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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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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삼수만에 대통령 눈 앞…바이든 누구인가

‘당선 유력’ 바이든은 누구… ‘흙수저’ 출신으로 36년간 상원
평화·환경·여성 문제엔 진보적, 동성혼·낙태 법안엔 보수적
등록 2020-11-07 11:16 수정 2020-11-11 14:21
미국 대선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인 11월4일 오후,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오른쪽)가 성장한 곳이자 정치적 고향인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체이스센터에서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선 승리와 사회 통합을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 대선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인 11월4일 오후,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오른쪽)가 성장한 곳이자 정치적 고향인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체이스센터에서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선 승리와 사회 통합을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1월3일(현지시각) 치른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제46대 대통령 당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이든은 36년간 상원의원(1973~2009년)을 거쳐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2009~2017년, 상원의장 겸임)을 한 관록의 정치인이다. 1988년과 2008년 대선에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팔순을 앞두고 세 번째 도전한 이번 대선에서 바이든은 현직 대통령 프리미엄과 독설을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를 접전 끝에 따돌리고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 기록 경신에 바짝 다가섰다.

최소 연령 기준 30살 전인 29살에 상원 당선

바이든의 반세기에 가까운 정치 경력은 화려하다. 1942년 11월 출생인 그는 시러큐스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델라웨어주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던 1970년 중간선거에서 뉴캐슬카운티 의회의 하원의원에 당선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공화당 강세 지역이었지만, 바이든은 2천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며 순조로운 첫발을 내디뎠다.

불과 2년 뒤인 1972년 11월, 29살 바이든은 민주당 지역위원회로부터 연방의회 상원 출마를 강력히 권고받았다. 당시 민주당은 델라웨어주에서 바이든 말고는 내세울 인물이 없을 만큼 약세였다. 망설임 끝에 출사표를 던진 바이든은 공화당의 2선 현역 의원을 꺾는 파란을 연출하며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워싱턴 중앙 무대에 진출했다. 미국 헌법은 연방 상원의원의 최소 연령 자격을 30살로 규정하고 있다. 하원의원보다 5살이 더 많다. 바이든은 상원의원 초선 당시 30살에서 13일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의원 선서를 하고 임기를 시작할 때면 서른을 넘기게 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이든은 상원 초기엔 인권, 환경, 소비자 보호, 고령자 돌봄, 건강보험 같은 생활밀착형 이슈에 관심을 갖고 연방정부의 역할 확대론을 주장했다. 이후 활동 분야를 외교, 국방, 법제로 넓히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1987~95년 상원 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연임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두 차례나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했다. 앞서 1979년 미국과 러시아의 핵경쟁에 실질적 제동을 건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2) 협상 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적극 설득하고 안드레이 그로미코 러시아 외무장관과 직접 담판하기도 했다.

바이든의 삶은 화려한 정치 이력만큼이나 극적이다. 그 깊숙한 곳에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절망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바이든은 아일랜드 이민자 혈통으로, 독실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다. 집안에서 대학 진학자는 바이든이 처음이었다. 워싱턴 정객의 대다수인 명문가, 부유층, 명문대(학부) 출신 ‘금수저’가 아니라, 평범한 ‘흙수저’ 출신의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바이든은 어린 시절 지독한 말더듬이였다. 그래서 주변의 놀림을 받고 마음을 다칠 때가 많았다. 소년 바이든은 긴 문장을 통째로 암송하는 노력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말더듬증을 완전히 극복했다. 약점을 자산으로 바꾼 소중한 경험이었다.

‘카리스마 부족’ 평가에 리더십 자질 의심도

그의 삶에서 첫 번째 비극은 상원의원에 당선하고 채 한 달이 안 된 1972년 12월, 크리스마스를 꼭 일주일 앞두고 일어났다. 아내 네일리아와 막 첫돌이 지난 딸을 한꺼번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장남 보(당시 3살)와 연년생 차남 헌터는 크게 다쳤다. 바이든은 당시의 충격과 실의를 “인생의 발판이 발밑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표현했다. “어디에서도 위안을 얻지 못하고” 상원의원직도 포기하려 했으나, 민주당 지도부의 집요한 설득으로 어린 두 아들의 병실에서 의원 선서를 했다.

첫 의정 활동 때부터 리처드 닉슨 대통령 탄핵, 베트남전쟁, 연방대법원의 낙태 합법화 판결, 흑백 인종통합 스쿨버스 운행 등 굵직한 현안이 넘쳤다. 첫 아내와 비극적으로 사별한 지 5년 뒤인 1977년에는 고등학교 교사이던 질을 소개받고 사랑에 빠졌다. 그와 재혼하고 막내아들까지 얻으면서 확연히 안정과 자신감을 회복했다.

바이든은 이후 임기 6년의 상원선거에서 다섯 차례나 더 내리 당선하는 저력을 보였다. 두 번째 큰 비극은 노년에 찾아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브로맨스’를 과시하며 부통령 겸 상원의장으로 국정을 운영하던 2015년, 장남 보 바이든을 뇌암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당시 장남은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이자, 아버지가 기대하던 정치적 후계자였다. 앞서 1988년 대선에서 바이든은 민주당 후보 경선에 첫 출사표를 냈으나 연설문 표절 시비로 중도 하차하는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 설상가상, 그 직후 뇌동맥 질환으로 쓰러지면서 생명의 위기까지 맞았으나 성공적으로 수술과 재활을 마치고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바이든은 미국에서 진보의 물결이 거셌던 ‘68세대’ 출신이다. 한국으로 치면 ‘586세대’ 격이다. 그는 최근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온 2007년 자서전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김영사 펴냄)에서 “정치를 올바로 하기만 하면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공직에 대한 “고귀한 소명” 의식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밝혔다. 전쟁과 평화, 환경, 시민권, 여성의 권리, 경제정책 등에 대해선 진보적 시각을 유지했다. 그러나 동성결혼과 낙태 관련 법안에선 보수적이거나 모호한 중도적 태도를 취했다.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한 영향이 컸다. 바이든은 동료 의원에게서 “한쪽만 고르는 게 정치적으로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편의보다 지적 동의와 개인적 원칙을 우선으로 삼는 바람에 힘든 길을 걸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바이든은 화려한 정치 경력과 극적인 삶에 견줘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무색무취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잦은 말실수와 부적절한 농담으로 입방아에 오른 적도 많다. 남의 약점을 꼬집어 별명 붙이는 데 능숙한 트럼프는 바이든을 ‘슬리피 조’(Sleepy Joe, 졸린 조)라고 조롱한다. 푸근하고 친숙한 할아버지 이미지는 유력 정치인에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바이든이 비판자들에게 리더십 자질을 의심받는 이유다.

트럼프 ‘불복 소송’, 미국 분열과 갈등 속으로

그러나 최근 10여 년 새 극심한 분열로 망가진 미국을 회복하는 데 바이든 같은 인물 유형이 외려 적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앞서 언급한 ‘바이든 자서전’ 번역본 해제에서 “(오바마 정부 8년과 트럼프 정부 4년까지) 지난 12년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평온한 미국이 없었음을 돌이켜볼 때, 바이든에 대한 미지근한 감정은 국가지도자로서 칭찬받을 자질”이라고 평가했다. 김 원장은 “바이든은 미국의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배경에다 비극적 가족사를 겪은 슬픔이 더해져서,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지닌 치유자 이미지라는 점도 높이 샀다.

당장 트럼프 현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바이든 승리’에 불복할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민주-공화 양당 지지자들의 대립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한동안 극단으로 치달을 조짐이다. 바이든으로선 대통령 당선이 최종 확정되더라도 ‘선거 뒤 허니문’은커녕 짙은 불확실성 속에 공감과 치유의 리더십을 확인하는 첫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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