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망명객.’ 3월20일 인터뷰 특강 셋쨋날, 사회를 맡은 소설가 서해성씨는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를 이렇게 소개했다. 홍 대표가 망명지 프랑스에서 영구 귀국하고도 한국 사회와 비판적 거리를 잃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홍 대표가 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 구실을 한다는 의미다.
그는 홍 대표를 ‘몸으로 풍기는 인격을 갖춘 선비’라고도 칭했다. 질투가 날 정도로 존경스럽다고도 했다. 강연에서 만난 홍 대표는 사회자의 표현 그대로였다. 그의 ‘몸’에서는 오랫동안 수신(修身)을 실천한 인간의 품위가 흘러넘쳤다.
그런 사람이 정치판의 한가운데에 섰다. 망명객에서 언론인이 됐다가, ‘진짜 진보정당’의 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거창한 이유를 대지 않았다. ‘민중이 주인 되는’ 운운하지도 않았다. 대신 ‘끝없는 패배’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 번째 개똥을 덜 먹으려는 선택”
홍세화: 외조부가 어릴 때 해주신 이야기다. 삼형제가 한 서당에 다녔다. 훈장이 셋에게 장차 꿈을 물었다. 맏형은 정승, 둘째는 장군이라고 답했다. 흐뭇해하는 스승에게 막내는 어이없게 “개똥 3개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나는 나보다도 책 읽기 싫어하는 맏형 입에, 다른 하나는 겁 많은 둘째형 입에 넣어주고 싶다”고 이유를 댔다. 외조부는 내게 물으셨다. “마지막 개똥은 누구 입에 들어갈 것 같으냐?” 나는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런 대답을 듣고도 좋아한 훈장이죠.” 정답이었다. 외조부는 여기에 한 말씀을 더하셨다. “세화야,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앞으로 네가 그 말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개똥은 네 몫이다.” 어릴 때 들은 이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 삶은 어떻게든 ‘세 번째 개똥’을 적게 먹으려 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간 것은 단지 영어보다 수학을 잘해서였다. (웃음) 거기서 선배를 치명적으로 ‘잘못 만난 게’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국현대사의 굴레를 알게 됐고, 그동안의 가치관이 완전히 붕괴됐다.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봐서 외교학과에 들어갔다. 한반도의 분단과 세계 평화 등에 관심 있어 내린 선택이었지만, 외교학과는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또 잘못 왔구나’ 한탄했다. (웃음) 그만둘 수는 없어 동아리 활동에 주력했다. 시인 김지하와 연출가 임진택 등을 그때 만났다. 1972년 유신체제를 겨눈 ‘민주수호선언문’을 쓴 건 그전 해에 위수령이 발동돼 주동 학생들이 군대 등으로 모두 끌려가서였다. 대학이 조용해지니까 왠지 이상했다. 상황 때문에 억지로 침전되는 걸 견디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운동과 계속 관계를 맺었다. 암울함에 대한 저항, 삶의 의미에 대한 자기 확인이 필요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다 발령지 파리에 나가고 몇 달 뒤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조직의 말단이었다. 삐라를 뿌리는 정도의 일밖에 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지하조직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유럽에까지 조직원을 보냈다고도 했다.(웃음) 프랑스의 망명 신청 심사관이 “삐라를 뿌린 게 뭐가 문제인가”라고 되물었을 때 비애를 느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화”
사실 나는 상당히 심약한 사람이다. TV 토론에 나가도 말을 잘 못한다. (웃음) 데모할 때도 앞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내면의 요구는 강했다.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실존적 선택을 요구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나는 실존주의에 좀더 기운 편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자유를 지향하게 돼 있다. 중요한 것은 참 자유인은 ‘자발적 복종’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노예 상태가 아닌지 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 사회는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욕망’을 매개로 시민을 철두철미하게 자발적 복종으로 내몰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생존의 문제가 걸린 탓이다. 그러나 현실의 제약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아실현을 위한 모색을 멈춰서는 안 된다. 생존의 절박함 때문에 한시적으로 유보할 수는 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오래 유지하려면 유보도 때로는 필요한 선택이다. 그렇더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한 번뿐인 내 삶보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 삶의 최종 평가자는 오직 여러분 자신이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자유인이 되려는 사람의 운명은 굴러 떨어지는 돌을 끊임없이 밀어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와 유사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패배‘다. 그러나 자유인은 패배했다고 해서 주저앉지 않는다. 그냥 끝없이 도전할 뿐이다. 끝없는 패배를 견디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지나친 원칙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지적은 사실 좀 섭섭하다. 나는 대단한 원칙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나와 현실 사이에서 긴장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뿐이다. 진보신당에 남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념과 가치 지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현실’을 이유로 뭉치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봤다. (통합진보당으로 옮아간) 그들의 선택을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했다. 남은 1만 명 이상의 당원들이 흩어지는 것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이 오르기 싫은 무대에 올랐지만 선택을 했으니 최선을 다하겠다.
청중1: 현실에 대한 인식은 있지만, 행동이 두려워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사회에 필요한가.
홍세화: 그런 고민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박수)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어떤 시점에서는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겠지만, 반드시 온몸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을 못하겠으니까 아예 접자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청중2: 요즘 아이들은 입시에 치여 자아실현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도 찾기 어렵다. 방법이 없을까.
홍세화: 우리 아이들은 과보호 상태다. 아이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여행을 보낸다든지 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계획을 짜는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 연습이다. 글을 써봐야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
청중3: 프랑스에 남았으면 삶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굳이 한국에 돌아온 이유는.
홍세화: 마르크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화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밑바탕은 언어다. 내 모국어는 한국어고, 결국 나는 한국 사회에 속한 사람이다. 내가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곳은 이 땅이다. (박수)
“사랑과 우정을 전하고 싶다”
홍세화 대표는 강연을 통해 한국 사회를 앞서 살아간 선배로서 사랑과 우정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강연장을 가득 메운 300여 명의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홍 대표는 프랑스의 국민 샹송 과 한국의 트로트 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얼굴은 귀밑까지 빨개졌지만,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청중은 그가 나눠준 행복 한 조각씩을 가슴에 품고 헤어졌다.
김성진 제22기 독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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