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관계의 예술’이다. 관계는 힘이 지배한다. 힘이 센 나라는 흔히 다자주의를 선호한다. 여러 나라가 모인 상황에서도 자국이 원하는 ‘질서’를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힘이 약할 땐 양자주의로 돌아선다. 둘 중 힘센 쪽이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계는 상대적이다. ‘트럼프식 외교’가 딱 그렇다.
‘트럼프 2.0’ 시대가 도래했다. 핵심은 한 가지다. 미국은 어디까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까? 답은 하나로 모인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던 세상은 끝난 지 오래란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 1기가 다자 대신 양자외교를 선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스스로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 할수록, 세계는 ‘미국 없는 세상’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다시 찾아온 ‘트럼프의 시대’가 옛 질서에 확실한 종언을 고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아직 오지 않은 ‘새 질서’는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른바 ‘트럼피즘’이 말하는 미국우선주의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 외교·안보 정책 측면이다. 흔히 ‘고립주의’라 한다. ‘개입을 통한 질서 유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제국’을 꿈꾸던 시절 시작돼, 냉전이 불을 뿜던 1960~1970년대 절정에 이르렀다. 그 시절 적대적 경쟁 상대였던 소련은 지구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건 미국뿐이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홀로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단극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은 복잡다단해졌고, 미국은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휩쓸었을 때, 중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베이징에서 여름 올림픽을 치렀다. 세상은 그때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트럼프 행정부 2기를 앞둔 지금, 두 개의 전쟁이 한창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와 레바논에서 벌이는 전쟁이다. 이스라엘의 ‘악행’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정권 연장’에 실패한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이스라엘의 막무가내식 전쟁범죄를 목도하고도 미국은 ‘방어권’을 내세워 무기 지원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술 더 뜰 가능성이 높다. 집권 1기 때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지와 지원을 고집했던 터다. 이스라엘은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에 환호성을 올렸고, 일각에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자리한) 요르단강 서안까지 접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그 참혹한 전쟁이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뒤에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란 불길한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슬람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 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과 유엔 등의 후원 속에 2015년 7월 타결했던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항상 앞세우는 ‘국익’에 배치되는 행태인데, 이스라엘이란 ‘이데올로기’가 힘이 더 센 탓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개혁파인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뒤에도 여전히 “미국과 직접 협상해 상황 타개를 시도하겠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란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운동 과정에서 “새로운 핵 합의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되레 트럼프 행정부 2기 출현이 이란에서 개혁파의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보수파가 다시 득세한다면, 가자지구 전쟁을 두고 ‘약속 겨루기’를 이어왔던 이란과 이스라엘 간 무력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운동 기간에 “하루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자신의 개인적 인연을 내세운 발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악연은 짧게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분쟁의 더 깊은 뿌리는 따로 있다. 냉전이 끝나고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뒤에도 다른 한쪽이던 미국이 주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해체는커녕 되레 러시아를 향해 ‘동진’을 거듭했다. 그 배후는 당시 유일 초강대국을 자부했던 미국이다. ‘개입’을 비판하며 ‘고립주의’를 강조하는 트럼프 행정부 2기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종전을 압박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을 중단하면, 나토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연합 간 갈등이 고조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복원했다던 ‘대서양 동맹’의 현실이 고작 이렇다.
하릴없는 외교보다 다급한 건 경제다. 주고받는 게 무역이다. 수입과 수출의 ‘수지’가 맞아야 나라의 경제를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은 국경을 모른다. 값싼 노동력과 생산비를 찾아 미국의 제조업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다. 자본은 배를 불렸지만, 미국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 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해지기 시작한 이유이자,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부활'한 비결이다. 그가 선거 운동 기간에 ‘만국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도 그래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국가의 상품에 대해 10~20%의 관세를, 특히 중국산 제품에는 60~1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다. 관세 부과 대상은 피아 구분이 없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연합까지 동맹도 예외가 아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무역전쟁이 몰아칠 기세다.
“한마디 하죠. ‘유럽연합’이라고 하면, 뭔가 굉장히 사랑스럽고 좋게 들리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함께 모인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유럽연합은 미국산 차량을 사지 않아요. 미국산 농산물도 마찬가지고. 그래놓고선 자기들이 생산한 차량 수백만 대를 미국에서 팔아먹죠. 이래선 안 되죠,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집권하면 유럽연합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4년 10월29일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세 부과를 통해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겠다는 발상은 흔히 ‘보호무역주의’로 부른다. 관세를 부과받은 수출국은 통상 보복관세를 부과한다. 관세와 보복관세로 수출입 상품의 가격이 뛰면 전세계 공급망이 교란될 것이다. 생산 비용은 치솟을 수밖에 없다. 미국 국내적으로도 고율 관세로 인한 수입품 가격 상승은 미국 소비자의 부담을 높일 것이고, 결국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터다. 자칫 세계적 차원의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트럼프 집권 2기를 앞두고 유럽연합이 고심을 거듭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느닷없는 ‘관세 전쟁’으로 인한 대미 수출 타격도, 미국산 상품 수입 축소도 걱정이다. 최근 몇 년 새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유럽연합 각국은 액화천연가스(LNG)를 비롯한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늘려왔다. 미국과 무역마찰이 거세질수록 생산비 상승 압박이 커지고, 이는 곧 수출 하락과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소리(DW) 방송은 11월12일 전문가의 말을 따 “트럼프 행정부 2기 들어 실제로 유럽산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유럽연합도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전 대통령 주장처럼 미국이 유럽산 상품에 20%의 관세를 부과하면, 독일의 대미 수출은 15% 하락하고 연간 330억유로 수준의 경제적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유럽 경제의 엔진'으로 불리는 독일 경제의 2024년 3분기 성장률은 단 0.2%에 그쳤다. 유럽은 코로나19의 긴 터널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다.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미국과 맞설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때 실제 무역전쟁을 벌였던 중국은 어떨까? 로이터 통신은 11월7일 “2018년 무역전쟁 발발 당시 중국의 부동산 경기는 전체 경제활동의 약 25%를 점할 정도로 활황세였다. 관세 충격을 흡수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과 누적된 공급 과잉으로 2021년부터 중국 부동산 경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급격한 세수 손실로 각급 지방정부는 부채 부담이 가중됐고, 중앙정부도 외부 충격에 대한 대응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과 함께 미국이 예고한 고율 관세를 부과한다면, 중국으로선 국가의 명운을 건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파급은 세계경제를 휘청이게 할 터다. 지난 10월25~27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연차총회의 최대 화두가 ‘트럼프 2.0’이었던 이유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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