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0월26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신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러 달려갔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두 제자도 밖으로 나가서,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달렸습니다.”(성서 ‘요한복음서’ 20장 1~4절 참조)
2025년 4월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가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서 열렸다. 교황청이 공개한 2시간여 분량 동영상을 보면, 광장은 전세계에서 달려온 신자로 가득 찼다. 장중한 미사가 1시간여 이어졌다. 엄숙한 침묵 속에 간간이 외침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2025년 4월20일 부활절 미사를 마친 교황 프란치스코가 ‘포프모빌'을 타고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을 돌며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REUTERS
‘우르비 에트 오르비’라 한다.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성탄절과 부활절 미사에서 ‘로마와 온 세상에 보내는 강론과 강복’을 일컫는다. 폐렴으로 38일간 입원 치료를 받고 3월23일 퇴원한 교황 프란치스코가 종려주일(부활절 1주일 전 일요일)에 이어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바 일 파파.”(교황 성하 만세) 황금 십자가를 앞세우고 휠체어에 탄 교황 프란치스코가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등장하자 환호와 박수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가만히 손을 흔들던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절을 축하합니다.” 그의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이날 안젤로 코마스트리 추기경이 대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제목은 ‘그리스도께서는 무덤 밖에 계십니다’였다. 교황은 강론에서 전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죽음의 광기를 경계했다.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 만연한 폭력도 우려했다. 연악하고 한계선상으로 내몰린 이들, 이민자를 겨냥한 무시와 경멸이 만연한 것을 통탄했다. 그는 “오늘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되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이들도, 멀리 떨어진 땅에서 낯선 관습과 생활방식과 생각을 지니고 온 사람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2013년 3월 로마의 주교이자 성베드로의 266번째 후계자인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그가 줄곧 강조해온 바다.

2025년 4월21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종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특별 미사에 참석한 이들이 손을 맞잡고 애도하고 있다. REUTERS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교황 프란치스코의 실명)는 1936년 12월7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레스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한인타운이 형성된 플로레스는 당시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거주지였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피해 부모와 함께 1929년 이탈리아에서 이민을 온 아버지 마리오 호세 베르고글리오는 철도회사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어머니 레지나 마리아 시보리 역시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5남매를 키워냈다. 호르헤 마리오는 부부의 맏아들이다. 교황의 막내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 베르고글리오는 2013년 3월17일 이탈리아 일간 라스탐파와 한 인터뷰에서 ‘큰오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축구를 아주 좋아했다. 조금 큰 뒤에는 탱고를 열심히 췄다. 예의 바르고, 화학을 좋아했던 학구적인 청소년이었다. 막내인 나를 살뜰히 보살피고, 언제나 보호하려고 애썼다.”
화공학도였던 그는 20대 초반(1958년) 예수회에 딸린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삶의 방향을 틀었다. 이후 10년여 세월 신학 공부에 몰두한 그는 1969년 12월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의 나이 33살 때였다. 그가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으로 일한 1970년대는 잔인한 세월이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 호르헤 라파일 비델라는 “총이나 폭탄을 가진 자들뿐 아니라, 서구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생각을 퍼뜨리는 자들도 테러범”이라고 주장했다. 비델라가 주도한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통해 군사독재에 맞섰던 노동자·학생·지식인·정치인 등 2만2천~3만 명이 ‘실종’됐다.

2016년 3월24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로마의 난민수용소를 방문해 난민의 발을 씻긴 뒤 고개 숙여 입을 맞추고 있다. REUTERS
당시 베르고글리오 관구장이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의 예수회 스승이자 해방신학자로 군사정권 시절 빈민사목에 몰두했던 후안 카를로스 스카노네 신부는 2014년 3월13일 에이피(AP)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베르고글리오는 나에 대한 교회 내부의 비판을 막아섰고, 군부가 나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 때 내가 쓴 글을 은밀하게 외부로 반출하는 역할도 도맡았다.” 그가 살려낸 사람도 여럿이다. 1976년 8월 신학생 신분으로 군부에 쫓겼던 마리오 라 시비타는 AP에 “베르고글리오 관구장이 나를 살려줬다. 그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을 지켜봤다. 군인 2~3명이 항상 수도원 주변을 감시하던 시절이었는데, 군인들의 신임을 얻어 수배자를 숨겨준다는 의심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베르고글리오 관구장의 유일한 ‘잘못’은 “모두를 살리진 못했다”는 점이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즉위 이후 베르고글리오는 교회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2년 5월 주교 서품을 받은 그는 1998년엔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를 책임지는 대주교가 됐다. 3년여 뒤인 2001년엔 추기경에 서임됐다. 그는 같은 해 10월 열린 교황에 대한 자문과 교회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10차 회의 운영 책임을 맡으면서 교계 안팎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추기경이 된 뒤에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촌 사목을 지속했다. 마약과 폭력이 넘쳐나는 우범지대도 사제복과 작은 가방 하나 들고 홀로 걸어서 들고 났다. 호화로운 관사 대신 작은 아파트를 빌려 생활했고, 기사 딸린 전용차 대신 대중교통을 즐겼다. 그가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이들의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즉위명으로 택한 이유일 게다.
요한 바오로 2세 선종으로 공석이 된 교황 선출을 위해 2005년 4월 바티칸의 성시스티나 대성당에서 콘클라베가 열렸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보수적 신학관을 공유한 독일 출신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이 무난히 교황으로 추대됐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당시 콘클라베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딕토 16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재위 8년여 만인 2013년 2월 자진해서 물러났다. 가톨릭교회사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개혁과 변화를 갈망하는 교회 내부의 여론은 교황 그레고리 3세 이후 1272년 만에 비유럽 출신 교황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예수회 출신,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도 프란치스코가 처음이었다.

2025년 4월21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종 소식이 전해진 뒤 코소보의 마더 테레사 대성당에서 한 수녀가 추모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REUTERS
즉위 이후에도 그는 소박한 삶을 이어갔다. 관저 대신 교황청 한 귀퉁이에 자리한 카사 산타마르타를 숙소로 정했다. 대형차 대신 소형차를 고집했고, 교황으로서 집전한 첫 미사엔 바티칸의 청소노동자들을 제일 먼저 불렀다. 이어 경비원과 정원사 등이 차례로 교황의 미사에 초대됐다. 따로 공식 일정이 없는 날엔 교황청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교황청 관계자는 2013년 7월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처음엔 교황께서 줄을 서 커피를 뽑고, 직접 음식을 담아,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하시는 모습을 모두들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너나없이 교황과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즉위 뒤 첫 부활절을 맞아 그는 무슬림 여성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예수의 섬김’을 뒤따랐다. 유전적 피부질환으로 흉해진 신자의 얼굴에 손을 얹고 강복했고, 얼굴이 함몰된 신도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에게 교회는 ‘야전병원’이었다. 우선 목숨부터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한테 콜레스테롤 수치 따위를 묻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했다. 2013년 7월7일 그는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섬을 방문해,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아가 물 위에 헌화했다. 해마다 수많은 아프리카 난민이 ‘약속의 땅’ 유럽으로 향하다 람페두사에 닿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 로이터 통신은 당시 교황 프란치스코의 강론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2014년 5월25일 팔레스타인 땅 요르단강 서안지구 베들레헴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가 유대 불법정착민이 세운 분리장벽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있다. REUTERS
“난민들의 고통은 누구 탓인가? 왜 이토록 많은 이가 동정심을, 함께 울어줄 능력을 잃었는가? 우리는 남의 고통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타인의 고통이 더는 아무런 울림을 주지 않게 됐다. (…) 그러니 기도하자. 가슴의 소리에 귀 막고, 자기만족에 겨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신께서 용서해주시길….”
그는 같은 해 11월26일 발표한 첫 번째 교황 권고(‘복음의 기쁨’)에서 “교회는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주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구약성서의)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제는 ‘배제와 불평등한 경제체제를 유지하지 말라’고 말해야 할 때”라고 짚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배제된 이들은 우리 사회의 밑바닥도, 변방도, 소외된 것도 아니다. 착취를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쫓겼다. 그들은 버려져야 할 찌꺼기 취급을 받고 있다. (…) 극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절대다수와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우상으로 숭배했던 고대의 ‘황금 송아지’가 오늘의 돈이다. (…) 전세계적으로 냉혹한 경제체제의 독재가 횡행하고 있다. 늙은 노숙인이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 ‘뉴스’가 안 되지만, 주가가 단 2포인트만 떨어져도 대서특필되는 게 말이 되는가.”

교황 프란치스코가 2014년 11월29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성령대성당에서 특별미사 집전에 앞서 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환한 표정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방생하고 있다. REUTERS
2025년 4월20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부활절 강론은 13분 남짓 이어졌다. 그는 “평화는 가능하다는 희망을 새롭게 하자”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기원했고, 가자지구의 죽음과 파괴, 참혹한 인도적 상황을 애통해했다. 전쟁을 멈추고, 인질을 풀어주고, 무엇보다 굶주린 이들을 먹여야 한다고 외쳤다.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예멘에서 지속되는 불안정과 인도적 위기도 걱정했다. ‘부활절의 선물’처럼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기를 소망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평화협정 체결과 화해를 기원했고, 콩고민주공화국과 수단·남수단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로 인한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내전에 대지진까지 겹친 미얀마 사가잉 지역 주민들을 위해 기도했고, 전쟁포로와 정치범의 석방을 촉구했다. 또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타인의 관점을 존중하는 태도 없이는 평화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정치적 책임을 진 자리에 있는 세계 모든 이에게 호소한다. 타인을 고립시킬 수밖에 없는 ‘공포의 논리’에 굴하지 마시라.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난한 이들을 돕고, 굶주림에 맞서고, 개발을 촉진할 수 있는 구상을 지원하라. 죽음의 씨앗을 뿌리는 대신 미래를 일으켜 세울 ‘평화의 무기’다.”
‘우르비 에트 오르비’가 끝났다. 환호하는 신자들에게 교황 프란치스코가 손을 흔들었다. 대성당의 종이 울렸다. 사제들도 신자들도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포프모빌’(교황의 자동차)이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신자 무리 사이에 마련된 통로를 따라 광장을 돌며, 교황 프란치스코가 전세계에서 온 5만여 명의 신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신자가 번쩍 들어올린 아기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강복했다. 교황청은 4월22일 낸 자료에서 “교황께서 개인 간호사인 마시밀리아노 스트라페티에게 ‘광장에 다시 데려다줘서 고맙다’며 각별한 인사를 건넸다”고 전했다.
미사를 마친 교황은 휴식을 취한 뒤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다. 부활절 다음날 새벽 5시30분께 그가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의 곁을 지켰던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했다. 1시간 남짓 뒤 교황 프란치스코가 작별인사를 하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그리고 곧바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2025년 4월21일 이른 아침 카사 산타마르타 2층의 소박한 아파트 안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선종했다. 뇌졸중으로 인한 심부전이 사인이었다. 향년 88. 바티칸 뉴스는 “모든 일이 순간적으로 벌어졌고, 교황께선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으셨다”고 전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말년에 “무덤은 특별한 장식 없이 단순하게 해달라. 비문엔 ‘프란치스코’라고만 새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역대 교황은 모두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안장됐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밖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묻히길 희망했다.

2018년 9월29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 경찰과 가족을 초대해 마련한 공개청중 행사장으로 들어서며 환호하는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REUTERS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합니다. 우리는 환경 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 해결책을 위한 전략에는 빈곤 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과 동시에 자연보호를 위한 통합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6월 반포한 ‘환경 회칙’ 제139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회칙의 제목이 고스란히 그에 대한 조사로 어울린다. ‘라우다토 시.’ (찬미받으소서 그대.) 음미할 만한 삶이었다.

2025년 4월23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주검이 그가 살던 카사 산타마르타에서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되고 있다. REUTERS

2025년 2월23일 교황 프란치스코의 주검이 운구된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고인의 영안 공개를 앞두고 신자들이 애도를 표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REUTERS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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