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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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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 보육’ 통해 워킹맘을 구하다


아이 아플 때 경륜있는 아줌마와 연결시켜 돌봐주는 일본의 사회적기업 ‘플로렌스’
등록 2009-05-26 18:06 수정 2020-05-03 04:25

(에이지21 펴냄). 저자는 일본인 고마자키 히로키(30). 일본에 출장 가기 사흘 전 기자는 이 책과 ‘만났다’. 사회를 바꾼다? 기업가가? 일본에서? 일본 근현대사에서 재벌로 상징되는 기업들의 역할을 안다면 당연한 의문이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은 사카모토 료마로 대표되는 하층 무사 계급들이었지만, 이를 완성한 것은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라는 ‘정상’(政商)들이었다. 일본 재벌은 이들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을 제국주의 군사의 길로 이끈 것도 군산복합의 한 축을 이룬 재벌들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군정이 가장 먼저 재벌 해체에 나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보 도쿄 신주쿠 외곽에 있는 플로렌스 사무실의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맞아주는 연핑크색 천사. 회사의 상징이다.

일보 도쿄 신주쿠 외곽에 있는 플로렌스 사무실의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맞아주는 연핑크색 천사. 회사의 상징이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한국전과 냉전을 거쳐 부활한다. 일본 재계는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 성향 정당들의 약진에 대응해 민주당과 자유당의 통합을 통한 보수세력의 결집을 이끌어낸다. 1955년 이뤄진 민주당과 자유당의 통합, 자유민주당의 탄생은 일본 정치의 영구적인 보수화를 낳았다. 이른바 ‘55년 체제’의 시작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기업들은 보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일본 사회를 바꾸겠다는 젊은 기업인

이런 척박한 환경에 새로운 기업이 뿌리를 내린다니. 책에 나와 있는 회사 인터넷 주소로 접속했다. 플로렌스(florence.or.jp). 고마자키 히로키 사장의 전자우편 주소가 나와 있었다.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답은 곧바로 왔다. 그와의 만남은 이렇게 ‘즉흥적’이었다. 하지만 물어볼 것들이 너무 많았다. 변화의 정체에 대해. 도쿄 신주쿠 외곽에 있는 플로렌스 사무실을 찾았다. 연핑크색 천사가 회사 상징이었다.

고마자키 사장은 웃는 표정이었다.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입니다. 일본을 바꾸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선진국들은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라는 현실에 처해 있는데, 여기에 사회보장 정책까지 파탄이 나고 있죠. 이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기업은, 전세계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웃는 표정으로 말하는 내용은 사뭇 담대하다. 그는 무엇을 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이를 키워본 부모는 알 것이다. 아이가 아플 때의 아픔을. 맞벌이해본 엄마는 알 것이다. 아픈 아이를 두고 출근해야 할 때의 마음을. 그런데 아픈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면? 일본에서는 정상 체온보다 1℃ 높은 37.5℃ 이상의 열만 있어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맡아주지 않는다. 질병에 대한 경계와 염려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독특함 때문이다. 플로렌스는 오갈 데 없는 ‘워킹맘’들의 아픈 아이들을 대신 맡아준다. ‘병아’ 보육이다. 아픈 아이들을 대신 맡아준다고 하얀 커튼과 소독약 냄새 가득한 시설과 마스크 쓴 간호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아이들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중년 아줌마들이 ‘어린이 구조대’로 활동한다. 아이들이 머무는 곳은 그 아줌마들의 집. 이런 일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때였어요. 운전 중인데 어머니의 전화가 왔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황당하게 해고된 이웃집 아줌마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쌍둥이 엄마였는데, 애들이 차례로 감기가 걸려서 일주일간 휴가를 냈대요.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근데 회사에서 근태 불량이라고 잘랐다는 거예요. 전 ‘뭐 그리 황당한 회사가 있어’라고 대꾸하고 끊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플로렌스의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고마자키 히로키 사장. 플로렌스 사무실 곳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플로렌스의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고마자키 히로키 사장. 플로렌스 사무실 곳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고마자키 사장 역시 맞벌이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부모님 댁으로 찾아가 ‘제가 아플 때는 누가 돌봐줬냐’고 여쭤봤죠. 그랬더니 ‘마쓰나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까먹을 수 있느냐.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 3층에 살았던 마쓰나가 아주머니가 감기 걸린 너를 늘 맡아주셨다’는 대답을 들었죠. 저도 어릴 적에 어린이집을 다녔지만 아플 때는 그 아주머니가 돌봐주신 거죠.”

고마자키 사장이 어릴 때는 마쓰나가 아줌마처럼 아이를 함께 키워주는 지역공동체가 있었다. 21세기의 도쿄에는 더 이상 그런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쌍둥이 엄마에게 ‘마쓰나가 아줌마’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해고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힘들게 일하는 부모에게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사회가 말이 되냐 싶더군요. 그럼 ‘내가 하겠다’는 각오가 생겼어요.”

질병에 대한 경계심 높은 일본 특성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육아와 보육을 병합한 미지의 영역 개척. 이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 회사의 목표와 명분은 정해졌으니, 이제 회사를 만들고 운영해야 할 차례다. 이때가 2004년.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병아 보육시설이 들어갈 건물을 구해야 했다. 지원금도 필요했다. 6개월 정도 헤맨 결과 도쿄 외곽의 빈 상가 건물을 임대할 수 있었다. 관할 구청의 복지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일은 늘 호사다마(好事多魔)인 법. 구청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이유는 구청장이었다. “그 구청장이 시민사회단체들과 오랜 세월 다툼이 많았더군요. 우리 회사를 시민사회단체로 본 거예요. 그러니 그런 골치 아픈 곳이 관할 구역 안에 들어설 수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거예요.” 사업에 매달린 이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던 여자친구도 돌연 절교를 선언했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새 출발은 바닥에서 시작된다. 구청장의 허가가 필요한 것은 별도의 시설 때문이다. 일정 수준의 의료시설과 보육시설을 동시에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려면 시설이 없으면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온라인을 통해 ‘마쓰나가 아줌마들’과 ‘쌍둥이 엄마들’을 연결해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상태가 나빠질 것을 대비해 인근 병원과 핫라인을 갖춘다면 의료적으로도 위험은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아픈 아이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 부모와 아이들을 맡아줄 연륜 있는 아줌마를 연결해주는 방식. 시설은 그 아줌마의 집이면 충분하다. 이른바 ‘비시설형’ 병아 보육의 시작이었다.

아이 맡기고 일에 몰두해 정규직됐다니 뿌듯

문제는 경제성이었다. 주변의 부모들에게 ‘이런 서비스에는 얼마나 비용을 지급할 의사가 있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다. 답변은 일반 베이비시터 수준에서 그다지 높지 않았다. ‘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수요에, 그 정도의 수익이라면 회사의 영속성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야동’(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야한 동영상’이 맞다)이 가져다줬다. 고마자키 사장은 “신용카드 청구서에서 야동 서비스를 무한대로 볼 수 있는 월정액 서비스(3천엔·한국돈 3만원) 내역이 눈에 확 들어왔다”며 “병아 보육이 필요한 부모들에게 월정액 서비스로 가입을 받아 필요할 때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이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그는 참 솔직한 청년이었다). 평소에 낸 돈으로 필요할 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보험 방식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가 2005년 2월이었다.

플로렌스 사무실의 풍경. 아이들과 기혼 부부, 주부들을 주대상으로 하는 회사 성격 때문인지 직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플로렌스 사무실의 풍경. 아이들과 기혼 부부, 주부들을 주대상으로 하는 회사 성격 때문인지 직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때마침 리쓰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을 갓 졸업한, 후루하시라는 청년이 합류했다. 이제 서비스를 알릴 때다. 이번엔 심포지엄을 수단으로 택했다. 육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생각을 알려나가기로 했다. ‘육아에 혁명을’이란 제목으로 개최한 심포지엄에는 150여 명이 참가했다. 이 중에 오카모토 요시미가 있었다. 그는 프리랜서 마케팅 컨설턴트였다. 그 전해 연봉은 1천만엔(약 1억원)이었다고 했다. 오카모토는 “아이가 아프면 일하는 엄마들은 죄인이 되어야 한다”며 “회사와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아픈 아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가진다”고 했다. 그는 플로렌스의 설립 정신에 동의해 연봉 1천만엔을 포기하고 같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2005년 4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처음 10세대가 서비스를 신청했다. 40세대가 채워졌을 때 신청을 마감했다. 마감 이후에도 신청은 계속 이어졌다. 많을 때는 250세대가 등록을 대기했다.

이런 ‘유별난’ 소식을 기자들이 놓칠 리 없다. 등 일본 4대 일간지와 〈NHK〉 〈TBS〉 등 공중파 방송들이 잇따라 보도했다. 변호사와 공무원, 대기업 인사과장 등이 회사를 돕는 ‘프로보노’(‘공익을 위하여’라는 의미의 라틴어 ‘pro bono publico’에서 온 말로,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익활동에 나서는 것을 뜻한다) 활동을 하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대학생들도 인턴을 하고 싶다고 몰렸다.

인턴 중 게이오대학 후배인 요시미쓰 가에코가 “취직을 하겠다”고 나섰다. 설립 첫해에 대졸 정식 사원을 뽑을 여력은 없다고 생각한 고마자키 사장은 이유를 물었다. 요시미쓰는 당시 “처음에는 대기업에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일해보니 내 머리로 생각하고, 사회를 위해 일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뭐에 홀렸는지, 같은 날 지바대학 물리학과에 재학 중이던 소코비키 가즈오도 사원으로 채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정작 고마자키 사장 본인은 명문 게이오대학까지 나와서 이름 없는 기업을 한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의절 선언을 들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플로렌스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들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때의 보람으로 일을 한다. “가장 기분 좋은 소식은 병아 보육 덕분에 안심하고 일에 몰두한 결과 정규사원으로 채용됐다는 엄마들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플로렌스 사무실에서 만난 요시미쓰는 “대학 동기들은 모두 높은 연봉을 받고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에 가지만, 나와 그들은 목적의식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며 “나는 인생에서 돈보다는 자신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 순간 요시미쓰 얼굴이 ‘똑순이’로 유명한 트로트 가수 장윤정처럼 보였다. 소코비키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그는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하니까 ‘다음 세대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할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며 “그런데 이런 활동을 해보니 ‘가르치기, 즉 전달만 해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일·대만 사회적 기업가 연대를”

고마자키 사장은 인터뷰 내내 유독 ‘변화’와 ‘연대’를 강조했다. 한국에 있는 희망제작소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정부의 지원 제도도 알고 있을 정도로 한국의 사회혁신기업(사회적 기업)에 대한 정보를 두루 알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를 물어봤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은 전쟁 이후 기적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룬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성공의 경험을 공유한 세 나라는 연대할 수 있는 충분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결론이다. “저는 일본을 조금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말씀드린 이유로 일본을 바꾸는 일은 세계를 바꾸는 일입니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의 사회혁신기업가들이 연대한다면 민간 중심의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연대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도쿄= 글·사진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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