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을 때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가족 소식을 수소문하며 며칠씩 보내기 일쑤입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나고 자란 살레 란티시(27)는 2024년 9월25일 한겨레21과 한 전화 인터뷰에서 깊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란티시는 가자지구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2022년 12월 한국에 유학 왔다. 영국문화원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통해 비자를 받고, 가자지구와 이집트 사이 국경이 열렸을 때를 틈타 기적처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1997년 가자시티에서 태어나 수시로 이스라엘 군대의 폭격을 경험하고, 네 번의 전쟁(2008년, 2012년, 2014년, 2021년)을 경험한 란티시는 2022년 한국에 왔지만, 2023년 다섯 번째 전쟁이 터지면서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난민 지위를 신청한 란티시는 현재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고차 매매 일을 하며 팔레스타인의 인권침해 상황을 알리는 활동가 일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왔다는 안도보다 연일 폭격이 이어지는 가자 소식을 듣는 고통이 더 크다고 호소했다.
란티시는 “2023년 10월 이스라엘군 침공 이후 처음 넉 달간은 가자 현지 통신상태가 좋지 않아 가족과 통화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몇 주씩 연락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자에 있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하염없이 연락을 돌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이 1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란티시의 외삼촌과 여러 친척이 목숨을 잃었다. 고향의 친구들 부고까지 수시로 들으면서 란티시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 최근에는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최근엔 현지 통신이 일부 복구돼 2~3일에 한 번씩 가족과 통화하고 소식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음식·식수 부족 등 가자 현지의 어려움을 매번 들으면서도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냉가슴만 앓고 있다.
란티시는 2023년 10월7일부터 가자에서 진행 중인 사건은 (일부 언론이 쓰고 있듯)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가자 주민들은 이스라엘군의 폭격을 피해 다른 국가로 떠날 수도, 난민이 될 수도 없다. 이러한 현실은 작금의 참상이 결코 (대등한 국가의 충돌을 의미하는) ‘전쟁’이 될 수 없음을 방증한다고 그는 말했다.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군사 충돌을 피해 한국으로 향하는 난민들이 있었다. 난민인권센터가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2023년 12월 기준)를 보면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한국으로 와 난민 신청을 한 시리아 사람은 1611명에 이른다. 1240명의 예멘인도 한국으로 향했고, 현재 전쟁이 진행 중인 러시아(1만3711명) , 우크라이나 (203명 )에서도 난민이 왔다 .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온 난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법무부는 난민 신청자 수가 100명이 되지 않는 국가는 난민 신청자의 신원이 특정될 우려가 있어 신청자 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란티시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공항도 항구도 폐쇄된 가자지구를 떠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현재 가자지구는 거대한 감옥과 같다”며 “한국 사회가 가자지구 고통에 공감하고 이스라엘이 학살을 멈출 것을 촉구해달라”고 했다.
가자지구만큼은 아니지만, 서안지구 상황도 참혹하긴 마찬가지다. 9월25일 사단법인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와 온라인 회의에 참석한 서안지구 나블루스의 하키마 활동가는 “2023년 10월7일 이후 서안지구 안에 이스라엘군의 검문소가 너무 많이 설치돼 다른 마을로 이동하기가 불편해졌다”며 “10월이 되면 올리브를 수확해야 하는데 유대인 (불법) 정착민이 설치한 검문소 때문에 수확하러 올리브밭에 갈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와엘 활동가는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주민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하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마을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거의 매일 반복되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현재 벌어지는 일이 인종 청소이자 학살임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폭력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내달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주민은 4만 명이 넘고, 어린이 사망자도 1만6천 명이 넘었다. 부상자도 10만 명이 훌쩍 넘는다. 대규모 인명 피해가 짧은 기간에 발생하면서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에 책임을 돌렸던 국내 언론 보도도 최근 들어서는 이스라엘에 등을 돌리고 있다. 한국 시민사회도 이스라엘의 폭력을 중단시키고,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한국 정부와 기업에 압력을 넣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는 비디에스(BDS) 운동을 확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이콧(Boycott), 투자철회(Divestment), 제재(Sanction)의 약자인 비디에스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오마르 바르쿠티가 2005년 고안했고, 한국에는 2021년께 소개됐다. 이스라엘과 관계된 정부 기관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사 점령으로 이익을 보는 기업을 압박하는 캠페인을 벌여 이스라엘과 교류를 단절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궁극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을 고립시켜 가자 침략과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것이 목표다.
한국 기업 중에선 에이치디(HD)현대건설기계의 굴착기와 여러 중장비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 가옥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불법 정착촌 건설에 사용돼 논란이 일었다. 참여연대는 2024년 3월 성명문을 내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의 가옥 파괴, 토지 몰수, 불법 정착촌 건설 등 국제법상 명백한 전쟁범죄를 돕는 데 HD현대의 건설장비가 사용되고 있다”며 “HD현대는 이스라엘 중개업체인 에프코(EFCO)사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수출한 건설기계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인권을 억압하고 침해하는 데 미친 영향을 파악하라”고 요구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자아 활동가는 한겨레21에 “2023년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을 조직해 주말 집회와 이스라엘 대사관 앞 릴레이 1인 시위, 가자 지원 긴급모금도 하고 있다”며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휴전으로, 이스라엘 공습 중단을 위한 여론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가에선 이스라엘과의 ‘학술 교류’ 중단도 촉구하고 나섰다. 고대문화 편집위원회, 고려대 민주학생기념사업회, 고려대 생활도서관 등은 9월23일 오후 ‘집단학살 1년, 캠퍼스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과제’ 강연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선 “팔레스타인 학살에 동조하는 이스라엘 학술 기관과 학술 교류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돈벌이 기회로 삼아온 기업의 재정 지원과 학술 교류도 거부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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