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성형 인공지능(AI) 챗지피티에 ‘학자만이 진리를 안다고 착각하는 태도를 묘사하는 이미지를 그려달라’고 지시어를 입력해 만든 일러스트.
앞서 논의한 ‘매트릭스 모델’과’ ‘냉소적 주체 모델’을 떠올려보자.(제1605호 참조) ‘매트릭스 모델’의 대중은 무지하다. 쉽게 말해 대다수 사람이 세계의 진상을 은폐하는 거짓된 설명, 즉 환각(illusion)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권력자에게 속절없이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한편 ‘냉소적 주체 모델’에서 대중은 세계의 진상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구성하는 환상(fantasy)을 깨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길 욕망한다.
이 두 모델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일종의 ‘기만 모델’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매트릭스 모델’은 지배자의 기만을, ‘냉소적 주체 모델’은 피지배자의 자기기만을 전제한다. 이 기만의 설명 방식들은 암묵적으로 세계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을 상정하고 있고, 바로 그래서 치명적 문제가 남는다. ‘하나의 진실’이 진실임을 누가 보증하는가?
이 질문은 오래된 것이다. 지식사회학의 기초를 놓은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모든 지식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세대, 계급, 역사적 상황)에서 생산됐다면, 그 지식사회학의 주장 역시 사회적 위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보편적 진리일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른바 ‘만하임의 역설’(Mannheim's Paradox)이다. 만약 사회에 대한 보편적 진리가 불가능하다면, 결국 우리는 인식론적 독단이나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을까?
이런 우려에 대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학이 자연과학을 전범 삼아 사회구조에 대한 적확하고 탁월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그의 이론과 개념은 정교하고 강력했고, 부르디외는 세계 최고의 사회학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이론 역시 은폐된 권력 구조와 그것을 보지 못하는 대중을 암묵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기본 골격은 ‘기만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만하임의 역설’이나 인식론적 독단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끊임없이 대안적 설명 모델이 나오게 된다.
뤼크 볼탕스키는 부르디외의 제자이자 동료였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부르디외의 이른바 ‘비판적 사회학’과 점차 멀어지며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볼탕스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가 바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Actor-Network Theory)으로 잘 알려진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다. 라투르는 전문가(즉 사회과학자)가 대중(즉 사회적 행위자)이 못 보는 사회의 은폐된 구조를 밝혀낼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비판적 사회학’의 관점이 일종의 ‘환각에 대한 환각’(illusion of an illusion)일 뿐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자의 인식론적 특권을 전제하는 것임을 비판해왔다. 행위자는 사회과학자보다 열등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형이상학”, “그들 자신의 이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
한편, 1970년대 프랑스에서 새로운 계급이자 사회현상으로 부상하던 ‘카드르’(cadres)에 대한 현장 연구에 뛰어든 볼탕스키는 자산가나 노동계급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이 집단이 부르디외의 아비튀스 같은 계급적 범주로 적확히 포착되거나 분석되기 어렵다는 점을 발견한다. 볼탕스키에 따르면 카드르 집단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나 계급적 실천보다,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 규정과 능력주의(meritocracy) 같은 개념을 통해 훨씬 더 잘 설명될 수 있었다.2
이러한 경험 연구를 바탕으로 볼탕스키는 경제학자 로랑 테브노와 함께 ‘정당화에 대하여’를 쓴다. 사회학 연구의 관점을 권력의 은폐된 구조에서 행위자의 수행(performance)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볼탕스키의 연구 경력에서든 프랑스 사회학의 지형 속에서든 특기할 만한 한 걸음이었다. 라투르는 이 책이 “근대적 비판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이렇게 상찬하고 있다.
“볼탕스키와 테브노는 비판의 모든 원천들-정의의 다양한 원칙을 제공하는 질서(cité)들-을 조용히 비교함으로써 (…) 광견병 백신의 등가물을 발명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의 정체도 폭로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서로를 고발하게 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 비판적 사회학에 착수하는 대신에 저자들은 조용하게 비판의 사회학을 시작한다.”3
여기서 ‘비판적 사회학’(critical sociology)과 ‘비판의 사회학’(sociology of critique)이라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는 사회와 권력 동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비판적 사회학’은 주어진 사회질서, 특히 불평등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자기 자신까지도 비판의 대상에 놓을 수 있는 ‘성찰적 사회학’이다. 그럼에도 ‘비판적 사회학’이 끝내 비판하지 않는 불평등이 있었다. 바로 권위를 가진 주체와 그렇지 못한 주체의 ‘비대칭성’이다.

왼쪽부터 피에르 부르디외, 브뤼노 라투르, 뤼크 볼탕스키. 한겨레 자료
이전 회에서 논의한 주디스 버틀러와 부르디외 사이의 쟁점을 떠올려보자.(제1609호 참조) 버틀러가 보기에 부르디외는 ‘말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만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버틀러는 ‘말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지 않고서도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지배 담론으로부터 ‘민주주의’나 ‘자유’ 같은 개념을 재전유함으로써 권위 없는 자에게 권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아 인종차별에 항의한 로자 파크스의 역사적이고 영웅적인 행위가 그 훌륭한 예시다. 하지만 버틀러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 수행의 메커니즘까지 성공적으로 체계화했다고 보긴 어렵다.
‘비판의 사회학’, 곧 볼탕스키가 ‘정당화에 대하여’ 등에서 발전시킨 이론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 여기다. ‘비판의 사회학’은 라투르가 ‘환각에 대한 환각’이라 불렀던 사회과학자의 인식론적 특권을 근본적 차원에서 거부한다. 요컨대 사회학자가 대중보다 사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각’이며, 어떤 면에서 보통 사람들은 학자보다 삶의 진실에 대해 훨씬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자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사회과학의 쓸모와 ‘존재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 볼탕스키는 ‘문법학자’라는 비유를 도입한다.4 문법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 언어를 더 잘 쓴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과학자와 대중은 사회적 지식을 활용하는 역량에서 평등하다. 사람들은 문법을 체화해서 자유자재로 말글을 구사하지만 그것은 암묵적 지식이기에 규칙과 패턴을 명시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문법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이 필요하며, 거기에 숙달된 이가 사회과학자다.
‘비판의 사회학’은 갈등하고 경합하는 여러 가치의 문법을 더 잘 보여줌으로써, 세계가 ‘하나의 진실’로 환원되지 않으며, 타인들의 수많은 해석과 판단이 중첩된 다면체적 공간임을 감각하게 한다. ‘비판의 사회학’이 필요한 핵심적 이유의 하나는, 내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주장이 진심임을 믿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 ‘비판의 사회학’은 우리가 모두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편집증적 의심과 악무한적 상대주의에 빠지는 대신에 각자의 신념을 진지하게 검토하게 하고, 최소한의 신뢰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세계를 향해 서로를 설득해나가도록 북돋을 수 있다.
볼탕스키와 테브노는 사회를 ‘지배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기만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분쟁이 발생하는 와중에 다양한 가치판단들이 충돌하고 있는 공간으로 본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안정과 질서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당화’ 이론 속의 사회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 강자와 약자가 한쪽을 일방적으로 유린하거나 통제하는 공간이라기보다 비판과 정당화가 실제로 수행되는 공간이다.
“우리는 예컨대 막스 베버의 연구가 추동한 ‘정당화’(justification) 개념을 단순히 ‘적법화’(legitimization)로 대체하는 시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후자는 정당화를 기만(deceit)과 혼동하고, 조정(coordination)의 제약을 무시하며, 가치 상대주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정당화 가능한 행위’에 있다. (…) 다시 말해 사람들은 어떤 비밀스러운 동기를 감추기 위해 사후적으로 거짓된 구실을 발명한다기보다는(즉 알리바이를 꾸민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자기 행동이 정당화의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하려는 경향이 있다.”5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하지만, 당연히 모든 정당화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설득력이 있어야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설득력은 어디서 오는가? 볼탕스키와 테브노에 따르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공유된 공동체의 핵심 가치들에서 온다. 이는 프랑스어 ‘시테’(cité)로 개념화된다. ‘시테’는 일반적으로 ‘도시’라는 의미이지만 체제(regime), 세계(world), 정치체(polity), 가치질서(orders of worth) 등 폭넓은 의미도 담고 있다. 이론의 맥락과 의미를 고려하면 ‘가치질서’ 정도의 번역이 적절하다. 볼탕스키와 테브노는 가치질서를 다시 ‘시민적(civic) 질서’ ‘시장(market) 질서’ ‘산업적(industrial) 질서’ ‘영감적(inspired) 질서’ ‘명성(fame)의 질서’ ‘가정적(domestic) 질서’ 등 총 6개로 분류한다. 다음 회에 이어서 논의하기로 하자.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1. B.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p8, p51, pp57∽58, 2005
2. L. Boltansky, (trans.) A. Goldhammer, ‘The Making of a Class: Cadres in French Socie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1982]
3. 브뤼노 라투르, 홍철기 역,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갈무리, 122쪽, 2009. 한국어판 역자는 원문의 cité를 “도시”로 옮겼으나 여기서 cité는 ‘가치질서’에 가까운 의미다.
4. L. Boltansky & L. Thévenot, (trans.) C. Porter, ‘On Justification: Economies of Worth’, Princeton University Press, p71, 2006[1991]
5. L. Boltansky & L. Thévenot, (trans.) C. Porter, ‘On Justification: Economies of Worth’, Princeton University Press, p37, 2006[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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