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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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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살려만 달라” 외침에도 가난이 묻었다


피 분수 솟고 살이 타는 외상환자들과 함께 한 중환자실의 한 주…
노동하는 이들이 많이 다치고 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록 2010-12-28 17:07 수정 2020-05-03 04:26

44살 이하 국민을 죽이는 첫 번째 원인은 무엇일까? 흔히 생각하듯, 암이나 뇌혈관질환이 아니다. 첫 번째 원인은 몸이 부러지거나 상해서 다치는 ‘외상’이다. 전 세대에 걸친 사망 원인에서는 외상이 암과 뇌혈관질환에 뒤어 세번째를 차지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로 오면 외상이 가장 위협적인 살인자였다.
외상은 빈자와 부자도 엄격하게 갈랐다. 노인층을 제외하면 사망률의 빈부 불평등을 낳는 가장 큰 요소 역시 사고로 생기는 외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교통사고와 추락 등 사고도 많았고, 그래서 죽는 이도 많았다.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은 사고로 몸이 깨지고 터진 이들이 찾는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지난 11월 마지막 주의 밤 시간을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와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실에서 보냈다. 여기서 아프게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환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_편집자

»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가운데 안경 쓴 이)가 지난 12월16일 아주대병원에서 중증 외상환자인 강명자(65·여·가명)씨의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강씨는 길을 걷다가 지나가던 스포츠실용차(SUV)에 치여 응급실로 실려왔다. 이날은 사고 이후 네 번째 수술이었다.

»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가운데 안경 쓴 이)가 지난 12월16일 아주대병원에서 중증 외상환자인 강명자(65·여·가명)씨의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강씨는 길을 걷다가 지나가던 스포츠실용차(SUV)에 치여 응급실로 실려왔다. 이날은 사고 이후 네 번째 수술이었다.

최상철(24)씨가 차에 치인 곳은 회사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난 9월4일 경기도 용인시 마을 어귀는 컴컴했다. 마을은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말하자면 집성촌이었다. 집 앞 가로등은 없었다. 완만한 비탈길을 걸어 집 앞에 거의 온 참이었다. 지나가던 엑셀 승용차는 어둠 속에서 그를 보지 못했다. 운전자는 먼 친척이었다. 차가 그를 덮쳤다. 앞바퀴는 쓰러진 그를 타고 넘은 다음에야 멈췄다. 당황한 운전자는 차에서 나와 최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최씨는 여전히 차 밑에 깔려 있었다. 최씨의 아버지가 뛰어나왔다. 가족들이 최씨의 몸을 차 밑에서 간신히 빼낼 즈음, 구급차가 도착했다.

SF 영화 실험실 같은 병실

가까운 소규모 종합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최씨의 상태를 보자마자 두 손 다 들었다. 시골의 작은 종합병원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큰 병원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환자는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이송됐다. 최씨가 대학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넘었다. 큰 수술이었다. 그만큼 위독했다. 간과 비장, 콩팥이 일그러졌다. 손상된 신체 기관만 19곳이었다. 수술진은 최씨의 배를 열었다. 훼손된 간을 봉합하고, 피를 멈추고, 흉관을 삽입했다. 젊은 몸은 삶을 질기게 버텼다. 11월 말까지 그는 수술대에 여섯 번을 더 누웠다. 사고 이틀 뒤 두 번째 받은 수술에서는 몸에 찬 피를 빼고 지혈을 했다. 11월1일 여섯 번째 수술에서는 지혈과 함께 기관절제술을 했다.

11월18일 밤, 아주대병원 3층 중환자실에서 그와 마주쳤다. 짧게 깎은 머리에 얼굴은 터질 듯 부어올라 있었다. 어림잡아 보통 사람 머리의 두 배 정도는 됐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부풀어오른 몸은 죽음과 두 달이 넘도록 씨름하고 있었다. 환자의 의식은 없었다. 부풀어오른 입술은 허공을 향해 동그랗게 벌려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근육이완제와 수액 등 링거액 7개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목에 뚫린 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연결돼 있었다. 보통 입으로 연결되는 인공호흡기는 장기입원 환자의 경우 목으로 연결됐다. 만신창이가 된 그의 내장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인공신장과 인공호흡기 등이 줄줄이 붙어서 장기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다. 링거를 통해 주입되는 약품은 기울어가는 몸속의 순환을 간신히 유지했다. 그의 몸에 어지럽게 연결된 온갖 링거관과 드레인관(몸속에 고인 체액과 피를 빼내는 관)은 저승으로 무게 없이 떠나려는 젊은 혼을 힘겹게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이국종 교수가 담당하는 28명 중증 외상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대부분 최씨처럼 몸이 으스러지고 터지고 깨진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15명은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일반 병실에서 회복 단계를 거치고 있는 13명보다 상태가 위독한 이들이다. 이날 이 교수와 함께 중환자실을 둘러봤다. 침대 20개가 펼쳐진 중환자실은 생각보다 컸다. 교실 네 개를 붙인 크기였다.

환자들 주변에 주렁주렁 달린 링거나 인공신장 등 온갖 의료장비를 보면, 중환자실보다 차라리 공상과학(SF) 영화의 실험실 같았다. 환자들도 사람이 아니라, 사이보그 같은 느낌마저 줬다. 그만큼 환자를 둘러싸고 정글처럼 어지럽게 얽힌 장비와 기구가 많았다. 그 사이를 지나 몇 발자국 다가서야 ‘사람’들이 보였다. 비로소 동네 슈퍼마켓 아주머니나 세탁소집 주인 같은 이웃의 얼굴들이 보였다. 환자들 침상 끝에는 사고 내역과 상처 부위에 대한 메모가 있었다. 19살 권욱식씨는 5층에서 추락했다. 뇌출혈을 비롯해 골반과 양쪽 폐, 콩팥 등 상한 신체 부위가 10곳이 넘었다.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78살의 최은순씨는 넘어져서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병원을 찾았다. 72살 하영권씨는 티코를 몰고 가다 덤프트럭과 부딪혀서 실려왔다. 간과 폐가 다 상했다. 대부분 ‘배를 열어’ 손상된 장기를 꿰매고, 장기에 필요한 응급장비에 연결한 뒤, 다시 ‘배를 덮은’ 환자들이었다. 모두 의료장비의 힘을 빌려 간신히 하루씩 삶을 연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저승에 두 발을 모두 담갔다가, 이곳 중환자실에서 뒷자락이 잡혀 이승으로 힘없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는 듯했다. 교통사고, 추락, 자살 등이 사고 원인이었다. 이국종 교수는 “대부분 노동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1300명이 넘는 응급환자를 수술했지만 외제차 탔다는 사람은 딱 한 명 봤다”고 말했다.

수지타산 안 맞아 응급실 적어

이 교수는 중환자실을 둘러본 뒤, 밤 11시께 3층 13호 수술실로 왔다. 응급환자가 있었다. 수술실에서는 간호사 4명과 마취과 의사 1명, 임상강사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상강사는 외과 전문의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외상외과가 개설된 병원은 아주대병원뿐이다. 외상외과 시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서울대와 부산대 출신인 2명의 임상강사도 이 교수에게 배움을 받으러 수원까지 왔다.

»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 환자들(11월23일 기준)

»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 환자들(11월23일 기준)

수술대에 누운 환자는 이날 저녁 응급실로 들어왔다. 흉기에 목이 찔렸다. 수술대에 누운 환자의 목에서 석류색 피가 올라왔다. 목젖에서 오른쪽으로 약 5cm 떨어진 지점에서 10cm 정도 가로로 길게 그은 자상이었다. 임상강사들이 황토색 소독약을 상처 부위에 뿌려 문질렀다. 혈관에서 피가 작은 분수처럼 10cm 정도 솟아올랐다. 굵은 혈관을 다친 경우 때론 수술대에서 사람 키 높이 정도까지 피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아주대병원은 심야에 수술실이 여유가 있는 편이다. 병원 수술실 19개 가운데 심야나 주말에 열 수 있는 수술방이 3~4개다. 서울에서 크다는 대학병원도 심야에 수술실 문을 2개만 여는 곳이 있다. 밤에 병원을 찾는 응급환자, 더구나 수술환자는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 응급환자들은 회전율이 높지 않고, 의료 수가도 높지 않다. 병원들이 응급실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이유다. 쉬운 말로 “돈이 되지 않고, 골치만 아프기 때문에” 모든 병원에서 애물단지다. 취재 도중 만난 한 응급의학과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환자들이 병원장실에 칼을 들고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만 응급실을 유지한다.”

수술대를 둘러싼 간호사들이 환자의 몸 위에 소독포인 푸른색 드랩를 깔았다. 환부를 제외하고 환자의 창백한 얼굴은 드랩 너머로 사라졌다. 수술 환부만 수술대의 무영등 조명 속에 들어왔다. 무영등은 둥그런 넓은 판에 광원을 여러 개 박아서, 의료진의 머리 때문에 환부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조명기구다.

“중환자인데도 중환자실로 못 보내고…”

이 교수가 “석션”이라고 말했다. 가늘고 긴 석션(Suction)기가 뿜어나오는 피를 빨아들였다. 이 교수가 1cm 정도 되는 갈고리형 바늘에 수술용 실을 매달고 상처 부위의 살에 연결한 뒤 상처가 벌어지도록 팽팽하게 외부에 고정했다. 상처가 가로 10cm, 세로 6cm가량의 타원 모양으로 벌어졌다. 이 교수와 임상의사 2명, 모두 여섯 손이 부산하게 상처 주위를 오갔다. “상처가 기도까지 갔네.” 이 교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환자는 친구와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서 술병에 목이 찔렸다. 환자의 몸에는 뜻 모를 문신이 넓게 새겨 있었다.

수술진은 환자의 상처 부위를 수술용 가위와 전기소작기로 조금씩 파 들어갔다. 전기소작기는 열로 살을 잘라내거나 태우는 기구다. 이런 상처는 묶는 것보다 파는 것이 먼저였다. 상처가 어디까지 미쳤는지, 동맥이나 다른 혈관은 건드리지 않았는지, 유리 파편은 남지 않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흉기의 끝이 다다른 곳까지 매스도 따라가야 했다. 전기소작기에 살이 타는 냄새가 수술실에 퍼졌다.

마취과 의사는 환자의 맥박이나 산소포화도, 혈압 등을 계속 확인했다. 수술 과정에서 환자의 상태를 모니터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상황에 따라 주사액 양을 조절하거나, 새로운 주사액을 넣을 수도 있다. 상처 속에서 굵직한 혈관 하나가 가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갑상선으로 가는 혈관”이라고 장정문 임상강사가 설명했다. 환자는 운이 좋았다. 찌르고 들어간 부위에 비해 굵은 혈관은 건드리지 않았다. 경동맥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기도 쪽에도 큰 손상은 없었다. 상처 깊이는 어림잡아 4cm 정도 됐다. 치명적일 수 있었다. 환부를 모두 파헤친 뒤 다시 환부를 덮는 작업이 시작됐다. 봉합에도 단계가 있었다. 근육 안쪽의 조직을 봉합한 뒤 그 외곽의 근육을 연결해주고 그다음 피부 아랫부분을 서로 연결해준다. 수술실로 봉합을 하면서 지혈 물질을 넣어줬다. 가로 5cm, 세로 10cm에 두께는 0.5cm 남짓한 지혈 물질은 가로 1cm, 세로 1cm 정도 크기로 잘라 봉합한 부위 속에 남겨둔다. 지혈 물질은 수술이 끝난 뒤 몸속에서 지혈 작용을 하고, 그 뒤에는 몸 안에 녹아 들어간다. 가로 5cm, 세로 10cm 한 장에 수십만원 하는 고가 의약품이다. 손톱만 한 한 조각이 수천원대였다. 그나마 한 장이 넘으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아껴써야 한다.

표면에 해당되는 가장 바깥 피부는 수술실로 묶는 것이 아니라, 스테이플러와 흡사한 기계로 박는다. 약 12개의 쇠실이 상처 주변을 감싼다. “수술실보다 간편하고 의외로 상처도 적게 남는다.” 이 교수가 설명했다. 이 교수에게 이날 저녁에만 두 번째 수술이었다. “그래도 매우 간단한 수술이었다.” 이 환자는 이날 중증외상특성화센터의 중환자실을 채우는 마지막 환자였다. 수술을 마무리할 즈음,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응급환자가 1명 더 왔다는 것이었다. “중환자실 다 찼는데….” 이 교수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일단 수술의 마무리는 장정문 임상강사에게 맡겼다.

이 교수가 응급실로 내려왔다. 환자의 얼굴보다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을 먼저 살펴봤다. 뇌출혈이었다. 갈비뼈도 부서졌다. 폐가 터져서 피가 번져 나왔다. 골반도 부러진 것이 영상에 뚜렷이 나타났다. 심각했다. 복도의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를 찾았다. 놀랍게도 환자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이제욱(52)씨의 왼쪽 눈두덩이는 부어올라 있었다. 피멍 같았다. 이 교수가 설명했다. “오른쪽 두개골이나 안와 쪽에 골절이 있어 보이는군요.” 환자의 아내와 동생, 제수가 걱정스럽게 의료진을 바라봤다. 원인은 교통사고였다. 경기 여주 고속터미널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이씨를 자동차가 와서 받았다. 이 교수가 복도에 선 채 환자들에게 설명했다. “환자가 매우 위험한 상황이고, 곧 의식을 잃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내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는 “살려만 달라”고 말했다. 이 환자는 일단 응급실에 대기했다.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었다. 이 교수가 말했다. “환자는 계속 오는데 공간이 없다. 중환자인데도 중환자실로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응급실 침대에 두는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시간은 새벽 2시에 가까워졌다. 중증외상특성화센터의 불은 아직 훤했다.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의 문 앞은 매일 두 번 북적인다. 오전 10시와 밤 8시30분이 면회 시간이다. 병원 안팎을 배회하던 가족들은 이 시간에 중환자실로 모여든다. 환자 1명에 가족 1명씩만 면회할 수 있다. 때로 여러 명이 찾아와 바통을 주고받듯이 번갈아 들어간다. 자동문을 2개 지나면 줄줄이 환자들을 만날 수 있다. 중환자들은 대부분 의식이 없다. 중환자실에 와도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환자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거나, 지나가는 의료진의 소매를 부여잡고 한마디라도 물어보는 일이 전부였다.

사고 당해 생계가 막막한 여성 가장

11월23일에도 그랬다. 중환자실 앞 가족들 속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이정녀(73)씨가 벽을 짚고 기다리고 있었다. 2번 침대에 누워 있는 김은희(34)씨의 어머니였다. 딸은 3주 가까이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롯데마트에서 와인 판매원으로 일하던 김씨가 고속도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때는 지난 11월1일이었다. 그날은 밤 시간에 마트 동료들과 한번 기분을 내기로 했다. 동료의 친구 1명이 차를 몰고 왔다. 고속도로에서 기분 좋게 속력을 내던 액티언은 신갈 분기점 부근에서 옆 차와 부딪혔다. 차가 네 바퀴 굴렀다. 김씨는 하필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차가 구르면서 열어놓은 선루프로 김씨가 거짓말처럼 튕겨나갔다. 안전벨트를 매서 차 안에 남은 다른 사람들의 부상은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차에서 가까스로 나온 한 동료가 고속도로에 나동그라진 김씨에게 다가섰을 때, 그는 놀랍게도 말을 했다. “아파.”

»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 모습. 침대 주변에 어지럽게 연결된 링거관과 각종 의료장비는 죽음의 언저리를 맴도는 중환자들의 회복을 돕는다.

» 아주대병원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 모습. 침대 주변에 어지럽게 연결된 링거관과 각종 의료장비는 죽음의 언저리를 맴도는 중환자들의 회복을 돕는다.

사고는 저녁 7시30분께 났다. 구급차는 환자를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거기서 5시간을 머물렀다. 응급조치가 마무리된 뒤에야 아주대병원으로 옮겨졌다. 환자 침대 옆 차트를 보았다. 골반과 허벅지뼈,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다. 내장 또한 무사할 턱이 없었다. 그도 배를 여는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차트를 보니 손상된 부위만 15곳이었다. 정경원 임상강사는 “좌골 신경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환자 상태에 문제가 있어서 아직 그쪽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액이 줄줄이 연결된 딸의 주위를 노모가 맴돌았다. 아무리 서성여도 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자를 의료진으로 착각한 그는 기자의 소매를 잡고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김씨가 사는 곳은 경기도 성남이었다. 어려운 살림살이라, 마음 좋은 분이 거의 무료로 세를 준 집에서 살고 있다. 2개의 방에는 김씨 모녀와 김씨의 두 딸이 살았다. 고1과 중2였다. 마침 시험 기간이었다. 병원에서 만난 김씨의 직장 동료 강정희(31)씨는 “두 딸에게 시험 잘 보면 어머니도 나을 거라고 말했다”고 낮게 전했다. 김씨는 남편과 10년 전에 이혼했다. 김씨의 벌이로 네 식구가 살았다. 김씨가 다치면서 네 식구의 수입은 끊겼다. 70대 노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딸이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바라는 일뿐이었다. 기약하기는 암담했다.

가난한 사람이 잘 다치고 죽는다

20분 남짓한 면회 시간이 끝나갔다. 중환자실을 가로질러 환자 신우만(53)씨의 부인 함운희(53)씨가 힘없이 지나갔다. 신씨는 10월22일 회사에서 사다리로 작업을 하다가 다쳤다. 사다리가 왼쪽으로 기울어서 그도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골반과 팔뼈가 모두 부러졌다. 가까운 정형외과로 갔다가, 아주대병원으로 넘어왔다. 의식을 잃은 신씨의 얼굴은 거무스름했다. 언뜻 봐도 60대로 보였다. 병색 때문이라기보다 밖에서 오래 일한 사람 특유의 거친 피부색이었다. 아내는 회사에서 산업재해 처리를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와 상의했는지 물었다. 아직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고 답했다. 왜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선 사람부터 살려야죠”라고 답했다. 유난히 체격이 작은 함씨가 총총히 중환자실을 떠났다. 뒷모습이 불안했다.

김씨 맞은편 침대에 누운 주영식(24)씨는 정신병원 5층에서 뛰어내린 뒤 이곳으로 실려왔다. 척추골절이 심각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그는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해서 의료진의 속을 썩였다. 그의 누나 2명이 중환자실을 찾았다. 그는 2007년 12월 만취한 상태에서 시비가 붙어 다른 사람을 심하게 때렸다. 사건이 컸다. 교도소에서 1년6개월을 살았다. 교도소를 나온 다음이 문제였다. 그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자신의 배설물을 먹었다. 교도소를 가기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의 누나 주아무개(32)씨는 “다른 수감자들이 그를 괴롭혔던 것 같다. 교도소에서의 오랜 독방 생활도 그의 정신을 어지럽힌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가족들은 그를 경기도 수지 쪽의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지난 11월2일 누나가 정신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들어가는데, 밖에서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떠나갔다. 구급차에는 5층에서 떨어진 동생이 있었다. 누나는 “병원에서 도대체 어떻게 환자 관리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동생이 교도소와 정신병원에서 억울한 일을 계속 당한 것 같은데, 인권위원회는 힘이 없다고 하고, 도대체 어디다 하소연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환자들 가운데는 간혹 보호자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5번 침대에 누운 이창욱(48)씨가 그랬다. 11월14일 병원에 실려온 이씨는 보호자가 없었다. 먼 친척 여조카가 있다곤 했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씨는 혼자서 10일을 누워 있었다. 그는 재중동포였다. 갈비뼈와 머리뼈 부분에 심한 손상이 있었다. 눈 주위 뼈가 부서져서 시력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난 사고 때문이었다. 그 이상의 정황은 알 수 없었다. 보호자가 없으니 그의 사고를 기억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가 입원한 지 10일이 지난 11월24일, 낯선 얼굴이 그를 찾았다. 그의 형인 이순욱(50)씨였다. 사고가 난 지 10일 뒤에야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그는 “동생과 연락한 지 1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동생은 5년 전 중국 옌볜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목포에서 줄곧 공장에 다녔다. 형이 말했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이라고 설움을 받고 사는데, 여기서는 또 중국 사람이라서 이렇게 힘들다”고 말했다. 그의 눈시울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끝내 숨진 최씨의 흙 같은 주검

11월25일, 최상철씨의 활력징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죽음과의 줄다리기에서 20대의 몸은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산소포화도가 80을 맴돌았다. 산소포화도는 호흡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는지를 가늠하는 수치다. 보통 사람은 95를 넘는다. 평균 혈압도 37을 맴돌았다. 사망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그날 저녁 정경원 임상강사가 중환자실 최씨의 침대 옆에서 최씨의 아버지, 형과 마주섰다.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컴컴했다. 형의 눈에서 실핏줄이 올라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들어오지 못했다. 의사는 심폐소생술이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부자는 고개를 숙였다. 형은 의사가 준 ‘기관 내 삽관 및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했다. 다음날 새벽 3시가 넘도록 중환자실을 점검하던 정 강사는 “아침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7시, 임상강사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정 강사가 서둘러 중환자실로 향했다. 최씨의 활력징후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최씨 침상에 놓인 모니터를 보았다. 호흡수가 0과 35를 번갈아 반복하더니 곧 모두 0으로 나타났다. 다른 활력징후도 0으로 수렴했다. 호흡을 경련처럼 하던 최씨의 부푼 몸도 잠잠해졌다. 임종 시간은 7시27분이었다. 아버지는 의료진의 연락을 받고 아들의 발끝에 와 있었다. 침상을 바라보던 아버지 최씨의 동공이 깊어졌다. 의사의 설명을 듣고 그는 조용히 중환자실을 걸어나갔다. 진한 청색 점퍼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천천히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결국 죽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창밖으로는 햇빛에 반사된 구름이 황금빛이었다. 멀리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의료진 2명이 와서 최씨의 목에 연결된 관을 뽑아냈다. 인공호흡관이었다. 그의 옆구리에 연결된 관도 하나씩 제거했다. 몸속에 고인 체액을 빼내기 위한 관이었다. 관이 몸에 남긴 구멍은 수술용 실로 한땀 한땀 연결됐다. 탄력 잃은 피부는 마른 고무 같았다. 주검의 몸속에 차오른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의 입과 눈에서도 체액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은 최씨의 몸은 고동색에 가까웠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정경원 임상강사는 “성경에서는 사람이 흙으로 간다고 했는데, 돌아가신 주검을 보면 마치 흙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얼굴에는 황달 때문에 누런 기운이 어른거렸다. 간 기능이 떨어져서 생긴 증상이었다. 오랜 기간 인공호흡기를 달면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부기 때문에 몸은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배에 새겨진 수술 자국 한 땀의 크기가 완두콩만큼이나 컸다. 그의 왼쪽 팔목에는 이름, 주민번호, 환자번호, 바코드가 찍힌 종이가 말려 있었다. 그의 발목은 양 옆으로 향했고,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부풀어올라 무릎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의료진이 그의 다리를 모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비대해진 그의 몸이 관 속에 들어가지 않을까 의료진은 걱정했다. 손을 잡아보았다. 부풀어진 손은 말랑한 고무 같았다. 손을 댄 피부는 피가 빠지면서 하얗게 일어났다.

사고 뒤 1시간, 골든타임

최씨의 옆에서 24시간 돌아가던 인공투석기도 치워졌다. 최씨에게 주입되던 강심제, 수액 등 7개의 링거도 치웠다. 간호사 2명이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마무리를 했다. 목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붕대로 막았다. 주검에 깔린 침대보도 깨끗한 것으로 갈고, 다른 침대보로 주검을 덮었다. 그의 몸 상태를 알리던 16인치 크기의 필립스 모니터도 전원이 나간 채 침대 머리맡에서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8시가 넘어 그의 형 최광희(27)씨가 도착했다. 검은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침대의 오른쪽 옆에 섰다. 코끝이 벌겠다. 이미 눈은 부어 있었다. 손을 들어 숨진 동생의 손과 이마를 가만히 짚었다. 안경에 잠시 고였던 눈물이 떨어졌다.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형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가망이 없다는 의료진에 말에 “그러면 거기까지가 동생의 명이겠지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형이었다. 동생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형이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뒤로, 환자 주변에 하얀 커텐이 둘러쳐졌다. 마치 망자와 생자를 가르는 경계선 같았다. 중환자실 밖에서 아버지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많이 힘드시죠?” 아버지는 병원 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힘들긴… 회생하길 바랐는데….” 50대 중반의 아버지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최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해부터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발광다이오드(LED) 관련 부품 조립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했다. 주말이면 집에서 엎드려 전자오락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공장에서 배운 기술로 자그마한 사업을 벌이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20대 청년의 작은 꿈은 그의 집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사라져갔다.

최씨의 죽음은 과연 피할 수 없었을까? 만약 그의 집 앞에 가로등이 제대로 켜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날 그는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고 귀가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차가운 땅바닥에서 차에 깔리지 않아도 됐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일찍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형은 “집 근처에 제대로 된 병원이라도 있었다면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동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조금 수정하면, 그의 말은 맞았다. 물리적 거리만 보면, 병원은 사망한 최씨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첫 번째 도착한 응급실은 4km 떨어졌다. 두 번째 도착한 아주대병원도 멀지 않았다. 22km 떨어졌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동시간은 27분 정도 걸렸다. 물리적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응급의학계에서는 사고가 난 뒤 1시간을 ‘골든타임’이라고 부른다. 이 시간 동안 수술을 받는 외상환자의 회생률이 극적으로 높은 까닭이다. 그렇지만 환자가 아주대병원을 오기 전, 응급실 한 곳을 거치면서 이송 시간은 늘었다. 최씨의 아버지는 “사고가 나고 두 번째 병원에 이르는 데 1시간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이국종 교수는 “아주대에 오는 중증 외상환자의 절반 이상이 직접 내원하지 못하고, 여러 곳의 병원을 전전하다 뒤늦게 내원한다. 일반 응급환자보다 상태가 심각한 중증 외상환자 이송에 아무런 시스템이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직의 높은 외상율은 ‘팔자’ 탓일까

중증외상특성화센터 중환자실에서 모두 18명의 환자를 만났다. 이들의 일 가운데 이른바 ‘비싼’ 직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인, 마트 판매직, 음식점 배달부 등 서비스업 종사자가 4명이었다. 또 일용직 노동자를 포함한 생산직 노동자가 3명이었다. 무직이 2명, 학생이 2명이었고, 사무직 노동자는 1명이었다. 65살 이상 노인이 3명이었고, 나머지 3명은 직업이 확인되지 않았다. 병원 쪽에 물어보니, 18명 가운데 6명이 치료비 지급에 어려움이 있다고 입원 당시 환자 본인 혹은 보호자가 말했다. 상당수 환자는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었다.

18명이 중환자실에 실려온 사연은 달랐다. 교통사고가 많았지만, 자살과 추락, 낙상도 있었다. 대부분 그저 운이 없었다. 하필이면 가로등이 없었고,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하필이면 사용하던 사다리가 넘어졌고, 하필이면 덤프트럭이 차를 받았다. 그저 부주의했고, 운이 없었다. 과연 그럴까? 단정하기 어렵다. 교통사고와 자살, 산재로 생기는 외상은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에게 하필 더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주거환경과 노동환경, 생활여건이 달라지면 사고가 날 확률도 높아진다.

이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 요청해서 받은 ‘2009 표본병원 손상유형 및 원인통계’ 자료를 분석해보면, 노동직이 외상을 입을 확률이 사무직보다 약 25% 높았다. 정최경희 이화여대 교수(예방의학)가 2008년 우리나라 사망 불평등의 원인을 분석해 내놓은 논문에서도, 우리나라 44살 이하 국민 가운데 사망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은 ‘교통사고 등으로 생기는 외상’이었다. 각자의 사회·경제적 위치는 그 사람이 다쳐서 사망에 이르는 확률도 바꿔놓았다. 개개인의 사고를 그저 ‘드센 팔자’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다.

지난 12월22일에 확인해보니, 18명 가운데 사망한 최상철씨를 빼고는 모두 상태가 호전돼 퇴원하거나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병동으로 옮겼다. 이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아주대병원에는 중증외상 환자를 오래 진료한 전문의가 있었고, 국내에서 드물게 외상외과도 마련돼있다. 덕분에 이들은 빈 병상을 찾아 거리에서 지나치게 긴 시간을 헤매거나, 전문의가 없는 응급실에서 너무 오래 방치되지도 않았다. 수술 경험이 적은 의사의 서투른 손놀림에 희생되지도 않았다. 이런 대목들 하나하나에서 이들의 생사는 엇갈렸다.

병원을 이미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는 18명 환자들이 앞으로 삶의 어느 골목에서 다시는 차에 치이거나, 건물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빌 뿐이다. 정부는 6161억원을 들여 전국에 6개 광역외상센터를 짓고 관련 의료인력을 양성하겠다고 올해 초 발표했지만, 정작 내년 예산안에서 이 사업에 책정된 예산은 없었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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