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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민폐 노숙인’이 될 수 있다

사업 실패→빚더미→반복된 구직 실패→일용직 전전→부상까지… 쓰나미처럼 밀려온 불행에 ‘속수무책’ 김형철씨의 삶
등록 2026-08-28 10:44 수정 2026-09-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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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가명)씨가 2026년 8월24일 오전 서울 용산구의 한 여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노숙하던 형철씨는 7월 초 채널에이(A)의 노숙인 관련 뉴스 보도 뒤 공항공사로부터 퇴거명령서를 받고 공항에서 나왔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형철(가명)씨가 2026년 8월24일 오전 서울 용산구의 한 여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노숙하던 형철씨는 7월 초 채널에이(A)의 노숙인 관련 뉴스 보도 뒤 공항공사로부터 퇴거명령서를 받고 공항에서 나왔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형철(61·가명)씨는 2025년 여름부터 1년 정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지냈다. 머물 곳이 없어서다. 낮에는 공항 구석에 있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지냈다. 잠도 이곳에서 쪼그려 잤다. 형철씨가 활동하는 시간은 주로 새벽이다. 이 시간대에 화장실을 쓰고, 음수대에서 텀블러 3개에 하루 동안 마실 물도 받아놓는다. 그가 이렇게 지내는 이유는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공항 보안요원의 눈에 띄면 보안요원은 굳은 얼굴로 “아저씨, 이동하세요”라고 말했다. “눈치를 많이 보게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어요. 항상 주눅이 들어요.”

그러던 2026년 7월9일, 형철씨는 우연히 텔레비전에 자기 모습이 나온 것을 봤다. 얼굴은 흐리게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분명 자신의 모습이었다. 채널에이(A)가 ‘노숙자 아지트?… 손발 다 든 인천공항’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공항에서 장기간 머무는 노숙인들의 짐과 생활 공간, 화장실 이용 상황, 청소노동자·보안요원 등과 벌어진 마찰 장면 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인천공항이 사실상 노숙인들의 ‘아지트’가 됐다고 밝혔다. 형철씨는 실제 자신이 지낸 모습과 보도 내용은 전혀 달랐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할 행동을 하는 노숙인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건 극히 일부예요. 저는 그냥 조용히 있고 눈치만 보고 앉아 있었어요. 피해를 안 주려고 했어요. 대부분은 쫓겨날까봐 조심하면서 지내요.”

보도 이후 형철씨의 삶은 통째로 달라졌다. 보도가 나간 뒤 3주 만인 7월30일, 인천국제공항공사는 그를 비롯한 노숙인 13명에게 퇴거명령을 내렸다.

 

‘노숙자 아지트’ 보도 뒤 시작된 퇴거

 

갈 곳을 잃은 형철씨는 현재 비영리단체 홈리스행동의 도움을 받아 서울 용산구의 한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8월24일 용산구의 한 노숙인 쉼터에서 만난 그는 깨끗이 면도한 모습으로 취재진 앞에 나타났다. 다만 인터뷰를 할수록 오랜 거리 생활이 남긴 건강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형철씨의 왼쪽 눈은 충혈돼 있었다. 그는 “공항에서 지내며 망막이 손상돼 실명한 상태”라고 했다. 치아도 성치 않았다.

형철씨의 설명에 따르면, 채널에이 보도에 그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이랬다. 7월 초 그는 공항 주변을 서성이는 젊은 남성들을 봤다. 그중 한 명은 작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제게 ‘왜 여기 있느냐’ ‘짐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물었어요. 제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냥 궁금해서 묻는다’고 하더라고요.”

형철씨는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아 공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자신도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고 있다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이후 며칠 뒤 갑자기 ‘노숙자 아지트?…’ 보도가 나온 것이다. 보도 뒤 형철씨에겐 퇴거 압박이 거세졌다. 공항 보안요원이 더 자주 찾아왔고, 일부 시민은 그에게 “나가라”라고 거칠게 말하기도 했다.

인천 영종구청 복지 담당 공무원이 형철씨에게 노숙인 시설 입소나 복지 신청을 안내했다. 그러나 형철씨는 노숙인 시설 환경이 열악해 건강 문제가 있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신 지방자치단체 주거 지원을 받을 방안을 알아봤다. 형철씨는 공항 쪽에도 이런 상황을 전하며 “(지자체의) 지원 절차를 밟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공항 쪽도 알겠다는 취지로 넘어갔으나, 며칠 뒤 다시 보안요원 등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퇴거를 압박했다는 게 형철씨의 말이다.

형철씨는 그때 짐을 줄이라는 요구를 받고 외부 보관소에 일부 짐을 맡겼다. 그런데 7월30일 홈리스 관련 행사에 갔다가 공항으로 돌아왔더니 ‘퇴거명령서’가 나와 있었다. 결국 8월3일 공항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냥 빨리 퇴거하고 치웠으면 하는 것 같았어요. 쓰레기 치우듯 하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형철씨의 퇴거 과정은 혐오를 조장한 보도와 홈리스 지원체계 공백이 겹친 사건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주장욱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시설 입소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초생활보장이나 긴급복지 같은 다른 지원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문제는 인천엔 홈리스의 필요를 현장에서 파악해 주거·의료·복지를 지속적으로 연결할 종합지원센터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시는 퇴거 사건 이후인 8월14일 “노숙인 쉼터와 시설에서 매주 (공항) 노숙인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쪽은 “ 공항 운영에 피해를 주는 일부 노숙인에 대한 퇴거 조치는 불가피하다”면서도 “모든 노숙인에 대해 무조건 강제퇴거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며, 지자체 및 자활기관과 연계해 노숙인의 자립 및 사회복귀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홈리스행동은 시설 안내에 그치지 않고 노숙인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대기업 회사원에서 공사장 일용직으로

 

불과 8년 전까지 형철씨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회사원으로 일했다. 월급도 적지 않았다. 지역 공업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수도권의 큰 회사들을 옮겨가며 일했다. 업무상 출장이 잦았던 형철씨에게 공항은 그저 자주 지나치는 친숙한 장소일 뿐이었다. 가까운 동료나 친구 중에는 대기업 임원 등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도 있었고, 그들과 함께 국외 여행을 정기적으로 다니기도 했다.

삶에 위기가 찾아온 건, 2018년 50대 중반의 나이로 직장을 그만둔 뒤였다. 형철씨는 자신이 오랫동안 일했던 전문 분야의 경험을 살려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분야로 사업하면 무조건 된다”고 주변에서 부추기기도 했다. 퇴직 뒤 전문성을 살려 일감을 딸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일감은 들어오지 않았고 사업에 넣은 돈도 돌아오지 않았다. 형철씨는 “3~4년을 수입 없이 그냥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모아둔 돈은 빠르게 줄었고, 수억원이 몇 달 만에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퇴직금과 모아둔 자산이 없어지고도 채무가 일부 남을 정도였다.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형철씨는 50대 중반에 고향에 가서 공사 현장 일을 시작했다. 평생 사무실에서 일했던 그에겐 처음 해보는 육체노동이었다. 기술을 배우는 동안에는 보조 일을 맡았다. 오래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엘리베이터도 없이 자재를 나르는 날이 이어졌다. 숙련된 젊은 작업자들이 하루 20만원가량을 받을 때 그는 초보 보조 인력으로 하루 5만원 정도를 받았다. 그마저도 허리를 다쳐 두 차례 입원한 뒤 그만뒀다.

그 뒤로는 일자리를 찾는 게 일이 됐다. 형철씨는 “이력서를 100장 넘게 냈다”고 했다. 온종일 걸어다니며 구직한 날도 있었다. 오히려 과거 기업 고위직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게 아니냐”며 난색을 보인 업체도 있었다. 공공 일자리에도 지원했지만 형철씨보다 고령인 지원자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일이 끊긴 날이 길어지자 주거도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형철씨는 다시 수도권으로 와서 구직 활동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남아 있던 돈으로 여관을 잡았다. 한 달에 100만원 가까이 숙박비와 생활비가 들었다. 가진 돈이 줄자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함께 했거나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머물 곳조차 없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기 어려웠다.

 

여관에서 터미널로, 다시 공항으로

 

더는 여관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형철씨가 향한 곳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었다. 약 석 달 동안 밤에는 터미널에서 잠을 청했다. 거기서도 새벽이면 보안요원이 다가와 승차권을 확인하거나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 그럴 때는 아침 6시가 되기 전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김포공항에 가서 낮 동안 지내다가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다. 하지만 하루하루 드는 교통비조차 부담이 됐다.

그때 형철씨는 직장생활을 하며 드나들던 인천공항을 떠올렸다. 출장길에 공항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들을 봤던 기억이 났다. 여관에서 터미널로, 터미널에서 공항으로 조금씩 밀려온 셈이었다. “막판까지 온 거죠.”

인천공항에서도 형철씨는 다시 일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사이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돈과 거처를 잃는 과정에서 병원도 멀어졌다. 당뇨와 고혈압이 심각했고, 눈의 이상도 제때 치료하지 못했다.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병원에 가니 혈당 수치가 엄청 높게 나왔어요. 간호사님이 ‘이 상태로 어떻게 지냈냐’고 할 정도였죠.”

공항 생활은 형철씨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다른 노숙인과도 말을 많이 섞지 않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급식을 받으러 서울 도심으로 나가는 사람들과 달리, 형철씨는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공항에 남았다.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고립돼갔다. “우울증이 있다보니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했어요.” 우울감 속에 기초생활보장 등 각종 복지제도를 신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항 생활을 버티게 해준 드문 낙은, 길을 찾지 못하는 외국인을 보면 영어로 버스 정류장이나 이동 경로를 알려주는 일이었다. “알려주고 나면 그 자체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되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송 보도는 형철씨를 ‘민폐 노숙인’ 가운데 한 명으로 묘사했지만, 그는 무료급식소에 간 다른 노숙인의 짐을 지켰고 편의점에서 산 라면을 다른 노숙인에게 건네기도 했다. 종교단체 관계자가 준 음식을 모아뒀다가 다른 노숙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김형철씨가 2026년 8월24일 오전 서울 용산구의 한 여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노숙하던 형철씨는 7월 초 채널에이(A)의 노숙인 관련 뉴스 보도 뒤 공항공사로부터 퇴거명령서를 받고 공항에서 나왔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형철씨가 2026년 8월24일 오전 서울 용산구의 한 여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노숙하던 형철씨는 7월 초 채널에이(A)의 노숙인 관련 뉴스 보도 뒤 공항공사로부터 퇴거명령서를 받고 공항에서 나왔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만두고 싶지만… 복잡하고 더딘 거리 밖의 삶

 

형철씨는 거리 생활을 그만두고 싶어 했다. 채널에이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이 말은 보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항을 나온 뒤 형철씨는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 지원을 신청한 상태다. 지원받는 돈도 최대한 아껴 이후 거처를 마련하는 데 쓰겠다고 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퇴거한 뒤 형철씨가 다시 거리 밖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더디다. 기초생활보장 지원 결정은 두 달 남짓 걸린다고 했다.

형철씨는 퇴직과 사업 실패, 육체노동과 부상, 반복된 구직 실패를 거친 뒤 여관에서 터미널로, 다시 공항으로 밀려왔을 뿐이다. “50대 중반에 갑자기 퇴직한 사람들은 공중에 떠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사회는 그를 ‘민폐’로 낙인찍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라 말하고 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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