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청춘에 대한 따뜻한 수다가 있었다. 배우 김여진의 ‘청춘의 행복’. 아름답고 따뜻한 봄날 저녁에 서울 마포구 서강대 곤자가홀에서 열린 ‘제8회 인터뷰 특강’ 강연장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려고 발걸음한 것일까? 나는 왜 전남 무안에서 장장 5시간의 여정을 거쳐 여기에 와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배우 김여진은 드라마 에서 장금을 가르치던 선생의 모습이다. 극중 그는 똑 부러지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였다. 멋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얼마 전 뉴스에서 그 이름을 다시 보았다. 대학생 연합 학술 동아리 ‘자본주의연구회’ 학생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되자 학생들을 만나려고, 강제 연행에 항의하려고 서울 구로경찰서를 찾았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읽으며 나는 김여진과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인 배우 수잔 서랜던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김용민(사회자): 배우 김여진은 지금의 청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여진: 미안한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도 어쩌겠느냐 싶은 마음, 두 가지. 청년 세대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선 앞선 세대인 내가 미안하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는 청춘 여러분이다. 상황을 탓하지 말고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김용민: 북한 어린이 돕기, 홍익대 청소노동자 돕기, 등록금 투쟁을 지지하는 발언 등을 했다.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많이 내면 연예 활동에 별 도움을 못 받을 거라는 염려도 있을 텐데.
김여진: 두 가지 말을 듣는다. 연예인이 그렇게 사회활동을 해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걱정 반, 영화나 드라마 홍보를 위해 홍익대 노동자를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 반이다. 어제(4월10일) 드라마 에서 죽었다. 원래 1인 2역인데, 빨리 죽으니까 외압설이 아니냐는 말도 있더라. (좌중 폭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더 인기가 있다면, 조금만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면 홍익대 청소노동자분들에게 더 도움이 됐을 텐데 하는…. 그래도 (막상 행동에 나서니) 생각보다 반응이 컸다. 이럴 때는 내가 공인이라는 게 좋다.
사회자와 크고 작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은 뒤 강연이 시작됐다. 김여진이 말하는 강연 제목은 “나 이러고 살았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보여줘, 후배 청춘들이 조금 더 용기를 갖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줬다.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91학번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평범한 학생이던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찾아온다. 1991년 학원자주화 투쟁에 가담한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 구타치사 사건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분신 정국이 그것이다. 박승희, 천세용, 김귀정 등 많은 슬픈 이름을 기억하는 90년대 학번들. “어떻게 나랑 같은 나이의 아이가, 어떻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대낮에, 그것도 경찰한테 맞아 죽었을까.” 대학생 김여진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가장 강성인 곳에 들어가 철거 지역에서 공부방 활동을 하고 용역 깡패가 들어오면 맞서 싸웠다.
학창 시절을 ‘운동권’으로 보내고 졸업을 했다. 잡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상태였다. 특별히 무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우연히 서울 대학로에 나가 연극 를 보았다. 연기자의 표정이나 호흡을 직접 느낀다는 게 새롭고 신선했다. 연극이 끝난 뒤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저걸 해야겠다’ 생각했다. 집에 가라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김여진은 “포스터를 붙여주겠다. 단원으로 입단시켜달라”고 말했다. “다음날 다시 오라더라. 그러면 보통 사람은 안 오는데 나는 갔다. 어차피 달리 할 게 없었으니까. (웃음)”
극단에서 일하며 같은 공연을 100번쯤 봤다. 그러다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여주인공이 펑크를 낸다. 극단 대표가 불렀다. “너 대사 다 외우지?” 김여진은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었다. 대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공연장 불을 꺼버릴 테니 무작정 올라가보란다. 공연을 했고, 박수를 받았다. ‘슈퍼탤런트대회’에 입상해 무대를 떠난 원래 여주인공 대신 김여진이 공연을 맡아 하게 됐다. 700여 번 무대에 오르며 같은 공연을 1년을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연기를 그렇게 혼자 배웠다.
연극 를 공연할 때였다. 김여진은 마네킹 역할을 맡았다. 최대한 안 보여야 하는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1시간20분 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임상수 감독이 연극을 보러 왔다가 마네킹 김여진을 발견했다. 영화 의 세 여주인공 중 한 역할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김여진은 연극을 하며 충분히 행복했다. 벌이가 시원찮아 밥은 극단에서 해결하고 때로는 신촌의 집과 대학로 극단 사이를 걸어서 출퇴근을 했지만 그는 좋았다. 영화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걸 거절했다. 모든 스태프가 건방지다며 그를 캐스팅하는 데 반대했단다. 그런데 오히려 그 모습이 인물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는지, 감독이 그를 선택했다.
영화를 시작하고 수입이 늘었다. 상도 많이 받았다. 길을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른 이와 자신을 비교하며 남이 가진 것을 자신이 못 가질 때 화가 났다.
그렇게 지내다가 드라마 을 촬영하며 구호단체 JTS(Join Together Society), 드라마 촬영팀과 함께 봉사활동에 나서게 됐다. 먹고살 방법이 아득한 사람들의 삶에 다가설수록 자신의 고민과 갈등, 욕심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른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손 내밀어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는 단식을 해보며 굶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써보기도 했다. 욕심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일에 자기 삶의 조각을 나누며 그는 다시, 예전에 연극을 할 때처럼 행복한 감정을 품을 수 있게 됐다.
청중1: 3년차 교사다. 26살인데, 청춘은 또한 연애의 시절이지 않은가. 요즘 소개팅을 많이 하는데 잘 모르겠다. 재미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게 아니라 조건과 조건이 만나는 거 같고.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김여진: 연애라면 따로 강연을 잡아야 할 텐데. (웃음) 선택이 안 된다는 것, 욕심 때문 아닐까. 돈도 많고 마음씨도 좋고 얼굴도 잘생기고 나와 성격도 잘 맞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아닌지. 선택이 잘 안 될 때는, 내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된다. 둘 다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 것, 무엇을 선택하고 거기에 따르는 무언가를 책임지면 된다.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청중2: 기성세대로서 청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김여진: 여러분 뒤에는 ‘시간’이라는 사자가 쫓아오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생이 뭔지 몰라서 겪게 되는 ‘두려움’이라는 호랑이가 쫓아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묻는 청춘에게 나는 말한다. 저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저 아래 물이 있으니 수영을 해서 살아나라. 수영을 할 줄 모르더라도 뛰어들어라, 그러다 보면 방법을 깨칠 것이다. 어찌됐든 한 발짝 나서보는 것이 중요하다. 무서워서 힘만 꽉 주고 바둥거리다 보면 물에 가라앉게 마련이다. 청춘의 시절을 지나신 분들도 여태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으로 젊은 사람들을 재단하려 들지 말고, 굳이 가르치려 들지 말고, 좋은 시범만 보이면 좋겠다.
여러 질문을 더 주고받으며 그가 일관되게 강조한 메시지는 “고민하지 말고 뛰어들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근사해 보이려고 아등바등 경쟁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할 것인가. 나는 지금 조건 없이 무조건 행복하기를 선택했고 여러분도 그러시길 바란다.”
글 김은숙 21기 독자편집위원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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