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 ‘별다방’ 스타벅스의 고향이다. 시애틀 스타벅스 본사 3층에 가면 ‘메차카페’(Mezza Cafe)가 있다. 전형적인 ‘미국식’ 카페테리아다. 평범하다. 두 가지를 알면 확 달라진다. 먼저 스타벅스 본사에 입주해 있지만 스타벅스가 운영하지 않는다. ‘파이어니어 휴먼 서비시즈’(PHS·Pioneer Human Services)란 회사가 운영한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그냥 ‘알바’가 아니다. 전과자, 알코올중독자 그리고 노숙자 출신들이다. 물론 이젠 그 티를 깔끔히 벗었다. 이들에게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전과자·절도범이 새 삶 시작하는 훈련장“우리는 교도소 직업훈련 과정에서 전과자들을 고용합니다. 이곳에선 살인 전과자도, 은행 절도범도 일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훈련장이자, 변화를 유도하는 곳입니다.” PHS 계열사 파이어니어 식품의 릭 피니 부사장의 말이다.
PHS는 변호사 잭 달턴이 세웠다. 과거 잭 달턴은 술을 좋아했다. 알코올중독까지 됐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결국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 교도소에 수감됐다. 2년간의 교도소 생활은 그에게 큰 변화의 기회였다. 주변의 죄수들은 대부분 술과 범죄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교도소를 나온 달턴은 1963년 출소자들의 재활을 돕는 보금자리(파이어니어 펠로십 하우스)를 만들었다. 그는 출소자들의 모든 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했다. 대가를 치러야 그 귀중함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소자들은 이곳에 들어갈 돈조차 없었다. 달턴의 결론은 ‘일자리’였다. 사회혁신기업(사회적 기업) PHS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PHS에는 없는 것이 많다. 혁신적인 방향으로. 먼저 영세함이 없다. 선진적이다. 외부 지원이 없다. 스스로 충분한 돈을 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주가 없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 이윤을 배당금으로 주주에게 지급합니다. PHS도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PHS의 이윤은 주주 배당금이 아닌, 사회적 서비스와 자체 사업확장을 위해 재투자됩니다.”
샌디 깁 PHS 수석 부회장의 설명이다. ‘주주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영미계 주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그래도 잘나간다. PHS는 현재 크고 작은 계열사 10개를 운영하고 있다. 보잉사와 협력하고 있는 파이어니어 인더스트리즈, 파이어니어 택배, 파이어니어 식품, 파이어니어 건설, 메차카페 등이다. 2008년 PHS의 총매출은 6400만달러에 달했다.
PHS는 물론 대기업의 투자도 받는다. 1966년 세워진 파이어니어 인더스트리즈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세계적인 비행기 제조업체 보잉에서 자본을 투자받았다. ‘주주는 없다’는 원칙 때문에 가장 먼저 투자금을 상환했다. 스타벅스 본사의 메차카페도 마찬가지다. 1996년 스타벅스로부터 25만달러를 투자받아 세워졌다. 지금은 모든 투자자금을 상환했다. 매달 9만달러 이상의 매출도 올린다. 파이어니어가 연간 운영 비용의 99.7%를 자체 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는 배경이다.
이윤은 주주배당 대신 사회적 서비스 확대에무엇보다 PHS는 품질로 경쟁한다. 파이어니어 인더스트리즈는 2004년 경금속 제조에서 ISO-9002(국제품질보증시스템) 인증을 받았다. 파이어니어 택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6년 설립된 이 회사에는 현재 42명의 정직원이 일한다. 2008년 수익은 550만달러. 일본 유수의 전자업체 닌텐도와 미국의 대형 출판사 사스쿼치북 등 대기업들이 파이어니어 택배를 이용한다. PHS의 뜻도 훌륭하지만, 가격 경쟁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윤을 사업확장과 고용창출 그리고 최신설비 도입에만 씁니다. 이윤의 대부분을 주주들이 가져가는 다른 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죠.” 데이비드 랄슨 파이어니어 택배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자긍심이 묻어 났다. “물론 결론은 사회적 목적 달성입니다. 우리는 수익 창출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첫 번째 가치는 사회적 목적입니다. 우리 사업체들은 ‘패자부활의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때문에 PHS는 사업을 선정할 때 고용훈련이 될 수 있는 분야를 중시한다. 포장하고 배송하는 택배 업무나 식품사업은 많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단순노동이다.
“심지어 맥도널드만 해도 중학교 이상의 학력과 유창한 영어 실력을 요구합니다. 실제 일은 더 단순한데 말이죠.” 랄슨 사장의 설명이다. 파이어니어 택배 직원의 평균 학력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영어가 서툴거나 알코올중독에 빠진 이들이 90%에 이른다. 직원들은 여기서 일하며 기술과 영어를 새로 배운다.
“사실 이들은 사회적 편견보다 성실성이 없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하는 것이 어려워 해고되는 거죠. 우리는 직업훈련을 행동치료와 병행해 이 문제를 치료합니다.” 파이어니어 택배의 관리직은 대부분 훈련생부터 시작한 자체 승진자다. 여기에서 가능성이 인정되면 파이어니어 인더스트리즈나 다른 외부 업체로 이직한다. 사원 교육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랄슨 사장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지 않냐”고 되물었다.
PHS가 번 돈은 재투자 이외에는 사회적 서비스를 위해 쓰인다. 주택사업과 치료사업이 핵심이다. 알코올중독자와 전과자,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재활 기간에 살 집을 빌려준다. 임대주택에 사는 동안 이들은 알코올치료센터와 행동치료센터, 정신치료센터 등에서 치료를 받는다. 단, 앞서 밝힌 대로 저렴하기는 하지만 ‘공짜’는 없다. PHS의 여러 사업장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기 힘든 이들은 보조금을 줄 수 있는 정부나 재단과 연결해준다. 일할 수도 없고 보조금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우선 치료부터 해주기도 한다.
“재활 의지만 확인되면 먼저 치료하고 나중에 비용을 청구합니다. PHS는 이들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PHS에서 30년을 근무한 행동치료소 소장 주디 홀먼의 말이다.
행동치료소의 최근작은 ‘소버링 유니언 하우스’다. 술 취한 사람들을 위한 잠자리다. 밤이면 도심으로 나가 술에 취해 길에서 자는 노숙자와 청소년들을 데려온다. 최장 12시간까지 이곳에서 자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PHS는 잠에서 깬 이들에게 치료를 권유한다. “대부분 본인들도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다만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아 다시 술병을 쥐게 되는 거죠.” 홀먼 소장의 말이다.
정부주관 교정사업 수료자보다 재범률 낮아PHS의 도움을 받은 이들은 연간 1만2천여 명에 달한다. 워싱턴주립대학의 연구 결과, PHS를 거친 이들의 2년 이내 재범률은 6.4%였다. 정부가 하는 교정사업 참가자들의 재범률이 23%였다. 2006년에는 PHS의 전 사업장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알코올·약물 테스트를 한 결과 1.1%만이 양성반응이 나왔다. 미국 내 보통 사업장의 경우 4.3% 정도의 양성반응이 나타난다고 한다.
PHS의 경영진에는 다양한 고급 두뇌가 일하고 있다. 박사 출신들도 많고, 다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출신들도 있다. 팀 하로 PHS 수석 부회장도 시애틀의 중견 제조업체 사장 출신이다.
“이곳에서 저의 숨겨진 열정을 재발견했습니다. 저는 회사 분위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모두들 열정적이고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PHS의 임금은 다른 기업체에 비해서도 낮지 않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회사의 목적과 수평적인 사내 분위기에 끌려 이곳으로 몰려든다.
PHS 직원들의 명함은 특별하다. 명함에는 주거, 치료, 일자리 등 PHS 각 부서와 계열사의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다. 직원들은 길에서 만난 노숙자들에게 명함을 건넨다. 거리의 노숙자들은 PHS의 고객이자 미래의 직원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기업이 사회혁신기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주주 자본주의를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기업 간의 균형입니다. 길거리에 나앉은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불균형한 구조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균형을 되찾으려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팀 하로 수석 부회장의 표정은 참 맑아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영국 런던에도 있었다. 노숙자 잡지 의 창립자 고든 로딕이다. 로딕은 입버릇처럼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면, 당신 스스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991년 미국 뉴욕 시내를 걷던 로딕은 라는 노숙인 잡지를 읽고 무릎을 쳤다. 런던 시내에 늘어가던 노숙인들이 늘 눈에 밟혀 힘들었던 그였다. 그는 출판 쪽에 경험이 많은 존 버드와 손잡고 곧바로 노숙인 잡지 창간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사업 경험을 최대한 살렸다. 참, 고든 로딕은 세계적인 친환경 화장품 업체인 ‘보디숍’의 공동 창업자다.
의 판매 방식은 간단하다. 먼저, 노숙자만 잡지를 팔 수 있다. 의 훈련 프로그램을 거친 노숙자들은 ‘벤더’라고 불린다. 서점이나 가판대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1991년 10월, 런던에 창간호가 첫선을 보였다. 첫 벤더는 10명이었다. 1993년 주간지로 탈바꿈하면서 현재와 같은 방식을 완성했다.
벤더로 처음 일하는 노숙자는 주간지 5부를 공짜로 받는다. 판매 가격은 1부당 1파운드50펜스(약 3천원)다. 벤더는 5부를 팔아 번 돈으로 그 다음주에 를 유료로 사야 한다. 벤더에게는 1부당 70펜스에 판매된다. 벤더는 이를 독자에게 1파운드50펜스에 팔아 1부당 80펜스를 남긴다.
매주 월요일 본사는 에인절, 킹스크로스, 리버풀, 빅토리아, 옥스퍼드, 코벤트가든 등 6개 중간 배포 지점에 잡지를 배달한다. 노숙자 벤더들은 여기에서 를 원가에 사서 자신들이 정한 거리에서 판매한다.
로열오페라하우스 옆의 코벤트가든에서 중간 배포를 담당하는 사만다 우드록(42)을 만났다. 투박하지만 눈매가 푸근한 중년 여성이었다. 그는 자신을 ‘샘 아줌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웃는 표정이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거리의 삶을 살았던 사람 특유의 강인함이 살아서. 샘 아줌마는 코벤트가든 주변의 벤더들에게 를 판매하고 있다. 그는 10여 년 전 남편의 폭력 때문에 집을 나왔다. 돈 한 푼 없이 집을 나온 그는 하루아침에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춥고 고단한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술과 약뿐이었다. 구걸을 하고, 그 돈으로 술과 마약을 샀다. 추위로 약해친 체력 탓에 노숙자쉼터를 찾았다. 사정이 더 나빴다. 질이 나쁜 노숙자들은 다른 이들이 구걸한 돈을 빼앗았다. 1998년 한겨울, 쉼터에서 만난 친구에게서 “노숙자들만 팔 수 있는 잡지가 있는데, 한 부를 팔 때마다 80펜스를 번다”라는 말을 들었다. 샘 아줌마는 친구를 따라 본사가 있는 복스홀을 찾았다. 그리고 11년이 지났다.
노숙자에 의해 판매되는 노숙자를 위한 잡지샘 아줌마는 최고참 벤더다. 보통 하루에 60부를 판다. 매주 자신을 찾는 20명 정도의 단골도 있다. 게다가 그는 다른 벤더들에게 를 판매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의 하루 수입은 30파운드(약 6만원)에 이른다. 샘 아줌마는 더 이상 차가운 길바닥에서 떨지 않아도 된다. 집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도 돈을 벌면 모두 음식을 샀다. 그러나 쪽의 권유로 통장을 개설하고 돈을 모았다. 돈을 모으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그는 처음으로 월세를 구할 수 있었다. 샘 아줌마는 이 집에서 3남2녀를 키웠다. 맏이는 26살, 막내는 6살이다. 자녀 5명 중 2명이 이제 취업을 해서 어머니의 살림살이를 도와준다. 처음엔 자녀들 이야기를 꺼내기 조심스러워한 그였지만, “한 명은 학교 선생님이고, 다른 한 명은 인정받는 기술자야”라고 말할 때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졌다.
그 역시 늦깎이 대학생이다. 에 노숙인 문제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노숙인 문제에 사회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장학금을 받을 기회가 왔다. 현재는 영국 유펜대학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를 팔고, 이후부터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주경야독’이다.
샘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벤더 몇 명이 찾아왔다. 를 25부 사가는 이도 있었지만, 달랑 3부만 사는 이도 있었다. “저 친구(3부만 사간 벤더)는 벌써 2년6개월째 벤더 일을 하고 있어. 술과 음식 살 돈만 있으면 된다고 매주 3부밖에 안 사.” 를 판매하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거리의 삶에서 벗어나려 할 때 그 기회를 줄 수 있을 뿐. 의 경영 방침도 그러하다. 벤더들은 의 직원이 아니다. 자활의 기회만 주는 것이다. 벤더들이 사간 도 ‘반품’은 없다.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원칙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원칙의 반복을 통해 노숙자들은 스스로 일어설 의지와 기회를 얻는다.
의 창업자 고든 로딕의 부인 애니타 로딕은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돈은 내게 아무것도 못 된다. 가장 나쁜 것은 돈을 모아 쌓아두려는 탐욕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애니타 로딕은 남편 고든과 함께 보디숍을 창업했다. 애니타 로딕은 2007년 사망 당시 5100만파운드(약 1천억원)의 재산을 모두 자선재단인 로딕재단에 넘겼다. 두 자녀에게는 한 푼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샘 아줌마는 “가장 행복한 일이 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 그래, 희망은 전염된다. 수천억원대의 부자든, 거리의 노숙자든 나누려는 의지만 있으면.
시애틀(미국)·런던(영국)=이미선 인턴기자 i79610@hanmail.net·최수진 인턴기자 sujin121@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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