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봄날이었다. 서울에는 ‘20년 만에 가장 늦은 눈’이 내렸다. “날씨 때문에 손이 다 곱았다”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도 추워 보였다. 그의 첫마디는 “가능하다면 인권운동도 ‘새로고침’하고 싶다”였다. 동생 박래전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인권운동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그는 ‘내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담담히 진술하는 형식으로 인권과 삶의 연관성을 풀어갔다.
그가 먼저 떠올린 것은 2000년 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촉구하며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벌인 ‘혹한기 거리 단식농성’이었다. “처음 인권위를 설립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몇 번이나 고꾸라지고 번복되면서 종국에는 인권위 설립 논의 자체가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이를 막기 위해 단식농성을 했다.” 그의 회고는 2004년 국가보안법 철폐 농성으로 이어졌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만 두고 본다면 국가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법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의 뿌리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이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언론·표현의 자유나 자유민주주의는 언제든 질식당할 수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2006년 경기도 평택 대추리 투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에선 “걷기 힘들 정도로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내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저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삶과 이웃 간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온당한가.” 듣고 보니 대추리가 끝이 아니었다. 지금도 제주 강정마을에서는 마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에 대한 그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가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 화면의 사진 속에선 시뻘건 화마가 컨테이너를 집어삼키고 있었고, 무장한 사내들이 도장공장 옥상에 웅크린 노동자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렀다. 공안 논리 앞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약자들의 목소리는 처절하게 짓밟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도처에 있다. 자살자 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둔감해진 사람들은 경쟁에서 도태될까봐 두려운 나머지 함께하기보다는 나만 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참담한 현실을 넘어선다는 게 가당한 일이기나 할까. 하지만 그는 낙관했다. 그가 희망을 거는 것은 ‘연대의 힘’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연대해야 한다. 절망이 깊을 때일수록 더 그렇다.” 그는 이 연대가 ‘인권 감수성’의 토대 위에 마련될 수 있다고 보는 듯했다. “인권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그 역할이 수시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잘 살려면 인권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남이 피해를 입을 때 침묵한다면 다음 차례는 결국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 강연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font color="#1153A4">청중</font>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지금 학생들은 세상이 원래부터 양극화돼 있는 것으로 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암담할 때도 있다.
<font color="#991900">박래군</font> 상황이 어렵지만 연대성이 회복된다면 지금 같은 야만적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크레인에서 김진숙씨가 309일 만에 내려오면서 “희망버스 덕분에 살아서 내려왔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노동문제를 시민들이 내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나는 연대성 회복의 조짐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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