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20일 새벽 2시23분, 서울 강남구 세곡동 주거용 비닐하우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40대 후반 남자의 콧등과 얼굴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바깥 온도는 4℃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주인은 112에 신고했다. 경찰차가 도착했을 때, 남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만취 상태였다.
경찰은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신분증이나 다른 소지품이 없었다. 얼굴에는 뚜렷한 타박상이 있었다. 경찰은 남자를 가까운 삼성동 서울의료원으로 데리고 갔다.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확인해보니, 혈압은 100/60mmHg, 맥박은 분당 71회, 호흡은 분당 20회였다.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른쪽 다리와 얼굴에 찰과상이 있었고, 코피를 흘린 자국이 있었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구타를 당했는지 물었지만 취한 이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채혈도 거부했다. 당직 수련의는 일단 남자의 상태가 안정된 뒤 채혈을 하기로 했다. 다른 검사도 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증언해줄 의사 만나
문제는 아침에 생겼다. 아침 9시가 넘으면서 남자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의료진이 확인하니, 남자의 심장박동이 급속하게 느려졌다. 의료진이 급히 에피네프린 등 약물을 주입하는 등 응급처치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이날 10시50분에 사망했다.
죽음 뒤에야 남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중소기업 임원 출신인 김왕규씨였다. 당시 나이는 49살. 그는 사망하기 전날 저녁 친구 2명과 술을 먹고 귀가하던 길에 사고를 당했다. 이른바 ‘아리랑치기’를 당한 그는 서울 변두리 지역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됐다. 그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깊었다. 사인은 간 파열로 인한 복강 내 출혈이었다. 훼손된 간에서 흘러나온 피가 몸속을 채웠지만 의료진은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유족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고인의 형인 김정규 전 동남은행장이 나섰다. 유족은 의료진의 부적절한 응급조치가 김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병원이 김씨에게 외상이 있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신체검진도 하지 않았고, 혈액검사도 다음날 아침 9시가 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였다.
1심에서 원고는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04년 8월 유족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김씨가 의료진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채혈도 거부하는 등 의료진이 검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 그리고 내원 초기 김씨의 맥박 등 활력징후도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다는 점이었다. 법원은 “의료진이 김씨에 대해서 경과를 관찰하면서 지켜보기로 한 것이 재량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바로 항소했지만, 싸움은 외로웠다. 도와주는 의료인이 없었다. 김씨의 친척 가운데는 현직 의사도 있었지만 그는 법원에 나와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의료계의 눈 밖에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의 소개를 받아 연결된 곽홍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는 유족에게 구세주였다. 그는 직접 한국을 찾아 유족들을 위해 증언했다. 그는 법정에서 응급실에서의 원칙을 설명하면서 “(김씨가) 6시간 동안 의사의 관찰, 진찰, 치료도 없이 방치한 결과로 사망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서민은 응급의료권 약자
2006년 6월에 나온 2심 판결은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서울고법은 병원 쪽의 부분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에게 8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의료진이) 간 파열로 인하여 복강 내 출혈 상태에 있었던 김씨를 만연히 급성 알코올중독 상태라고 판단하고는 더 이상의 검사와 처리를 소홀히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고 판결했다. 이번에는 병원 쪽에서 상고했다. 대법원 판결은 2010년 5월27일 나왔다. “초기의 검사와 처치를 소홀히 하여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과실이 있다고 판단한 조치는 수긍할 수 있다”며 병원 쪽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8년에 걸친 지루한 법적 공방에 마침표가 찍히는 날이었다.
김정규 전 은행장은 소송을 진행하면서 의료사고를 겪은 이들을 위해 ‘선한사마리아인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다. 선한사마리아인운동본부는 2010년 9월에 낸 ‘소송자료집’에서 “응급의료권은 곧 생명권이고, 국민의 생명권은 자기보호 능력이 약한 서민에게 보다 절실한 권리”라고 설명했다.
김왕규씨 사망의 전말은 그나마 유력한 가족과, 예외적으로 도움의 손을 뻗은 의사의 도움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추운 겨울, 응급실에서 이름 없이 죽어가는 ‘김왕규’가 얼마나 될지는 가늠할 수 없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