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6일 오후 4시30분께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건설노동자 백아무개(51)씨가 건설 설비에 깔려 사망했다. 당시 현장에서는 건물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클램셸 기중기’라는 건축장비는 지하 4층까지 파내려간 지반의 흙을 퍼내다 마침 바닥을 지나가던 백씨를 보지 못했다. 백씨는 이 공사현장에서 지난 2년 사이에 사망한 다섯 번째 노동자였다. 시공사는 GS건설이 주관하는 컨소시엄이었다. 하필 GS건설은 지난해 4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등이 함께 만든 산재사망공동캠페인단에서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된 기업이었다. GS건설이 원청사업자로 참여한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 수는 2009년에만 14명이었다. 두 번째로 사망 건수가 많은 대림산업(9명)과도 차이가 컸다.
한 해 1400명 넘게 숨져
산업재해 사망은 물론 GS건설만의 얘기는 아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통계를 합하면, 대한민국은 이미 ‘산재 왕국’이다. 백씨는 한 해 1400명이 넘는 산업재해 사망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1만2961명이 일터에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목숨을 잃었다. 2009년에만 사망자가 1401명이었다. 하루에 4명꼴이다. 외국과 비교하면 한국 산재의 통계는 더욱 음울하다. 노동자 1만 명당 한 해 산재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만인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2009년 기준으로 1.01명으로 영국의 0.07명, 독일 0.22명, 일본 0.26명보다 훨씬 높다.
왜 이럴까? 가장 큰 이유는 산업재해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의 업주 가운데 구속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해 노동부가 안전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업장에 부과한 과태료는 모두 합해 21억원이었다. 2010년 상반기 서울시에서 담배꽁초를 길에 버린 시민에게 부과된 과태료만 33억원이었다.
2008년 1월7일 경기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건은 우리나라 산업재해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사건이었다. 현장에 있던 근로자 57명 가운데 무려 40명이 사망했다. 그렇지만 처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냉동창고를 만들던 회사의 대표는 1심에서 2천만원 벌금형을 받았고, 다른 현장 책임자들은 집행유예 등의 처벌을 받았다. 재판부는 시공자의 현장 안전관리가 부실했다는 점을 일일이 열거한 뒤 “안전 불감증에 따른 인재로 관련 피고인들을 엄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업체와 피해자들의 유족이 원만히 합의했고, 피고인들 모두 범죄 전력이 없고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해” 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을 보면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의무 위반으로 근로자가 사망하면 사업주를 최고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고 돼 있다. 결국 법만 엄하고, 판결은 너그러웠다. 김수근 성균관대 의대 교수(산업의학)는 “마치 일하다 사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법이 침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법의 침묵’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산업재해 통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필요가 있다.
법만 엄하고 처벌은 솜방망이
정부 산하 연구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으로부터 2009년 산업별·사업장 규모별 산재 사망자 발생 추이를 받아보았다. 전체 산업 분야 가운데 재해 사망자는 건설업(559명·40.0%)과 제조업(392명·28.0%)에 집중됐다. 반면 금융·보험업은 3명(0.2%)만이 사망했다. 또 사업장 규모별로 보면, 10명 미만 사업장의 만인율이 1.85명으로, 300명 이상 사업장의 산재 사망자 만인율(0.46명)의 4배를 넘었다(표1 참조). 산재는 건설업과 제조업 가운데서도 주로 영세한 소규모 사업장에 집중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 가운데서
도 이른바 ‘취약계층’이 산재로 희생되는 빈도가 높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은 한국산업안전공단이 2007년에 내놓은 ‘국가안전관리 전략 수립을 위한 직업안전 연구’ 보고서를 보면 더 촘촘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임준 가천의대 교수(예방의학)가 공단의 용역을 받아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 산재의 현실을 잘 그린 어두운 ‘자화상’이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소개되지는 않았다. 보고서는 2006년에 산업재해를 겪은 노동자 2천 명과 산재를 겪지 않은 일반 노동자 2천 명을 상대로 전화 면접을 통해 업종과 사업장 규모, 업무의 성격 등 관련 정보를 모은 뒤, 이를 집계해 상대적인 산재율을 산출했다. 연구 결과 하도급, 일용직, 건설업, 4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에서 재해 비율이 높았다.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고용 형태별로는 일용직의 재해 발생 비율이 상용직보다 6.35배 높았고, 파견직(3.97배), 임시직(1.76배)도 상용직보다 빈도가 높았다. 자신의 고용 형태를 ‘모르겠다’고 답한 이들의 산재 발생 비율은 무려 8.95배였다.
또 하도급사와 계약한 노동자가 원도급사와 계약한 집단보다 재해가 2.53배 더 자주 생겼고, 파견업체에서 근무한 노동자의 재해 빈도도 원도급사와 계약한 집단보다 1.78배 높았다. 역시 자신의 소속 업체가 원도급사인지 하도급사인지, 성격을 몰랐던 노동자에게는 사고가 4.57배 더 잦았다.
산업별로는 재해 발생 비율이 가장 낮은 금융보험업에 견줘 건설업의 재해 빈도가 28.21배 높았다. 농림어업이 23.92배, 제조업이 14.29배, 운수창고통신업이 12.08배 많았다.
근로시간은 재해 빈도와 뚜렷한 비례관계를 보였다. 한 주에 61시간 이상 일한 노동자는 46시간 이하 일한 노동자보다 재해를 겪을 확률이 6.61배 높았다. 또 노조가 없는 작업장에서 재해가 발생할 비율이 그렇지 않는 작업장보다 1.45배 높게 나타났다.
보고서의 설문을 보면, 산업재해가 끝없이 반복되는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2009년 산재를 겪은 노동자 907명을 대상으로 사고가 생긴 이유를 묻자, 응답자의 29.1%가 ‘본인의 실수’ 탓으로 돌렸고, 나머지 42.1%는 구조적 원인을 꼽았다. 그 속에는 ‘기구 및 설비의 결함 혹은 불안전한 상태’(18.4%), ‘소음, 유해가스, 빠른 작업 속도 등 열악한 환경’(14.3%), ‘장기간 근무 등으로 인한 피로 누적’(6.3%) 등이 포함됐다(표2 참조). 또 응답자 가운데 99명(10.9%)은 “(자신이 겪은) 사고 이전에 같은 사업장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다”고 답했다. 또 637명(70.2%)은 “본인이 당한 사고가 동일 사업장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답했다.
‘죽음의 도약대’로 내몰리는 노동자들
임준 교수는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생명을 인권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도 돈으로 대체 가능한 ‘생산부품’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재해 문제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업 입장에서도 값비싼 안전설비를 하는 것보다 사망자에게 보상비를 내고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들어서 산재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법이 침묵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권리를 힘주어 말할 수 없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라는 ‘죽음의 도약대’에 서도록 내몰리는 셈이었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산업재해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기업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살인’에 가깝다.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 ‘기업살인법’을 제정해 기업에 강력한 규제를 가하는 것처럼 우리 정부도 산업재해 사업장에 대한 제재 수위를 대폭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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