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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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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사랑 택시회사, ‘장발장’ 돕는 법률회사


영국의 바이오트래블, 바이오디젤 연료 사용 등 친환경화… 미국의 GJP, 재활 지원에 일자리 마련까지
등록 2009-06-09 15:31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00847C"> 이 사회혁신기업의 요람 ‘Sopoong’과 함께 선발한 인턴기자들이 지난 4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미국과 영국을 돌며 ‘세상을 바꾸고 있는 기업들’을 만났다. 이들의 생생한 취재기를 6월 한 달간 연재한다. 편집자</font>

‘국민소득 3만달러’가 국가적 목표이던 때가 있었다. ‘전 국민 연봉 3천만원’이 목표이던 때, 기업은 국가적 목표를 향해 싸우는 숭고한 전사였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북미와 브릭스(브라질·인도·중국·러시아) 등에서 거둔 매출은 해외 전선에서 거둔 전황처럼 상세히 중계됐다. 신제품 개발, 시장 장악, 매출 이윤 최대치 경신…. 가만히 보면 1960년대 미국의 기업들이, 70~80년대엔 일본의 기업들이 했던 일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단계가 지나면 기업의 형태와 목표는 어떻게 될까? ‘세계 정복’이 끝나면 다음 구호는 뭐가 될까?

영국 콘월과 미국 조지아에서 만난 첫 결론은 ‘시민단체는 기업을 향하고 기업은 시민단체를 닮아간다’였다.

바이오트래블의 창업자 앤디 밀슨(왼쪽)과 팀 우프. 콘월의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은 스스로 친환경의 고된 길을 선택했다. 이들은 돈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바이오트래블의 창업자 앤디 밀슨(왼쪽)과 팀 우프. 콘월의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은 스스로 친환경의 고된 길을 선택했다. 이들은 돈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영국 남서부의 휴양도시 콘월을 찾은 5월6일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잔뜩 웅크린 채로 나온 뉴퀘이공항의 정문 앞에 ‘바이오트래블’ 본사 사무실이 있었다. “찾아오느라 고생하지 않았냐”며 커피를 내미는 설립자 앤디 밀슨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이오트래블은 ‘그린택시’를 지향하는 택시회사다. 처음엔 일반 운송회사였다. 관광객을 공항이나 레스토랑, 호텔에서 태워 목적지까지 보내주는. 2005년 창업 당시 이름은 ‘익스플로러 사우스웨스트’였다.

“회사 창립 1년을 맞아 사업 내용을 점검해보다가, 우리가 매달 4천~5천ℓ에 달하는 화석연료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연을 즐기자는 관광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는 모순이었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대출까지 받아가며 연료 바꿔

이들은 정부 관계자들과 관련 기관, 대학 등에 ‘배기가스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알려주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의 전자우편과 편지, 전화를 수천 통 보내고 걸었다. 답은 없었다. 심지어 찰스 황태자 앞으로도 편지를 보냈지만 “행운을 빈다”는 답밖에 못 받았다. 스스로 학습해 답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대안은 친환경 연료인 바이오디젤이었다. 바이오디젤은 폐식용유나 유채씨앗, 팜야자 등을 원료로 만든다. 연소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양만큼을 원료 식물이 흡수하기에 ‘탄소중립’적이다. 바이오디젤로 전환하는 데 드는 돈도 직접 마련했다. 집을 담보로 받은 대출로.

잘 운영되던 회사를 환경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출까지 받아가며 친환경적으로 바꾼 이유는 뭘까? 바이오트래블의 공동 설립자인 앤디 밀슨과 팀 우프, 레이첼 힐은 “콘월의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친환경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이오디젤에 포함된 미세한 찌꺼기가 낮은 온도에서 차량의 연료분사 장치와 연료 필터를 막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엔진에 시동이 걸릴 리 없다. 당시 연료 공급업체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결국 엔진 청소를 위해 대당 1천파운드(약 200만원)를 써야 했다. 연료 공급업체를 바꿨다. 자체적으로 연료를 1μ(미크론) 이하로 거를 수 있는 필터 시스템을 만들었다. 연료를 따뜻하게 저정하는 공간도 갖췄다. 수천파운드가 더 들어가야 했지만, 환경을 보호하자면 당연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현재 바이오트래블의 택시는 바이오디젤과 일반 디젤을 8 대 2의 비율로 섞어 사용한다.

바이오트래블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고객에게 합승(sharing) 서비스를 권한다. 차량을 예약할 때 다른 승객과 차를 함께 타기로 선택하면, 목적지가 비슷한 승객끼리 묶어 한 차(미니버스)에 태운다. 2~3번 운행할 것을 한 번으로 줄이니 배기가스는 줄어들고 고객은 저렴하게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바이오트래블의 이윤은 줄어들 터다.

공동 설립자 팀 우프는 이런 활동에 대해 “환경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다. ‘말도 안 된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비스는 여름이면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 여름에는 한꺼번에 많은 고객이 몰리는데, 목적지가 같은 승객을 함께 태우면 적은 차량으로도 많은 고객을 맞을 수 있다.”

콘월 뉴퀘이공항 정문 앞에 있는 바이오트래블 본사 사무실에서 창업자 팀 우프(가운데)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바이오트래블은 사무실에서도 가급적이면 재활용품을 쓰고, 한 번 쓴 제품은 재활용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콘월 뉴퀘이공항 정문 앞에 있는 바이오트래블 본사 사무실에서 창업자 팀 우프(가운데)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바이오트래블은 사무실에서도 가급적이면 재활용품을 쓰고, 한 번 쓴 제품은 재활용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바이오트래블은 모든 차량에 친환경 타이어를 사용하고, 공회전 줄이기를 위한 매뉴얼을 철저히 실천한다. 세차는 빗물을 모아 한다. 사무실에서도 재활용 종이와 리필 제품을 사용하고, 쓰레기의 95%는 재활용한다. 작은 풍력발전기를 세워 전기를 자급하는 계획도 진행 중이다. 물론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100% 바이오디젤화’다. 아직은 넘어야 할 기술적 과제들이 있다.

환경을 생각하다 보니 택시기사들의 이미지도 중요했다. 과거 영국 관광객이 콘월의 택시기사들에게 받는 인상은 ‘청바지 차림, 줄담배, 무뚝뚝한 표정, 거친 운전’이었다. 바이오트래블은 모든 택시기사들에게 유니폼을 입히고 안전운행을 강조했다. 물론 운전 중에는 절대 금연이다. 바이오트래블에서 1년6개월 넘게 기사로 일해온 클리브 비숍은 “회사의 규칙이 엄격하지만 불만은 없다”며 “환경도 중요하지만 친절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익 일부는 열대우림 보호에

바이오트래블의 택시가 손님을 실어나르는 횟수는 한 해에 8만~10만 건 정도. 한 해 수익은 5억원쯤 된다. 수익의 일부는 ‘월드랜드트러스트’(World Land Trust)에 기부한다. 기부금은 오랑우탄을 보호하기 위해 열대우림을 사들이는 데 쓰인다. 지금까지 낸 기부금은 5에이커를 사는 금액 정도지만, 목표는 1천 에이커를 살 돈을 기부하는 것이다.

앤디 밀슨의 이야기다. “얼마 전에는 지속 가능한 대안으로 프랜차이즈를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받았다. 자연을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됐다. 더 많은 회사가 자연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적극적으로 환경을 생각하는 회사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 흐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 옆에 있던 팀 우프는 “죄책감에서 시작한 활동이지만, 이제 겨우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업활동을 하면서 느낀 죄책감과 환경에 대한 헌신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기업가에서 사회활동가로 서서히 변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GJP의 대표를 맡고 있는 더글러스 앰머. 빈민촌의 편부 가정 출신인 그는 변호사 자격을 땄음에도 자신과 아버지가 살았던 그 빈민촌으로 다시 돌아와 빈민들의 삶을 바꾸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다.

GJP의 대표를 맡고 있는 더글러스 앰머. 빈민촌의 편부 가정 출신인 그는 변호사 자격을 땄음에도 자신과 아버지가 살았던 그 빈민촌으로 다시 돌아와 빈민들의 삶을 바꾸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는 반대로 사회활동가에서 기업가로 바뀌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의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은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13년형을 받았다. 생계형 범죄임에도. 출옥 뒤에도 전과자라는 이유로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장발장은 밀리에르 신부의 은촛대까지 훔치게 됐다. 이것이 가난이 범죄로, 범죄가 가난으로 이어지는 ‘가난과 범죄의 사이클’이다. 만약 장발장에게 ‘변호사 친구’가 있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지아 저스티스 프로젝트’(GJP·Georgia Justice Project)는 바로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GJP의 사무실을 찾은 날은 섭씨 25도가 넘었다. 후덥지근했다. 애틀랜타 중심가의 마틴루서킹 기념관역을 나와 마틴루서킹 기념관을 지나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1~2층 규모의 낮고 오래된 건물들과 공터에 길게 자란 수풀,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애틀랜타의 흑인 비율은 40%를 넘는다고 한다. 커다란 컨테이너 같은 1층 건물에 GJP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20년 전 공장이었던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단다. GJP의 대표를 맡고 있는 더글러스 앰머를 만났다. 에모리대학 로스쿨 등 미국 최고의 로스쿨에서 인턴들을 받고, 코카콜라 등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GJP의 사무실이 이렇게 작다니. “더운데 고생했다”며 수박을 잘라주는 더글러스와 GJP는 그렇게 소박했다.

GJP 사무실의 중심에는 부엌이 있다. 웬 부엌이냐고? GJP의 서비스를 받는 이들은 가난하다. 범죄를 저질러 부모가 수감되면 아이들은 그대로 방치된다. 방치된 아이들은 범죄에 쉽게 빠져든다. 가난과 범죄의 대물림이다. 이럴 때 GJP가 개입한다. 부모가 교도소에 갇힌 아이들은 이 부엌에 와서 GJP 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숙제를 하고 밥을 먹는다. GJP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중시한다. GJP와 인연을 맺은 고객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이 된다.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중시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다. 법률과 생계 지원을 요청하는 이들 중 10% 정도만 혜택을 볼 수 있다.

부모 수감된 아이들 도와

더글러스는 “수혜자가 너무 적은 것은 아니냐”고 묻자 “우리의 이념을 이해시키고 고객과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분별한 확장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범죄자의 1~2년 사이 재범률은 70%에 이른다. 그러나 GJP 고객들의 재범률은 4~10년 동안 18% 정도에 머문다.

더글러스는 “알코올·마약 중독자들이 재범률이 높은데, GJP의 주요 고객들이 바로 이런 중독자들”이라며 “GJP는 이들을 면접한 뒤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이들을 택해 재활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물론 가장 기초적인 기준은 가난과 범죄의 사이클에 갇힌 이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범죄나 아동학대범 등은 변호 대상이 아니다.

더글러스는 변호사다. 변호사란 자격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23년 동안 GJP에 헌신하고 있을까? 더글러스는 그 자신이 가난의 고통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없었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이었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었다. 꾸준한 노력은 장학금으로 이어졌다. 로스쿨 진학도 무난히 성공했다. 1986년 여름 더글러스는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로스쿨에 진학하기 전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GJP를 준비하는 존 피킨스를 만난 것이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에서 일하던 더글러스는 자신의 임무는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임을 절감한다. 1년이 채 되지 않아 로펌을 그만두고 GJP를 찾았다. 상근직원이 됐다. 겨우 벗어난 가난이었는데, 자발적으로 가난으로 돌아왔다.

NHL의 한 직원이 조경사업 현장에서 일하다 기자들을 보고 환히 웃고 있다. 이 회사는 GJP가 전과자들의 안정적인 직장 마련을 위해 만든 회사로,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을 끊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NHL의 한 직원이 조경사업 현장에서 일하다 기자들을 보고 환히 웃고 있다. 이 회사는 GJP가 전과자들의 안정적인 직장 마련을 위해 만든 회사로,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을 끊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가난은 원래 제 자신이 있었던 곳이고 제 아버지가 있던 곳이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목표를 성취하려면 가난으로 다시 돌아와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립자인 존 피킨스는 1986년 GJP 설립 당시는 가난한 범죄자들을 위한 법률 서비스를 목표로 했다. 법률 서비스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일자리가 필요했다. 자원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들었다. 알코올·마약 중독을 치료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구직지원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샌프란시스코의 ‘랜시 스트리트’라는 기업을 알게 됐다. 전과가 있는 사람을 고용하는 기업이었다.”

더글러스는 일자리를 알선하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업이 필요했다. 취업 교육도 시키고, 스스로 지속 가능하게 경영도 되는. 1993년 ‘뉴호라이즌랜드스케이핑’(NHL)이란 조경회사를 세웠다. 16년의 업력이 쌓였다. 지금은 30여 명의 전과자 출신들이 100곳이 넘는 가정집과 콘도, 교회, 아파트 등의 조경을 맡고 있다. 하루 8시간씩 일주일에 나흘간 일하고 9달러의 시급을 받는다. 이렇게 23년을 지내면서 GJP는 변호사와 사회활동가, 그리고 조경회사 직원들이 뒤섞인 공간이 됐다.

주민들도 자발적 후원자로 나서

전과자 고용에 문제는 없을까? 더글러스는 “우리가 돕는 이들은 문맹이거나 교육 수준이 낮다. 쉽게 화내고 쉽게 싸운다. 술이나 약의 유혹에 다시 빠지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NHL을 시작한 이유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을 돕는다.”

오전 7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매일같이 지각하는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느라 바쁠 수밖에 없었다. GJP 활동가들은 어머니와 자녀들이 함께 아침 등교를 준비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 이후로 그 여성은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생활 방식까지 바꾼 것이다.

GJP는 여성들을 위해 제빵회사를 세우는 것을 준비 중이다. 조경 일은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이다. 조경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만나보려고 찾은 현장은 의사소통도 힘들 만큼 시끄럽고 거칠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특유의 사투리와 어눌한 발음은 이들이 겪어온 삶의 무게로 강하게 다가왔다.

GJP는 한발 더 나가 아직 시민단체 형태로 남아 있는 법률 서비스 부문과 사회활동 부문도 기업으로 바꾸는 준비를 하고 있다. 영속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반부터 본격화된 경제위기 때문에 기부금이 10% 정도 줄어든 현실적인 위기감도 있다. GJP는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기에 권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부 지원금은 거부하고 있다. 재단과 기업, 개인에게 받는 기부금으로 법률 지원과 사회활동에 필요한 예산을 충당해왔다.

애틀랜타의 중심에서 20년 넘게 꾸준한 활동을 펼친 덕분에 지역 주민들도 이제는 자발적인 후원자가 됐다. 지역 주민들은 ‘악순환 깨기’(Break the Circle) 운동의 회원으로 가입해 GJP의 활동을 돕는다.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을 깨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회원들은 원하는 금액을 후원금으로 낸다. 35달러의 기부금이 있으면 NHL 직원 한 명이 삽, 부츠, 장갑 등 기본 장비를 마련할 수 있다. 60달러면 한 학생의 책가방과 학용품을 지원해줄 수 있고, 100달러면 한 가족이 일주일 동안 쓸 수 있는 교통카드와 식료품카드(바우처)를 마련해줄 수 있다.

시민단체 형태로 운영하던 사회적 활동을 기업활동으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GJP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전환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념은 숭고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미국의 시민단체들은 이렇게 사회혁신기업으로 거듭나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콘월(영국)·애틀랜타(미국)= 글·사진 임다희 인턴기자 dahee9928@hotmail.com
함혜선 인턴기자 heysun14@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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