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포만 없었지, 사실상 전쟁이었다. 사생결단 총력전을 방불케 하는 선거 대전이었다.
11월3일(이하 현지시각) 치른 미국 대선의 잠정 개표 결과, 조 바이든(78) 민주당 후보가 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74·공화당)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제46대 미국 대통령 당선자 지위에 바짝 다가선 것으로 집계됐다. 개표가 시작되고 만 하루 반나절이 지난 5일 새벽, 바이든 후보는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과반(270명) 고지의 9부 능선을 넘었다. 이때까지 펜실베이니아 등 몇몇 주에서 우편투표 개표가 완료되지 않아 최종 집계는 나오지 않았다.
재선에 몸이 단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인 4일, 개표 막바지에 이르러 바이든 후보한테 역전당한 위스콘신주에서 재검표를 요구하고 미시간주와 펜실베이니아주에선 개표 중단 소송을 내는 등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운명의 저울추가 바이든 쪽으로 기우는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에게 예상 밖 승리를 안겨주었던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이 있었다면, 이번엔 ‘히든 바이든’ 지지자들의 뒷심이 개표 종반에 극적으로 판세를 뒤집은 모양새다. ‘샤이 트럼프’는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도 사회적 평판 저하 등을 의식해 표심 공개를 ‘꺼리는’(shy) 숨은 지지자를 가리킨다. ‘히든 바이든’은 우편투표 또는 개표 시간 지연 등으로 막판까지 표심이 드러나지 않은 채 ‘가려졌던’(hidden) 바이든 지지층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막판 변수는 조기 투표 중 아직 최종 집계되지 않은 우편투표의 향방이다. 4일 밤까지 선거인단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주는 펜실베이니아(20명), 조지아(16명), 노스캐롤라이나(15명), 애리조나(11명), 네바다(6명), 알래스카(3명) 6곳이다.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등 일부 주에서 선거 당일 소인이 찍힌 우편투표의 산입을 사흘 뒤인 6일 도착분까지 인정한 법원 결정을 연방대법원에서 무효화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강력한 소송전을 예고했다. 법적 분쟁이 길어지면, 선거 결과가 최종 확정되기까지 길게는 두 달이 걸릴 수도 있다.
2020 미국 대선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만큼 새로운 기록도 쏟아냈다. 먼저 투표율이 66.8%로 잠정 집계돼, 1900년 대선(73.7%) 이후 1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게 확실시된다. 유권자의 3분의 2 이상이 투표권을 행사한 것도 20세기 이후 처음이다. 이처럼 뜨거운 선거 열기는 역대 최다 사전투표에서도 확인된다. 현장투표와 우편투표를 합해 선거일 이전에 표를 던진 유권자는 1억110만여 명에 이른다. 전체 투표자 1억6천만 명의 3분의 2가 일찌감치 지지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것이다. 여기에는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밀집공간 회피뿐 아니라 미묘하고 절박한 표심도 작용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 인근 소도시의 백인 여성 유권자 조세핀은 <한겨레21>과 한 전화 통화에서 “바이든 지지자들이 선거 초판에 그의 당선을 확정지으려 사전투표에 대거 참여했다”며 “언론은 분열과 혼돈에만 주목하지만, 나는 바이든의 승리와 더 나은 미래를 확신한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득표수에서도 미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7천만 표를 넘기는 신기록을 세웠다. 바이든은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다. 그는 11월20일에 만 78살 생일을 맞는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더라도 최고령(74살)이기는 마찬가지다. 선거 결과가 최종 확정되면, 바이든의 러닝메이트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은 미국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부통령, 트럼프는 지난 100년 새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다섯 번째 사례로 남는다.
한편, 이번 대선을 앞두고 총기 판매 역시 신기록을 경신했다. 고질적인 인종주의를 비롯해 온갖 형태의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깊어지는 미국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선거 당일인 11월3일 <폭스뉴스>는 개인 화기 컨설팅 업체 ‘소형무기 분석과 예측’(SAAF)의 자료를 인용해,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미국 전역에서 1860만 정의 총기가 팔렸고, 특히 (대선 직전인) 10월 한 달에만 190만 정의 총기가 팔려 전년 동기 대비 65%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연간·월간 판매량 모두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는 ‘코로나 록다운(이동 제한)’과 잇따른 흑인 피살 사건에 이어진 인종차별 반대 시위 등으로 치안 불안이 커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20 미국 대선은 역대 선거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혼돈과 반전, 분열과 대립의 결정판이었다. 3일 저녁 투표 종료와 함께 나온 출구조사는 하나같이 바이든의 당선을 예측했다. 앞서 공개된 2개월여 여론조사도 바이든의 낙승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바이든 우세가 점쳐지던 주들에서 박빙의 경쟁이 벌어졌고, 경합주로 분류된 곳에서 트럼프가 앞서갔다. 특히 양쪽 모두 막판까지 힘을 쏟아부었던 펜실베이니아주(선거인 20명)에선 트럼프가 바이든과의 격차를 한때 8%포인트 안팎까지 벌렸다. 두 후보는 전국 범위에서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지만 개표 흐름은 트럼프 우세였다.
승기를 선점하려는 양쪽 기싸움도 치열했다. 바이든은 4일 0시40분께 긴급 입장 발표를 하며 “우리가 대선 승리의 길로 가고 있다”며 “모든 표가 개표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했다. 트럼프도 즉각 반격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마이크를 잡고 “6천만여 명이 나를 지지했다”며 “우리가 크게 이겼다. 선거가 경이롭다”고 호언했다. “그들(민주당과 그 지지자)이 선거를 훔치려 한다”며 “우편투표는 사기”라는 주장도 되풀이했다. 섣부른 ‘승리 선언’으로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였다. 긴 하루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은 11월4일 아침, 극적인 반전이 펼쳐졌다. 바이든이 뒤처지던 ‘러스트벨트’(북동부 쇠락한 공장지대 지역)에서 표차를 꾸준히 줄이더니 정오 무렵 판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위스콘신(선거인 10명)과 미시간(16명)에서 ‘골든 크로스’(지지율 역전)로 승기를 잡은 데 이어, 펜실베이니아와 조지아 등 열세 지역에서도 표차를 바짝 좁혀갔다. 말 그대로 ‘피 말리는 접전’이었다.
두 후보의 희비가 엇갈린 가운데, 바이든은 이날 오후 4시께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투표 이후 두 번째 대중연설에 나섰다. 이번엔 승리 낙관이 묻어났다. 그는 “대통령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270명에 도달하기에 충분한 주들에서 우리가 이기고 있다”며 “이는 나와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미국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트럼프는 “(자신의) 우위가 마법처럼 사라지고 있다. 매우 이상하다”며 거듭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지만 근거는 대지 못했다.
11월5일 현재 바이든의 극적인 역전승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이지만, 미국 전역의 선거 결과는 일부 주의 우편투표 유효 시한인 6일이 돼야 최종적으로 나온다. 바이든과 트럼프 두 후보는 물론 미국 대다수 언론이 아직 결정적인 ‘승리 선언’ 또는 ‘당선자 확정 보도’를 삼가는 이유다. 그러나 6일 이후에도 공식적인 당선자 확정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연방대법원에 우편투표 무효화 소송을 제기하면서 선거 자체를 법정 다툼으로 몰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서다.
트럼프로선 이번 대선 결과의 적법성을 논란거리로 몰아가는 게 불리할 게 없다는 판단을 할 법하다. 양쪽 지지가 팽팽하게 맞선 박빙 승부 속에 트럼프에게 투표한 지지층이 48%가 넘는다. 대선을 앞두고 보수 성향인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의 연방대법관 지명을 강행한 것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사전 포석이란 지적을 받는다. 현재 연방대법원의 정치 성향은 진보(3명)보다 보수(6명)에 기울어진 구도다.
먼지가 가라앉으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확정된 것도, 뚜렷한 미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선거일 심야 시각에 바이든은 지지자들에게 “모든 투표가 계산될 때까진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인내심과 믿음을 유지해달라”고 했다. 이제 미국 시민과 세계의 눈길은, 미국 사회가 그 시간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단축하는지로 옮겨가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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