검진 기피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상오씨는 당뇨약에 심장약, 고지혈증약, 중풍약을 함께 먹고 있다. 그의 방에는 약봉지가 수북하다.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상오씨는 당뇨약에 심장약, 고지혈증약, 중풍약을 함께 먹고 있다. 그의 방에는 약봉지가 수북하다.

술·담배는 17살 때부터 했어요. 큭큭. 소주는 한 번 마시모 두 병씩. 담배도 하루에 두 갑씩. 중풍 걸린 뒤로는 담배는 하루에 한 갑만 피워요. 술은 (방 안에 있던 소주 1.8ℓ 플라스틱병을 가리키며) 요즘엔 저걸 하나 사서 일주일 먹어요. 밥 먹을 때 한 잔씩 먹거든. 하루에 소주 작은 한 병을 안 먹는 택이지.

건강검진은 동사무소에서 가서 받으라고 하는데, 안 가요. 또 아프다 할까봐 안 가. 암검진도 받으라고 오는데, 근방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신설동까지 오라 해서 ‘쳐라(치워라) 안 갈란다’ 그래요. 가서 좋은 얘기 들을 것도 아니고, 가보마(가보면) 여도 안 좋고 저도 안 좋고 그래쌀 텐데.

자살? 그런 생각도 많이 했지요. 우울하지. 혼자 있을 때 ‘텔레비’ 켜놓고, 특히 드라마라도 보모 눈물이 쏟아지면서 마음이 ‘울껄울껑’해요. 그래도 실제로 (시도)한 적은 없어요(52쪽 기사 참조).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해서 나라에서 한 달에 44만원을 줘요. 방세가 20만원이고, 쌀값이 2만원이에요. 나머지 22만원으로 담배 사고, 반찬 사묵고. 그거라도 주니 얼마나 고마운데.

아들딸은 시집·장가 갔고, 본 지는 한참 됐어요. 통영에는 아직 ‘엄마’가 살아요. 엄마와는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해요. 6년 전에 간 게 마지막이에요. 한 번 갈라모 10만원이라도 줘야 하는데, 돈이 엄써서. 나이 더 먹기 전에, 엄마 죽기 전에, 갈까 어쩔까 생각하고 있어요. 엄마가 81살인데, 이제 마이 안 좋아요. 어디 특별히 아픈 건 아닌데, 노환이라. 혼자 사는 엄마를 봐서는 가야겠는데, 그런데 이렇게 ‘병신’ 돼서 가도 되나 싶어요.



2. 고영각씨 이야기

글쎄, 그저 평범하고 평탄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공주입니다. 여섯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신당동에서 살았습니다. 일반적인 주택가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모두 힘들 때였습니다.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었어요. 부친께서 숙명여대에서 행정직원으로 일하셨어요. 빈부는 어차피 상대적이니까, 어떻다 말하기는 힘들지만 제 생각에 집안 사정은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부유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크게 다친 기억은 없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철봉에서 떨어진 게 가장 기억이 납니다.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빨랐습니다. 당시 철봉에 매달려 머리를 끝으로 하고 몸을 크게 빙글빙글 돌리는 것을 ‘대차’라고 했습니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은 손에 샅바를 매고 대차를 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철봉을 세 바퀴 돌 때쯤 샅바가 끊어졌습니다. 그렇게 공중에 붕 떴는데, 그 순간에 눈을 떠서 학교 담장 너머를 본 기억이 납니다. 공중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당시 합기도를 했는데, 특히 낙법을 잘했습니다. 관장이 저를 집어던지면, 거의 바로 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지다 팔을 뻗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손이 땅에 닿았습니다. 낙법을 쓴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다리를 절뚝거리는 수준이었으니까요. 병을 앓은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가벼운 감기 정도만 앓았습니다.

어려운 시절 당뇨 발견했지만 꾸준히 관리

고영각 가이오산업 대표이사가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회사의 상품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경기 부천의 집에서 출퇴근을 한다.

고영각 가이오산업 대표이사가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회사의 상품을 점검하고 있다. 그는 경기 부천의 집에서 출퇴근을 한다.

성동중·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생물학과를 졸업했습니다. 71학번입니다. 공군 장교 생활을 4년5개월 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창업을 한 때는 1985년이었습니다. 네덜란드제 화학분석기기를 수입해 판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휘발유 속의 옥탄가를 측정해주는 기계였습니다. 서울 삼성동에서 회사를 시작했는데, 98년에 회사가 주저앉았습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회사는 부도를 맞았습니다.

당뇨를 발견한 때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아내가 제 안색이 좋지 않다며 병원으로 떠밀었습니다. 집 근처 부천 성가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일주일 동안 입원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상태가 그다지 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입원하면서 받은 건, 치료보다 교육에 가까웠습니다. 식습관도 바꿔야 하고, 생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자살요? 회사가 벼랑까지 몰릴 때는 잠시 극단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정서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52쪽 기사 참조). 그렇게 사업은 접었지만, 경력을 살려 ‘월급쟁이’ 사장으로 재기했습니다. 5년 전부터는 대학 동창 소유의 ‘가이오산업’이라는 작은 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방부제를 넣지 않는 친환경 티슈를 개발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술을 자주 마십니다. 일주일에 2~3회, 한 번 마시면 소주 두 병씩은 마십니다. 그러다 보면 종종 약을 먹는 것을 잊습니다. 당뇨병 약을 하루에 두 번 먹어야 하는데, 아침에는 잊지 않고 먹습니다. 그런데 저녁 시간에 바쁘다 보니 종종 약 복용을 잊습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술을 마실 때는 차라리 약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

담배는 끊었습니다. 담배는 30대 중반에 끊은 뒤, 15년 동안 입에 물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 50살부터 다시 담배를 피웠고, 지난해 여름부터 다시 끊었습니다. 아들이 담배를 피워서, 아버지가 먼저 본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건강에 안 좋은 습관이니까요. 과거에 많이 피울 때는 하루에 한 갑 반 정도, 50대에는 한 갑 정도 피웠습니다.

당뇨 합병증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질환을 관리해서 그런 듯합니다(48쪽 기사 참조). 사실 당뇨는 가족력이 있습니다. 부친께서 당뇨를 오래 앓으신 뒤 지난 9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2남2녀 중 맏이인데, 남동생도 당뇨를 앓고 있습니다. 병원에는 3개월에 한 번씩 찾아갑니다. 부천 순천향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약을 받아옵니다.

다른 건강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당뇨가 유일한 걱정거리입니다. 건강식으로는 홍삼 ‘엑기스’와 로열젤리를 시기에 따라 번갈아 먹습니다. 한동안 홍삼 진액을 먹었는데, 한 가지만 너무 오래 먹으면 안 좋다고 해서 대신 로열젤리를 먹고 있습니다. 홍삼 진액은 매일 한 티스푼을 먹습니다. 로열젤리는 꿀에 섞어서 하루에 한 숟가락씩 먹습니다. 주말에는 등산을 합니다. 주말 이틀 동안 하루에 3시간씩 산을 오릅니다. 멀리 북한산이나 집 근처 원미산을 오릅니다. 아내와 함께, 아니면 혼자서 산을 탑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을 오르면 결국 술자리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그런 자리는 피합니다. ‘건강을 위해, 살기 위해 산을 탄다’고 생각합니다. 등산한 다음날에는 확실히 몸이 좋습니다. 소변 색깔부터 다릅니다.

 

건강식품 챙겨먹고 주말엔 등산
마찬가지로 당뇨를 앓고 있는 고영각 대표이사도 10년 넘게 매일 아침 당뇨약을 먹지만,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서 당뇨 합병증에서 자유롭다.

마찬가지로 당뇨를 앓고 있는 고영각 대표이사도 10년 넘게 매일 아침 당뇨약을 먹지만,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서 당뇨 합병증에서 자유롭다.

과거에 골프는 한참 배웠는데, 90년대 금융위기 이후에는 치지 않습니다. 골프의 끝도 대부분 ‘술’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오히려 골프를 즐기는 편입니다. 20년 전 디스크 판정을 받아 고생하던 아내는 수영을 하면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취미 생활로 시작한 골프는 실력이 날로 늘어, 이제는 90타 이하 수준으로까지 떨어졌습니다. 올해 33살과 30살인 두 아들은 아픈 곳 없이 모두 건강합니다. 올해 81살인 어머니도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할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수입은 밝히기 곤란하지만, 두 아들 대학 공부시키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제 두 명 다 취직했으니, 가계는 조금 여유가 있지요.

새해 희망요? 올해는 회사 매출이 늘어 실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가족은 모두 튼튼하니 건강에는 큰 걱정이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도 지금처럼 튼튼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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