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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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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부활시킨 ‘소아마비’ 말로만 휴전… 공습 지속돼

폴리오바이러스 백신 접종 위한 군사행동 잠정 중단? 가자·서안 지구 여전한 죽음의 행렬
등록 2024-09-07 12:17 수정 2024-09-09 13:07
2024년 8월28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의 피란민촌에 있는 텐트 안에서 소아마비에 걸린 생후 10개월 된 아기 압델 라흐만 아부 알제디안이 영아용 카시트를 침대 삼아 잠들어 있다. AP 연합뉴스

2024년 8월28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의 피란민촌에 있는 텐트 안에서 소아마비에 걸린 생후 10개월 된 아기 압델 라흐만 아부 알제디안이 영아용 카시트를 침대 삼아 잠들어 있다. AP 연합뉴스


‘압델 라흐만 아부 알제디안’이란 긴 이름의 아기는 2023년 10월7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를 침공하기 직전 태어났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전쟁이 터졌고, 가족은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라히야에서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히 잘 자랐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오염된 지하수

가자지구 이곳저곳을 떠돌던 압델 라흐만의 가족은 중부 데이르알발라의 피란민 텐트촌에 자리를 잡았다. 아기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일찌감치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어머니 네빈 아부 알제디안에게 기쁨을 줬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더는 기지도, 앉지도, 서지도 않았다. 왼쪽 다리가 마비된 탓이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세계보건기구(WHO) 등의 도움으로 아기의 가검물을 채취해 요르단으로 보냈다. 그곳 실험실에서 2024년 8월16일 분석 결과가 나왔다. 생후 10개월 된 압델 라흐만의 다리가 마비된 이유는 소아마비(마비성 회색질 척수염)였다.

소아마비는 주로 5살 이하 어린이가 장내 바이러스의 일종인 폴리오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발병한다. 주로 감염자의 대변으로 오염된 음식 또는 물을 삼키는 방식(분변-경구 감염)과 감염자가 기침 또는 재채기를 할 때 배출되는 비말(사람 대 사람 감염)을 통해 확산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감염력이 매우 강하다.

여느 장내 바이러스처럼 일단 감염되면 치료 방법이 없어 의료진은 증상 완화에만 매달린다. 더러 증상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바이러스가 척수 등 신경계에 침투하면 팔다리가 영구 마비된다. 바이러스가 호흡기계 신경세포에 침투하면 사망에 이른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치명적이다.

한국에선 1984년 이후 소아마비가 근절됐다. 하지만 외국에서 유입된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기 때문에 생후 2·4·6개월과 4~6살 때 등 모두 4차례 예방접종을 한다. 유엔과 각급 구호단체의 예방접종 노력으로 가자지구에서도 25년 전 소아마비가 근절됐다. 그런데 전쟁이 사라졌던 폴리오바이러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개전 초기부터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의 교육·의료시설은 물론 전력과 상하수도 등 사회기반시설을 가리지 않고 공습을 퍼부었다. 의료체계는 붕괴됐고, 식량과 마실 물 공급도 끊겼다.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처리하지 못한 하수가 지하수를 오염시켰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압델 라흐만의 어머니 네빈은 8월28일 에이피(AP)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계속 피란길에 오르느라 예방접종을 시킬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경고등은 일찌감치 켜졌다. 가자지구 보건당국은 7월18일 “유니세프와 공동으로 피란민 텐트촌 주변 하수를 수거해 분석한 결과 ‘타입-2 폴리오바이러스 변이체’(cVDPV2)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7월29일엔 가자지구 전역에 ‘소아마비 유행 경보’가 발령됐다. 폴리오바이러스의 잠복기(통상 7~14일)를 고려하면, 압델 라흐만이 감염된 것도 그 무렵으로 보인다.

2024년 9월1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에서 의료진이 어린이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4년 9월1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에서 의료진이 어린이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피란길에 오르느라 예방접종 못 시켜…”

국제사회의 압박 속에 이스라엘이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위한 한시적, 제한적 휴전에 합의했다는 사실이 8월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됐다. 접종 기간은 9월1일부터 사흘간으로 정해졌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군은 백신 접종이 진행되는 지역에서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군사행동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WHO는 9월4일 자료를 내어 이렇게 밝혔다.

“가자지구 소아마비 백신 1단계 접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9월1일부터 3일까지 10살 이하 어린이 18만7천여 명에게 백신 접종이 이뤄졌다. 가자지구 중부지역으로 피란민 이동이 늘어난데다 군사행동 중단 지역 밖에서도 접종이 이뤄지면서 애초 목표로 삼았던 15만7천 명보다 3만 명가량 접종 인원이 늘었다.”

2차 접종은 9월5~8일 가자지구 남부 일대에서 어린이 34만 명을 대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3차 접종은 9월9~11일 북부 일대에서 15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된다. WHO 쪽은 “백신 접종률이 90%를 넘어야 대유행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전쟁이 부활시킨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기이한 평화’는 지속될 수 있을까?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의 보도를 종합하면, 백신 접종 기간에도 팔레스타인 땅 전역에서 유혈이 낭자했다. 9월1일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 외곽 자이툰 지역에서 피란민이 몰린 사파드 학교가 공습을 당해 주민 11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다쳤다. 9월2일 요르단강 서안 툴카렘에서 이스라엘군 무인기의 공격으로 구급요원을 포함해 5명이 다쳤다. 9월3일 오전 가자시티의 가정집에 이스라엘군이 공습을 가해 어린이 2명을 포함해 9명이 목숨을 잃었다.

9월4일 가자지구 전역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적어도 주민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날 요르단강 서안 제닌에선 이스라엘군이 총구를 들이대며 주민 4천여 명을 집에서 쫓아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성명을 내어 “이스라엘군은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치명적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지난 1주일 남짓 만에 서안 일대에서 어린이를 포함해 20여 명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가자지구에 이어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도 완연한 전쟁터가 됐다.

개전 이래 최대 규모 반전 시위도

앞서 이스라엘 군당국은 9월1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납치된 미국인 3명을 포함한 23~40살 인질 6명이 가자지구 남부 라파의 지하터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이날 밤 시위대 수만 명이 텔아비브 도심으로 쏟아져 나와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AP 통신은 “개전 이래 최대 규모 반전시위”라고 전했다. 진압에 나선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물대포가 만들어낸 포말이 거리를 온통 허옇게 물들였다. 팔레스타인에도, 이스라엘에도 평화는 없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전쟁 334일째를 맞은 2024년 9월4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4만861명이 숨지고, 9만4398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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