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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의 무게는 같아야 한다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

‘생명 OTL’ 에필로그… 빈부에 따라 목숨값 달리하는 ‘계층-죽음의 함수’ 풀 해법,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 신념에서 희망을 찾다
등록 2011-02-10 11:23 수정 2020-05-03 04:26

글 싣는 순서
① 다섯 빈민의 임종
②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③ 중환자실에서 만난 외상환자들
④ 응급실에 숨어 있는 차별
⑤ 사는 곳에 따라 다른 사망률
⑥ 학력·소득 따라 갈린 두 남자의 건강
⑦ 골고루 건강하게 사는 길
⑧ 우리가 풀어야 할 ‘계층-죽음의 함수’

“생명이 귀하다는데, 어떤 이들의 목숨은 너무 싸게 취급 받고 있어요.”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기획을 준비하던 지난해 10월 말, 한 취재원이 탄식처럼 한 말입니다. 서울 신촌의 어느 카페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가 한 말은 기사를 준비하는 두 달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앞선 7회에 걸친 기획은 그가 수수께끼처럼 던진 말의 답을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의 말은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목숨의 무게가 다를 까닭은 없습니다. 회장님 목숨의 무게는 2근이고, 빈민 목숨의 무게는 1근이라는 공식은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노동력을 거래하는 ‘시장’에서도 생명만큼은 상품으로 내놓지 못합니다.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고한 시민을 때리고 ‘맷값’을 준 어느 재벌 2세에 사람들이 공분한 이유는, 인간의 몸에 가하는 위해에 감히 가격을 매겼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 목숨에 가격이 붙을 이유도 없고, 그 가격에 차이가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목숨에도 값을 매기는 세상

슬프게도, 현실에서는 사람의 목숨값이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쉽게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이유도 기실은, 노동자의 목숨값이 너무 싼 것이 이유였습니다. 자본은 안전장비 설치 비용과 노동자의 목숨값을 저울질한 뒤, 더 싼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한 해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떨어지고, 짓이겨지고, 깨졌습니다. ‘돈이 되는’ 암전문센터들이 전국의 대학병원에 줄줄이 생겨나는 동안, ‘돈 안 되는’ 중증외상전문센터는 한 곳도 제대로 문을 연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싼 목숨’들은 깊이 앓았고, 크게 다쳤고, 쉽게 사라졌습니다. 계층과 죽음의 함수관계는 현장에서도, 통계에서도 도드라졌습니다. 사람 목숨에 가격표를 다는 세상을 거부해야 할지, 잔인한 시장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가난한 자의 목숨값을 그나마 높게 쳐달라고 요구해야 할지, 두 갈림길 사이에서 당혹스럽고 참담했습니다.

지난해 12월27일 밤늦은 시간에 이국종 아주대 의대 교수(외상외과)는 전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죽음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날 자정을 갓 넘은 시각에 30대 남성은 충청북도의 한 국도에서 택시에 치였습니다. 근처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다친 이를 수술할 수 있는 인력은 없었습니다. 부상자를 실은 구급차는 병원을 찾아헤맸습니다. 그러다가 도계를 넘어 수원 아주대학병원에까지 연락이 왔습니다. 아주대학병원 외상외과 의료진은 급히 새벽 3시에 수술 일정을 잡았습니다. 마취과와 외상외과 의료진이 모두 환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렇지만 30대 남자의 생명은 수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고, 주검을 실은 구급차는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런 개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이 교수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번졌습니다. 30대 남성의 죽음이 적절한 병원에 빨리 이르지 못한 구급차의 탓인지, 아니면 의료 인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진 못한 병원들의 탓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지난 843호 ‘응급 전선 이상 많다’에서 소개한 대로, 정부가 지정한 전국 457개 응급의료기관 가운데 274곳은 응급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본 요건에 미달했습니다. 절대다수의 구급차는 어느 병원에 빈 병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설비도 없이, 환자를 태우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돌고 있습니다. 믿기 힘든, 2010년대 한국 응급의료의 현주소입니다.

거대하고 불공정한 ‘러시안룰렛’

폐암을 앓던 최효인 할머니는 지난 1월22일 성가복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1월24일 경기 파주시 용미리 시립 ‘추모의 집’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왼쪽 끝 밑에서 두 번째 봉안단 자리에 최 할머니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폐암을 앓던 최효인 할머니는 지난 1월22일 성가복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1월24일 경기 파주시 용미리 시립 ‘추모의 집’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왼쪽 끝 밑에서 두 번째 봉안단 자리에 최 할머니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 교수와 통화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사고’는 또 터졌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 대구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40대 여성은 4곳의 병원을 전전한 뒤에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결국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4곳 병원 가운데 2곳은 대학병원이었습니다. 구급차 이송 과정에서 응급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병원 도착 뒤 즉시 수술에 이르도록 하는 응급의료 시스템은 망가졌습니다. 이런 사고가 터진 지역은 다름 아닌 대구였습니다. 대구시는 최고의 의료 인프라를 갖춘 도시를 만들겠다며 2006년부터 ‘메디시티’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윤 서울대 교수가 의료 인력과 장비 등 의료 여건을 종합해 분석한 응급의료지수를 보면, 대구시는 전국 16개 광역 시·도 가운데 세 번째로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에서 이름 없이 ‘개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한 해 외상 사망자 가운데 9245명은 적절한 응급조치만 있으면 살릴 수 있었다는 연구 내용은 지난 842호 ‘해마다 9245명 목숨 살릴 수 있었다’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외상외과의 현실을 다룬 기사가 나간 뒤, 한 산업의학과 전문의가 전자우편을 보내왔습니다. 그의 말을 가감 없이 옮겨 담아봅니다. “다른 의학의 분야들도 대부분 가치재 성격을 갖기는 하지만, 응급 분야는 가치재 중에서도 공공재 성격에 가장 근접한 분야임이 정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만날 말뿐인 정책 ‘검토’와 추진 ‘노력’밖에 없고, 현실 세계에서는 제대로 된 것이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그쪽 분야의 얘기를 접할 때면 여전히 한숨만 나오네요. 그 분야에 투신한 의사들이 정말 뜻을 제대로 펴면서 일을 해서, 많은 환자가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같은 의사로서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걱정대로, 새해에도 1만 개의 삶은 엉망인 응급의료 시스템 때문에 세상을 떠나겠지요. 그들은 4800만 남한 인구 가운데 어느 누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마치, 한국 땅 전역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러시안룰렛’ 게임 같습니다. 물론 게임의 룰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정최경희 이화여대 교수의 연구를 보면, 초등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남성이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대졸 남성의 10배였습니다.

죽음마저 스산한 곡절 많은 인생
지난해 11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난해 11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난 1월22일 토요일 오전, 서울 월곡동 성가복지병원 호스피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 7층 702호에서 오래 앓던 최효인(62)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인은 폐암이었습니다. 암세포는 폐에서 뇌까지 번졌습니다. 눈이 안개처럼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휴대전화를 들고 선 기자의 머릿속도 눈이 쌓인 듯 하얗게 변했습니다. 병원의 간호사님과 한두 마디 말씀을 주고받다가 대화를 맺었습니다. 더 물어볼 것이 있었지만, 마음이 아득해졌습니다. 달리,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전 주말, 시간을 내서 병원을 찾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미 할머니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습니다. 709호 독실에 혼자 누운 할머니 손을 잡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문득 눈을 떴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기자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습니다. 이제 할머니는 정말 아주 먼 길을 떠나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11월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그 뒤로도 주말에 병원을 찾을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던 할머니였습니다. 마주 잡던 손도 항상 따뜻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지그시 노려보던 버릇이 있던 눈빛이 조금씩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탄력 있던 피부는 눈에 띄게 거칠어졌습니다. 폐 기능이 떨어지면서 코에는 산소를 공급하는 플라스틱 관인 ‘비관’(Nasal Prong)이 얹혀졌습니다. 얼굴 살이 빠지면서 머리뼈의 윤곽이 솟아올랐습니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1월23일 오후, 할머니의 주검이 모셔진 서울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영안실은 고요했습니다. 폭설이 덮인 서울 거리의 찬 공기는 낮게 깔렸고, 낮은 온도 탓인지 거리의 차들은 자주 멈칫거렸습니다. 영안실 방명록에는 이름이 고작 19개 쓰여 있었습니다. 기자를 맞는 이는 최 할머니의 두 아들뿐이었습니다. 법적으로 두 아들과 할머니는 남남이었습니다. ‘둘째부인’이던 할머니는 곡절 많은 삶에서 두 아들과 일찍 헤어져야 했습니다.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첫째부인의 집에 남았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벌어서 우리를 데리러 오려 했던 것 같다”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습니다. 돈을 벌지 못했으니 아들들이 보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습니다. 아들에게 돌아온 초로의 어머니에게는 돈이 아니라, 몹쓸 폐암만 남았습니다. 아들은 경기도 의왕시의 쪽방에서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어머니는 해준 것 없는 죄책감 때문에 아들이 불편했습니다. 1년 남짓 아들의 눈치를 보던 어머니는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삶의 마지막 코너에서 어머니가 찾은 곳은 성가복지병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삶을 말하는 아들의 표정에서 슬픔의 함량은 적었습니다. 오래 떠나 있던 어머니에 대한 애증이 말 사이에 실렸습니다.

 

“사는 게 힘들었어, 정말 힘들었어”

다음날인 24일,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납골당으로 가는 길은 스산했습니다. 골프장을 품은 우암산 자락에서 납골당으로 실려온 바람은 시렸습니다. 파주 지역의 아침 온도가 영하 19℃까지 떨어진 날이었습니다. 한파 속에서 최 할머니의 주검은 연기가 됐습니다. 납골당 2층 한 귀퉁이 벽에 빼곡히 찬 150개 봉안단 가운데, 최 할머니의 자리는 왼쪽 밑에서 두 번째 칸이었습니다. ‘최효인位’라는 글씨만 직사각형 종이에 새겨졌습니다. 가로세로 길이가 한 뼘씩 조금 넘는 봉안단에 가만히 손을 얹으니, 냉기가 전율처럼 밀려옵니다. 재로 남은 이에게 더 이상 온기가 필요하지 않겠지요. 봉안단 너머로 최 할머니는 이제 말이 없습니다.

최 할머니는 평생 당신을 내리눌렀던 ‘건강 불평등’의 멍에를 알았을까요. 폐암의 사망비는 최상류층보다 최 할머니 같은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2.06배 높다는 통계를 알 까닭이 없습니다. 할머니처럼 초등학교만 나온 이들은 대학교를 마친 이들보다 폐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71% 높다는 연구 결과도 알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알았더라도 운명이 바뀌었을 리는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던 할머니는 안 그래도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수없이 미끄러지면서도 버둥거리며 살아왔을 테니까요. 할머니의 언니는 “호적을 보니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가난을, 질병을, 그저 자신의 운명 탓으로 돌렸겠죠. 의왕의 보증금 200만원, 월세 20만원짜리 사글셋 방에 누워 얼룩진 인생을 슬퍼했겠죠.

지난해 11월 성가복지병원의 어느 오후가 기억납니다. 병상의 할머니에게 의왕에 살던 시절을 물었습니다. 과묵한 할머니의 시선이 천장에 꽂히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힘들었어”라고 짧게 말했습니다. 눈빛은 과거로 돌아가 쪽방을 훑는 듯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어”라고 끊어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말을 하던 몸은 이제 차가운 봉안단 속에 남았습니다. 납골당 통로에 서서, 할머니를 위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국화 꽃다발을 봉안단 앞 바닥에 놓고 잠시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는 아프지 않기를. 가난하면 더 아프고 힘든 이 세상에 남은 미련 따위는 잊기를. 가난해서 아들과도 평생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런 세상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한 줄기 희망, 복지와 평등 향한 신념

지난 846호 ‘평등해야 부자도 오래 산다’에서는 한 사회 안의 소득 불평등이 전반적인 건강 수준을 낮출뿐더러 소득 최상위층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영국 노팅엄대학 리처드 윌킨슨 교수의 연구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커졌다는 통계도 전했습니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인식은 어디쯤에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관련 자료를 펼쳐봤습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이 중심이 돼 전세계 80여 개국에서 동일한 내용으로 설문을 하는 ‘세계가치관조사’였습니다.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소득 불평등을 어느덧 용인하고, 이 과정에서 경쟁심을 내면화하는 듯했습니다. ‘인센티브로서 소득 불평등이 더 커질 필요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는 정도에 따라 0~10점을 주는 항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2005년에 평균 6.5점을 줬습니다. 조사 대상 가운데 OECD 회원국인 19개 나라만 비교하자면, 폴란드(6.8점)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19개 나라 평균은 5.5였고, 스위스가 3.6으로 가장 낮았습니다. 같은 문항에 대해 1990년 설문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설문 응답 평균이 5.1이었습니다. 15년 사이 더 많은 사람들이 소득 불평등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입니다.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파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숙이 몰아쳤나 봅니다.

다른 항목도 눈에 들어옵니다. ‘정부가 부자에게 세금을 물리고 빈자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특징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동의하는 평균 수준이 7.5로, 비교 대상이 된 19개 나라 가운데 가장 높았습니다. 19개 나라 평균(6.4)보다 크게 높았고, 북구의 핀란드(7)와 노르웨이(6.6)보다도 컸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국가가 나서서 구제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신념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과 국가가 나서서 빈자를 도와야 한다는 언뜻 상반된 생각 사이에서 해법을 찾는 것은, 결국 우리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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