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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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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건강한 사회, 우리의 과제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사례와 수치로 건강 불평등 해부한 ‘생명 OTL’의 의미 있는 한 걸음…

정부의 모니터링 체계 구축과 지역 격차 해소 시급
등록 2011-02-10 02:28 수정 2020-05-02 19:26

많은 나라의 정부들은 ‘불평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보수적 정부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불평등은 ‘차이’ ‘변이’ ‘격차’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 측정 가능한 양적 차이를 나타내는 불평등(inequality)과 ‘회피 가능하거나 불필요한’ 불평등을 의미하는 ‘불공평’(inequity)을 구별해 말하기도 한다. 국제건강형평성학회는 건강 불공평을 “사회적·경제적·인구학적·지리적으로 구분된 인구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한 가지 이상의 건강 측면에서 나타나는 체계적이고 잠재적으로 교정 가능한 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두 개념은 특별히 엄밀한 구분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흔히 혼용해서 사용된다.
 
사회정의는 건강에 좋다

왜 건강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필요할까? 근거는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로 규범적 이유를 들 수 있다. 건강 형평 사업의 대상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전체 남성 노동자의 약 40%, 여성 노동자의 약 60%가 임시일용직으로 이른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태로 살고 있으며 이들에게 건강한 몸은 생존의 문제다. 건강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지만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질병이나 장애가 발생하는 부분이 더 많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은 “달성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하는 것은 인종, 종교, 정치적 입장,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의 기본적 권리 중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다. 건강 불평등은 한 인간이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 능력에서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이는 존 롤스의 ‘공평으로서의 정의’의 세 가지 원칙 중 하나인 ‘기회에서의 공평한 평등’을 위배하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노먼 대니얼 교수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건강 불평등은 최소화되고 각 인구 집단의 건강 수준은 향상될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정의는 우리의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실용적 이유다. 해가 갈수록 소득의 불평등과 함께 건강의 불평등도 커지고 있다. 1998년 가장 높은 소득군과 낮은 소득군 남성 사이의 주관적 불건강 수준의 격차는 12.8%, 여성은 10.6%였는데, 2005년에는 남성 16.5%, 여성 16.1%로 조사돼 소득수준에 따른 주관적 불건강의 격차가 증가한 결과를 보였다. 이러한 양상은 다른 지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민건강 수준을 높이려면 소득에 따른 건강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 미국이 전세계에서 1인당 의료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면서도 건강 수준이 높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건강 불평등 때문이다. 즉, 소득이 높은 사람은 이미 유럽 수준 이상의 건강 수준에 도달해 있으며, 추가적 자원을 투입해도 큰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 건강지표의 평균이 낮아지는 것은 저소득층의 건강이 향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강 형평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고서는 국민의 평균 건강 수준의 향상은 어려워진다. 이것이 미국이 ‘국가보건계획’에서 중요한 양대 목표 중 하나를 ‘건강 불평등의 감소’로 설정한 이유다.
하지만 기존의 보건사업은 오히려 건강 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다. 2004년 우리나라에서 10개 보건소를 대상으로 한 금연클리닉 시범사업의 결과는 그 좋은 예다. 사업 결과 금연 성공률은 건강보험 대상자가 의료급여 대상자에 비해, 직업을 가진 사람이 무직자에 비해, 그리고 대도시 거주자가 농촌 거주자에 비해 유의하게 높았다. 따라서 이러한 금연사업을 지속할 경우, (보건사업의 효과만을 기준으로 할 때) 이들 집단 사이 건강 불평등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따라서 금연과 관련해 건강 불평등을 줄이려면 불평등 해소 자체를 목표로 하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질병의 ‘외부효과’

영국의 병원 수술실 모습. 영국은 1990년대부터 건강의 계층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정책을 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영국의 병원 수술실 모습. 영국은 1990년대부터 건강의 계층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정책을 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질병은 ‘외부효과’를 가진다. 건강의 ‘외부효과’란 한 사람이 아프면 그 영향이 개인에서 끝나지 않고 아픈 사람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좋은 예가 전염병이다. 지극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더 자주 많이 아프고 가난한 이들을 건강하게 만들지 않으면 부자들도 건강할 수 없다. 또 한 사회에서 건강 불평등이 커지면 사회 통합과 안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건강한 집단과 건강하지 못한 집단 사이에 공공정책에 대한 요구의 내용과 강도가 달라진다. 이미 건강한 집단은 건강을 위해 세금을 더 내고 국가가 공공사업을 하는 것에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이는 ‘사회연대’에 기초해 설계된 기존의 많은 공공정책, 예를 들어 전 국민 의료보험, 의료급여제도와 보건사업들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울러 건강 형평 사업이 경제적으로 늘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건강에 취약한 사람들의 건강 수준을 높여주는 것은 그들이 아파서 사용하게 될 의료비를 줄이는 기능을 한다. 또한 이들이 건강해져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경우, 진료비를 줄이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의존비를 낮춤으로써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그래서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학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국가들과 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평등해야 건강하고, 평등한 나라가 강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건강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는 1990년대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정의 핵심 목표 가운데 하나로 ‘건강 불평등 해소’를 내걸고 10년간 범정부적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마이클 마멋 영국 런던대학 교수는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건강 불평등을 줄이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음 여섯 가지 정책행동을 제안했다. 내용은 △모든 어린이가 인생에서 최상의 출발을 하도록 하는 것 △모든 어린이·청소년·성인이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 △모든 이들을 위한 공정한 취업과 좋은 직업을 만들어내는 일 △모든 이들을 위한 삶의 건강한 표준을 확보하는 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간과 공동체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일 △질병 예방의 역할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건강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력은 다양한 영역과 수준에서 총체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범부처적 접근, 다수준적 접근, 생애의 시기에 따른 접근, 인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상황과 관련해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강 불평등과 관련 요인에 대해 정부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최우선적 과제의 하나로 지역 간 건강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특별히 지역 간 격차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지역’에는 이 문제에 책임을 지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주체(자치단체장, 지역시민단체 등)가 명확함에 따라 단기간에 조직적이고 실효성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죽음도 가난했다’로 시작한 이번 의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시리즈는 현장과 구체적 수치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분석해냈다는 점에서 한국 건강 형평 관련 역사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다음 과제는 전 지구적 건강 문제

반면 전 지구적 빈곤과 건강, 그 속에서 한국 사회의 역할,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희망의 메시지 등을 발굴해내는 것은 다음 기획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또한 이번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 반향을 구체적인 작업으로 이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함께 건강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건강할 수 없다”는 정신을 그 중심에 두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만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몫이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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