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암에 걸린 김로사(박환희 분·왼쪽)가 동거인 현상월(문수아 분)에게 미리 작성한 자신의 사망신고서를 건네고 있다. tvN 제공
김로사와 현상월.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두 사람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 상월은 가정폭력을 당한 로사를 한눈에 알아보고 숨겨준다. 그러나 로사 남편이 다시 둘을 찾아내 폭행하고 이에 대항하던 로사가 남편을 살해한다. 상월은 로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를 대신 지고 전과자가 된다. 로사는 그런 상월에게 자기 이름을 빌려준다. 출소 후 둘은 함께 살며 자력으로 돈을 모아 음식점을 연다. 암에 걸린 로사는 죽기 전 자신의 이름과 재산을 상월에게 주고 세상을 떠난다. “그 아이가 이제는 자기 삶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티브이엔(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 2025년 6월29일 종영했다. ‘미지의 서울’은 자유롭게 가족을 구성할 권리와 직장 내 괴롭힘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로사-상월 일화를 본 시청자는 “이래서 생활동반자법·동성혼 법제화가 돼야 한다고 가족 앞에서 일장연설함” “‘미지의 서울’이 생활동반자법·차별금지법·동성혼 법제화하라신다”라는 소감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겼다. 혈연과 혼인 관계가 안전하지 않을 때 개인은 대안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가. 그 고민에 현실 정치가 응답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준 지금까지의 현실은 초라하다. 국가는 로사와 상월의 상호 돌봄 관계를 인정하지도, 공동체 형성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돌보려면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함께 지낼 공간이 있어야 하고, 상대의 질병에 대비해 건강보험과 휴가도 필요하다. 수술 동행, 장례 등 서로의 중대사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권리도 보장돼야 한다. 한국 사회에선 혈연과 혼인 중심의 ‘법적 가족’만 그 권리를 가진다. 여기서 법적 가족이란 민법 제779조의 ‘가족’, 즉 배우자·직계혈족·형제자매(‘생계를 같이하는’ 경우 직계혈족의 배우자 등도 포함)다.
법적 가족은 국민연금을 상속할 수 있고 국민건강보험의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국민연금법·국민건강보험법) 국가의 각종 기초생활 지원을 받을 수 있다.(국민기초생활보장법) 단순 주거 지원을 넘어 자산 형성 도움도 받는다. 신혼부부 주택 특별 공급과 주택담보·전세대출 등을 활용할 수 있다.(주택 공급에 관한 규칙) 가족의 장례를 치를 권한이 있다.(장사 등에 관한 법률) 가족이 아플 때 돌봄휴가를 쓸 수 있다.(남녀고용평등법) 입원·수술하는 가족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수술 보호자의 경우 명문화된 법 규정은 없지만 많은 의료기관이 분쟁을 최소화하고자 대리인 자격을 ‘법적 가족’으로 한정한다.
법적 가족이 누구에게나 안전한 울타리라면 현행법처럼 ‘사회보장 패키지’를 독점해도 된다. 그러나 개인은 살면서 다양한 이유로 혈연 및 혼인 관계를 단절한다. 여성과 청소년에겐 주로 가정폭력이 단절의 원인이다. 그럴 때 법적 가족 중심의 사회보장 체계는 가해를 키울 뿐이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빈둥은 이렇게 지적했다. “법적 가족이 안전하지 않은 어린이·청소년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가? 어떤 공간이 안전하지 않다면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집을 나온 이들에게 ‘가출’ ‘비행’ 등을 붙이며 낙인찍고 심지어 빨리 발견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목적 삼는다. 어린이·청소년이 집에서 탈출하더라도 당사자가 필요로 하는 보호 체계는 없다.”
혼자가 되면 전보다 주거와 돌봄의 질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그 공백을 메우려 새 공동체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법 밖의 공동체는 아무리 가까워도 서로에게 합법적인 울타리가 돼줄 수 없다. 2024년 가족구성권연구소가 펴낸 ‘연대와 돌봄의 법’ 보고서를 보면 가정폭력 피해자 ㄱ은 집을 나온 뒤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어려움을 겪다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만났다. 그들 덕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지만 “서로가 선택한 가족”은 제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ㄱ은 “우리 중에 누가 죽어도 상주가 될 수 없다는 점” “언제든 아무 사이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 두렵다고 했다.
성소수자인 ㄴ도 30년 지기 파트너를 요양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려다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파트너의 친형을 설득해서야 겨우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주거 공간도 두 사람이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아 일인용 임대아파트만 신청할 수 있었다. 그곳은 거동이 불편한 파트너를 씻길 수 없을 만큼 화장실이 좁았다. 결국 입주를 포기해야 했다.
이같은 사회보장의 공백을 해소하려 생활동반자를 서류상 법적 가족으로 ‘만든’ 경우도 있다. 책 ‘친구를 입양했습니다’를 쓴 은서란 작가는 5년을 함께 산 친구를 딸로 입양했다. 서로가 아파도 병원에 입원할 수 없는 현실 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고 은 작가는 책에서 밝혔다.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맨 앞줄 오른쪽 둘째)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2023년 5월31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비혼출산지원법·생활동반자법) 발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2022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법적 가족을 이성애·혈연 관계로 한정하지 않는 국가가 약 60개국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공동생활 계약을 맺은 관계(PACS)라면 누구나 상호부조와 재산 배분 등의 권리를 보장한다.
한국 사회도 ‘가족’의 테두리를 더디게나마 넓히고 있다. 법적 혼인 관계만 허용하던 연금 수령권과 장례 집행 권리를 각각 2014년과 2020년부터 사실혼 배우자에게도 보장하기 시작했다. 동성 부부도 꾸준히 법률혼의 권리를 요구했다. 2024년 대법원이 동성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을 인정했다. 같은 해 동성 부부 11쌍은 자신들도 법적 부부로 인정하라는 ‘혼인평등 소송’을 냈다. 법원의 각하 처분을 받자 2025년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제21대 국회에서도 다양한 생활동반자 관계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2023년 4월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생활동반자법(‘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을 최초로 발의했다. ‘두 명의 성인이 상호 합의에 따라 서로 돌보고 부양하는 관계’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출산·돌봄 휴가 등을 폭넓게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한 달 뒤인 2023년 5월에는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이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생활동반자법·비혼출산지원법)을 발의했다. 생활동반자의 법적 인정에 더해 동성혼 법제화와 비혼 가정의 출산권 보장까지 담았다.
두 법안은 제22대 국회가 들어서며 자동 폐기됐다. 그러나 법 제정 요구는 여전히 살아 있어 이재명 정부를 향한다. 2025년 7월3일 ‘대통령의 30일, 언론이 묻고 국민에게 답하다’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실 취재진은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제정에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생활동반자법은 저번 대선 때 우리 공약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인권의 문제도 관심을 가져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용 의원과 장 전 의원의 생활동반자법도 최선은 아니다. 생활동반자 관계를 ‘성인’이자 ‘일대일’ 관계로 좁혔다. 다수 간 생활동반자 등록과 청소년의 생활동반자 등록은 허용하지 않는다. 지적장애인 등 피성년 후견인도 후견인 허가를 득해야 생활동반자 등록이 가능하다.
이미 현실에선 일대일 관계로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상호 돌봄 관계가 있다. 서울의 퀴어 주거 공동체 ‘무지개집’이나 노인·청년의 자발적 가족 구성을 그린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 등이 그 예다. 가정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청소년과 시설을 떠난 장애인도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법의 필요성을 긍정하신 분 중에 ‘친구들끼리 생활동반자 하고 싶다’는 분도 많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의 열망을 법이 다 담지 못하죠. 당장 시급한 주거·돌봄·의료 같은 권리만이라도 실제 가족에 맞게 재배치할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주소지를 공유하는 동거인이면 계약자가 1명이어도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든지, 의료 대리인이나 가족돌봄휴가 대상을 당사자가 선택할 수 있게 넓힌다든지요. 다양하게 살아가는 가족의 형태를 담는 정책이 분명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생활동반자법 입법이 그런 논의로 좀더 확장될 필요가 있죠.” 가족구성권연구소의 나영정 연구위원이 말했다.
‘내가 지정한 1인’도 그런 문제의식을 반영한 제도다.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대리인에게 의료적 결정권과 가족돌봄휴가 사용권, 장례 치를 권리 등을 맡긴다는 취지다. 이재명 대통령도 2022년 대선 후보 시절 “의료, 장례, 돌봄 영역에 있어 연대관계인을 지정하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가 언급한 연대관계인 제도는 불발됐지만, 공직선거법상 배우자 없는 후보는 선거운동원 지정권을 갖는 등 일부 제도에 반영됐다.
결국 생활동반자법은 다양한 상호 돌봄 관계를 법 테두리 안에 넣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법 제정 요구를 넘어 다양한 가족의 권리 보장을 계속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가족구성권연구소도 기존 법안에 얽매이지 않고 ‘연대와 돌봄의 법’이라는 명칭 아래 논의를 폭넓게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사회복지 체계가 민법상 ‘가족’ 정의를 준용하잖아요. 정말 다양한 관계를 보장하려면 그 규정부터 없어져야 하고요. 개별 법도 법의 목적에 따라 누구를 보장할지 법마다 달리 정해야 한다고 봐요. 일례로 코로나19 지원금도 가구 단위로 지급했더니 가장이 혼자 써버리거나 관계가 단절된 가족에겐 배분이 안 되는 문제가 있었잖아요. 법적 가족과 실제 가족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모든 정책을 혈연·혼인 관계로만 한정해 적용하면 개개인의 생활을 제대로 보장할 수도 없고, 다른 구성원의 권리를 되레 빼앗을 수 있어요. 법적 가족 중심의 사회보장 체계를 실제 가족 단위로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나 연구위원이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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