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책들이 산다. 매주 새로운 책들이 머물 곳을 찾아 들어온다. 서고는 일정한데, 책은 늘어난다. 찾는 이들이 없는 헌책들은 쓰레기장이나 창고로 가게 된다. 미국에는 이렇게 갈 곳 잃은 ‘고아 책’들을 새로운 주인에게 입양시키는 서점이 있다. ‘영혼이 있는 서점’ 베터월드북스(BWB·betterworldbooks.com)다. BWB는 미국 전역의 1600여 개 도서관과 대학에서 헌책과 헌 교과서를 기증받는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정가의 10~20% 가격에 새로운 주인을 찾아간다.
버려질 헌책들 싼값에 새 주인 찾아주기BWB의 본사가 있는 미국 애틀랜타로 향했다. 데이비드 머피 대표이사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은 기업 규모에 비해 너무 소박했다. 머피는 BWB의 시작부터 설명했다.
2002년의 바람 불고 어둡던 밤이었다.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졸업반이던 자비에르와 크리스는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닷컴 거품이 추락하고 있었고, 경제는 악화일로였다. 컴퓨터공학과 정보시스템을 전공한 이들에게는 암담한 미래였다. 그때 그들의 눈에 방 곳곳에 널려 있는 헌 교과서들이 들어왔다. “인터넷으로 팔아보자.” 여름방학이었지만, 교재들은 금방 팔려나갔다. 인터넷 헌책방의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문제는 더 많은 헌책을 찾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교에서도 해마다 봄이 되면 수많은 책을 내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교 인근의 지역 주민센터에는 그들에게 맞춤한 시설이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과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였다. 지역 주민센터의 책임자를 설득했다. “도박하는 셈치고 우리의 아이디어를 한번 도와달라.” 6개월 뒤 2천 권의 책을 모을 수 있었다. 수익은 1만달러(약 1200만원)에 이르렀다. 예상 이상의 성공이었다. 두 사람은 좀더 크게 도전하기로 했다. 사회(도서관)가 무료로 제공한 것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구조를 만들기로 했다. 문맹 퇴치를 위한 기금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노트러데임대학의 비즈니스 계획 경연대회에 도전했다. 결과는 최고상이었다. 7천달러의 상금에 대회 심사위원이던 데이비드 머피의 조언까지 받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머피에게 ‘조언 이상의 도움’을 원했다. 바로 최고경영자(CEO)를 맡아달라는. 크리스와 자비에르는 부사장을 맡겠다고 했다. 결국 머피는 2004년부터 이 회사를 이끌게 됐다.
경제적 가치와 환경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머피는 BWB가 세 가지 핵심 가치(Triple Bottom Line)를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Bottom Line’은 손익계산서의 맨 마지막 항목인 ‘세후손이익’을 지칭하는데, 기업이 창출한 경제적 가치로 통용된다. 사회혁신기업인 BWB는 기업으로서의 경제적 가치 창출뿐만 아니라 사회와 환경적 가치까지 동시에 추구한다는 말이었다.
“BWB는 기본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통해 이익을 창출한다. 버려질 헌책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싼값에 제공하는 것이 기본 임무다. 현재까지 2400만 권이 넘는 헌책들이 새 주인을 찾았다. BWB는 서점이라는 정체성에 맞는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후원한다. 처음 창립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문맹교육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교육 사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후원하는 단체는 80곳이 넘는다.” 후원단체는 처음에는 대부분 문맹교육 단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리카 내전에서 희생되는 소년병들을 지원하는 활동부터 교도소에 책보내는 활동까지 다양해 졌다.
BWB는 배송도 환경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땅덩이가 넓은 미국은 많은 트럭들이 여러 주들을 오간다. 이 중 절반은 화물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빈 차다. BWB는 이런 빈 차들을 찾아 헌책을 운반하는 계약을 맺었다. 어차피 움직여야 할 트럭을 이용하니 에너지도 절약하고 온실가스도 줄일 수 있다. 또한 지역 배송에는 우체국 서비스를 이용한다. 비록 배송 기간은 길어도, 가장 친환경적인 방법이다. 소비자들에게도 이익이다. BWB의 책은 배송비가 공짜다. 한국 등 어느 해외에서 주문해도 3달러97센트면 된다.
그래도 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BWB의 폴 샌슨 재무담당 이사는 “우리 회사도 수익을 증대시키는 한편, 판매와 유통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서도 “이익을 충분히 내야 하지만 사회적·환경적 목적과 충분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IBM과 시스코(CISCO)의 재무팀을 거친 샌슨은 2008년부터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돈도 벌면서, 사회와 환경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직을 결정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과 밤에 사회봉사 활동을 했는데, 이 회사에서는 일과 사회적 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이런 회사에 투자하는 이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 회사에 투자한 이들은 특별하다. 우리의 임무를 이해하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줄 수 있는 이들이다.” 단순한 기부자가 아니면서도, 그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눈앞의 투자이익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는 이들의 특성인 것 같다.
특별한 것은 투자자뿐만 아니다.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국 전역을 뒤흔든 경제위기에서 BWB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때 BWB는 특별한 일자리 나누기를 시행했다. 직원들이 먼저 자신들의 임금을 삭감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머피 사장과 샌슨 이사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경영진은 직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6개월 동안 임금을 삭감하기로 했다. 먼저 사장 임금부터 20% 줄였다. 부사장의 임금은 15% 삭감했다. 나머지 직원들은 10~5% 정도 삭감했다. 이를 통해 BWB는 40명분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직원들의 임금을 줄이기 전에 사회단체 지원금을 줄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 질문에 샌슨 이사는 “사회적 활동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BWB는 사회를 위해 만들어졌고, 사회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 중심 가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돈이 있을 때 돕다가 어려울 때는 줄여버릴 성격이 아니란 설명이었다.
창업 뒤 각종 사회단체에 600만달러 기부
BWB가 창립 이후 지금까지 사회적 활동에 쓴 돈은 600만달러가 넘었다. BWB의 매출은 2007년 기준으로 1600만달러(한국돈 190억원)라는 것을 감안하면 큰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순간 얼마 전 읽은 책 제목이 떠올랐다. 이라는.
BWB는 지난 5월 미국 경제주간지 가 선정한 ‘가장 유망한 사회혁신기업’ 부문에서 1위로 뽑혔다. 200개가 넘는 사회적 기업 중 36%의 득표율로 1위를 했다. 압도적인 지지였다.
수명이 다한 책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것이 BWB의 역할이라면, 이코(Eako)는 쓰레기에게 새 생명을 주는 회사다. 아름다움은 보너스다. 이코는 사용기한이 지난 소방호스로 패션소품들을 만든다. 가방, 벨트, 지갑 등등. 벌어들인 수익의 절반은 소방관을 위한 자선단체(Fire Fighters Charity)에 기부한다. 최근에는 커피 원두를 담았던 폐자루로 만든 장바구니도 신상품으로 내놓았다. 장바구니 하나당 10페니(약 200원)씩을 제3세계의 커피 생산 농민에게 기부한다.
비바람이 부는 날, 영국 남부 본머스 해안 마을에 위치한 이코를 찾았다. 창립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사업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커피 자루 장바구니는 영국의 대표적인 대형마트 세인즈버리에서 매주 2천 개씩 팔려나간다. 공동 설립자 제임스 헨릿과 크레스 웨스링을 만났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지만 영국은 매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땅에 묻어버린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두 사람이 소방호스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06년 한 환경 관련 회의에서였다. 웨스링은 “회의에 참석한 런던소방서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수명이 다한 소방호스가 가장 골칫거리라는 말을 들었다”며 “헨릿과 폐기되는 소방호스를 재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보자고 자연스레 뜻이 모아졌다”고 말했다.
포장재·상표까지도 모두 재활용 제품들길고 튼튼한 호스로 처음 만든 제품이 허리띠였다. 호스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길게 자른 뒤 버클만 달면 끝이었다. 허리띠는 지금도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얼마 전 미국의 영화배우 캐머런 디아즈도 이코의 소방호스 허리띠를 착용하고 잡지 화보를 찍었다. 제품은 가방, 휴대전화 케이스, 식기 받침 등으로 다양해졌다.
“소방호스는 고무 재질 사이에 섬유가 들어 있어서 튼튼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물에도 강하다. 한마디로 가죽보다 더 낫다.” 웨스링은 “갑자기 비가 내려도 우리 가방만 뒤집어쓰면 우산이 따로 필요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패션소품으로 되살아난 소방호스는 1천여 개에 달한다. 이제 이코는 런던뿐만 아니라 영국 전역의 폐소방호스를 모으고 있다.
이코는 100% 재활용품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이코의 제품이 담긴 상자는 버려진 신발 상자다. 신발가게에서 사람들이 버리고 간 상자들을 모아 쓴다. 버려진 신발 상자에 이코라고 적힌 상표를 붙이면 끝이다. 이코라는 이름이 새겨진 상표는 비행기 운항기록지를 재활용했다. 기다란 것이 딱 상표처럼 생겼다. 앞면에는 이코의 이름이 찍혀 있지만, 뒷면에는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벨트는 선글라스 상자에 담긴다. 제품의 모양을 잡아주는 충전재는 티백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종이를 이용한다. 재활용되는 물품은 낡은 작업복, 오래된 돛, 과일 상자, 커피 자루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그냥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담당자를 만나 설득해야 하고, 재활용품을 모아오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우리의 정책은 새 물건을 쓰지 않는 것이다. 100% 재활용한 소재를 이용해서 매립되는 쓰레기를 줄이고 싶다. 이제 이 목표는 거의 달성됐다.” 웨스링의 말이다.
소방호스를 이용해 만든 제품은 호스의 암진홍색을 그대로 띤다. 한 디자이너가 호스에 색을 입혀 다양한 디자인을 만들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웨스링은 단호히 거절했다. “우리는 환경이라는 가치를 우선으로 두고 시작했다. 호스에 색을 입히자면 화학성분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 다른 환경오염을 일으킨다.” 호스에 묻어 있는 기름때와 매연도 세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로만 닦아낸다.
재활용·기부·사업이 세가지 축누가 이코의 제품을 살까? 헨릿의 대답이다. “주로 환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 제품이 재활용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제품을 구매하지는 않는다. 제품이 튼튼하고 특이하다는 이유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이코 제품에는 재활용의 정신, 자선의 정신, 그리고 지킴이의 정신이 들어 있다. 과거 인명을 지켰던 소방호스가 재활용돼 소비자들의 물건을 지킨다. 내용물이 물에 젖지 않도록 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제품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를 사는 것이기도 하다.”
이코는 올해 25만파운드(약 5억원)가 넘는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 이들은 이코가 더 큰 기업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굳이 커져야 할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했다. 웨스링의 꿈은 ‘영국의 쓰레기 수집 여왕’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더 큰 기업이 되어 더 많은 쓰레기를 수집하는 것이다. 세계의 쓰레기를 수집하고 싶다. 우리가 커진다면 한국의 쓰레기도 수집해 재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을 지키고 수익을 기부하는 데 더 큰 효과를 내기 위해 커지고 싶다.”
그에게 사회혁신기업은 넓은 범위를 갖는 단어다. “과거 기업의 가치는 최대 수익을 주주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혁신기업은 다르다. 사회혁신기업이라면 보호와 구제, 문제점의 해결과 발전에 대한 가치를 다뤄야 한다. 이코의 존재 이유는 사업과 함께 사람과 환경을 생각하는 것에 있다.” 옆에 있던 헨릿이 덧붙였다. “이코는 재활용·기부·사업이라는 세 축으로 지탱된다. 자체적인 사업 모델이 되지 않으면 재활용과 기부를 실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업에만 집중한다면 우리의 목적이 없어진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한국에는 왜 BWB 같은 책방이 없을까
<font size="3"><font color="#006699">도서관이 책 내놓는 사례도 거의 없고 규정도 전무</font></font>
한국에는 베터월드북스(BWB·betterworldbooks.com) 같은 인터넷 헌책방이 왜 없을까? 이유가 궁금해졌다. 몇몇 국내 대학 도서관에 연락을 해보았다. 같은 책이 3권 이상이거나, 1~2년 이내에 대출이 한 번도 되지 않은 책들은 보존서고에 쌓아 보관한다고 했다. 책 상태가 좋지 않으면 폐기한다. 그렇게 쌓아두는 것보다 필요한 이들에게 넘기는 게 낫지 않을까.
실제로 연락해본 한 대학 도서관에서는 올해 초 겹치는 책들을 싼값에 학생들에게 파는 책 장터를 열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대학 도서관에서도 그런 행사를 다시 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다른 대학들은 ‘도서관의 재산’인 책을 내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한마디로 도서관의 책을 넘길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의 도서관들은 5년 이상 된 도서는 알아서 처분할 수 있게 하는 자체 규정이 있다. 그 덕에 도서관들은 오래되거나, 겹치거나, 사람들이 찾지 않은 책들을 기증하거나 팔 수 있다. BWB는 그런 미국의 도서관들에 최고의 파트너다. 도서관들이 BWB와 파트너를 맺으면, BWB는 기증받은 책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판매해 수익을 낸다. 잘 팔리지 않는 도서는 아마존닷컴 등 다른 상거래 사이트를 통해 판매한다. 그래도 안 팔리면 ‘5달러에 3권’ 식의 파격 세일을 감행한다. BWB는 수익의 10%를 책을 기부한 도서관 명의로 단체들에 기증한다. 도서관에도 수익금의 일부가 돌아간다. BWB가 판매와 기부를 모두 대행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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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미국)·런던(영국)=함혜선 인턴기자 heysun14@snu.ac.kr·임다희 인턴기자 dahee992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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