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8일 예정된 강의 시작 시각 저녁 7시가 다 돼서도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홍구 교수는 역사학자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에서 사느라 늘 지각을 한다.” (모두 웃음) 그 빈 시간을 사회자 서해성 작가의 넉살로 대신하고 있을 무렵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그가 등장했다. 오늘의 주제 ‘선택’에 관해 입을 열었다. 김일성을 전공으로 선택한 위험한 역자학자, 평소 절친인 서해성 작가가 사회를 맡은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잘못된 선택’인 인터뷰 특강을 그는 선택에 관한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선택, 우리 마음 안에”한홍구: 역사적 선택에서 중요한 점은 선택의 주체다. 요즘 주어가 중요하지 않으냐. (웃음) 누가 선택한지도 모른 채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1910년 나라를 빼앗겼다. 그것은 누구의 선택이었는가. 역사는 길게 보면 타인이 침해한 내 선택권의 권한을 되찾는 과정으로 발전해왔다. 이명박 정권의 선택 또한 4년이 지나 권한을 찾을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사진을 하나씩 보며 대한민국의 역사적 선택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font color="#C21A1A">안중근</font> 개인적으로 그를 ‘위대한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싶다. 안중근의 위대함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동양평화론?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동양평화론과 뭐가 다른가. 안중근의 위대함은 그의 선택에서 비롯됐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일선 암살조가 아니었다. 그는 2선에 배치돼 있었다. 1선 암살조는 기차가 정차하지 않고 지나치는 바람에 암살에 실패했다. 그리고 선택은 안중근의 몫이 되었다. 1선에서 암살에 성공했다면 기차는 하얼빈역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선택의 순간이란 것을.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총알이 빗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자신의 선택을 완성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번이나 방아쇠를 당겼고 명중시켰다. 그 누구보다 건강한 근육을 가진 청년이었다.
<font color="#C21A1A">광주 민주항쟁</font> 선택이 어려운 점은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벌건 대낮에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기 시작한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1980년 광주에서 선택의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총을 들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선택이었다. 독재자 전두환의 정규군과 대치한다는 건 목숨을 건 싸움이기도 했다. 대치 상황이 길어지고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도래했다. 총기 회수를 하고 투항하는 게 올바른 선택일까. 실질적으로 게임은 끝났다. 화력으로 보나 뭘로 보나 정예군과의 대립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26일 오후를 지나 27일 새벽까지 도청에 남은 400여 명의 시민군이 진압됐다. 역사에서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기냥’(그냥)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냥 남은 것이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이 웃으며 들어오는 그 꼴을 못 보는 이들이 남은 것이었다.
역사는 수많은 선택의 총합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선택이 복잡한가? 길이 많아 보이는가? 사실은 길이 복잡한 게 아니라 마음이 복잡한 것이다. 목적지만 분명하다면 길은 결국 다 통하기 마련이다. 선택이 어려운 건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 순간 복잡해진다. 문제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순간, 저들의 선택에 의해 우리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우리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선택은 간단하다. 가장 중요한 선택, 우리 마음 안에 있다.
“친일 청산을 자본독재 청산으로”
청중1: 교사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적으로 자랑스러운 것을 물어보면 더글러스 맥아더를 꼽는다. 더불어 가고 싶은 여행지도 미국인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홍구: 맥아더 장군에 대해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와 나의 논문은 결론이 좀 달랐다. 강 교수는 결론적으로 동상을 때려부숴야 한다는 것이었고, 나의 결론은 동상을 보고 숨이 막힌다는 것이었다. 맥아더 동상은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부끄러운 거다. 역사에서 아이들이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
청중2: 샤를 드골의 집권 이후 나치협력자 8천 명 이상을 처형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외세에 의한 해방으로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친일 청산의 가능성은 있는가.
한홍구: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성은 없다. 이미 끝난 게임이다. 그러나 독재 청산은 가능하다. 나아가 현재는 자본 독재를 막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 이제 와서 부관참시하고 친일사전을 만든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의미 없다는 게 아니라 시대적 과제가 변했다는 뜻이다. 분하고 억울하고 아쉽지만, 시대가 변했다. 고종황제가 생존했다면 해방 이후 8천 명을 처형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인도는 영국에 200년 동안 식민지배를 당했다. 그러나 인도 내에서 친영파 청산에 관해 들어본 적 있는가. 8천 명 규모의 청산은 당대 지식인들의 전멸을 의미한다. 그들이 지닌 교육과 재능을 세탁해서 국가가 이용할 필요도 있다. 본의 아니게 일제시대를 살아간 이들도 존재한다. 도덕적 교화를 통해 무장해제할 필요가 있다. 친일에만 매달리면 안 된다. 이근안이 친일파인가? 시대적 과제가 변했고, 그것에 대응해야 한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친일 청산은 군사 독재 청산과 자본 독재 청산으로 대신해야 한다.
청중3: 60대인데도 투표를 해서 재미를 본 적이 별로 없다. 한국 사회의 반복되는 실패와 절망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한홍구: 역사를 보며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민중을 지배하려는 저들은 얼마나 힘들까. 축구 경기로 보면, 우리는 100 대 0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모든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4·19는 일어났다. 유신으로 눌렀지만 광주항쟁이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졌다. 이른바 ‘7년 주기설’로, 7년마다 한국 사회가 변한다고 해서 내가 만든 이론이다. (웃음) 그렇게 잡초처럼 일어났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처럼 100년 이상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나. 단 7년 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역사에서 민중이 당한 것만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여기까지 발전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지금 우리가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지 않나. (웃음)
정수장학회 사태 알리려 트윗 시작
한홍구 교수는 최근 자신의 불가피한 선택에 관한 짧은 언급으로 특강을 마무리했다. 정확히 50년 전 어제(3월27일)부터 시작된 정수장학회 사태에 관해 아무도 책을 쓰지 않아 자신이 직접 뛰어들기로 했고, 그것 때문에 뒤늦게 트윗질까지 시작하게 되었단다. 때론 자의가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 존재한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다며 불평하는 그의 얼굴에 넉넉한 웃음이 가득했다.
이정주 제23기 독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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