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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약속’의 뜻은 ‘깜박했어’인가요?

국가인권위원회 공동기획 첫 회… 김숨 소설가가 임금 체불 피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쓴 논픽션 소설 <니읍>
등록 2024-05-04 18:51 수정 2024-05-08 20:50
한겨레21 자료사진.

한겨레21 자료사진.


1

말言하고,

벌罰을 받기로.

 

(니읍)<em> ‘벌’의 뜻은 ‘어떡해’예요. </em>

 

<em> 어떡해, 어려워요, 어떡해, 어떡해. </em>

<em> </em>

다들 어디로 갔을까…

 

어딘가에서 불타고 있는 공책.

2. 니읍의 방

 

창문.

창문 아래 유리꽃병.

유리꽃병에 꽂힌 노란 조화 한 다발. 언제 피었는지 모른다, 언제 질지 모른다. 향기는, 약속.

 

(니읍) 혼자 왔어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em> ‘아는 사람’의 뜻은 ‘좋아할 사람’이에요. </em>

 

<em> ‘거짓’의 뜻은 ‘거짓말을 몰라요’예요.</em>

 

그녀는 비닐하우스에서 종일 깻잎을 따고, 차곡차곡 개키고, 차곡차곡 상자에 담던 손으로 책을 펼친다. 그녀가 인형뽑기 기계로 뽑은 인형들이 침대 위에 병아리처럼 모여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 속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엄마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시간은 밤 9시가 지났다. 캄보디아어로 쓴 책의 제목은 <꿈>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어떤 문장을 검은 공책에, 분홍색 펜으로 그대로 옮겨 적는다.

 

(니읍) (검은 공책에 옮겨 쓴 문장을 짚어 보이며)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요?

내가 어디를 가야 해요. 사람들이 거기 가는 길이 없다고 말해요. 그래서 갈 수 없다고 말해요.

가고 싶어요?

그럼 거기 가는 길이 하나는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럼 갈 수 있어요.

(문득 얼굴을 들어 문 쪽을 바라보며) 친구가 와요, 그냥, 와요, 언제 올지 몰라요, 오면, 문 두드려요, 똑똑, 문 열어요.

 

그녀의 눈꺼풀이 감긴다. 그녀의 눈꺼풀은 깻잎 한 장보다 무겁다.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져 깻잎 열 장보다 무겁다. 점점 더 무거워져 깻잎 백 장보다 무겁다.

3. 법정

 

제107호 형사법정 앞 대기실. 흰 마스크로 입을 가린 노인이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다. 노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 니읍이 앉아 있다. 그녀도 흰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다. 대기실 시계는 오후 3시15분을 지나고 있다.

 

(니읍) (노인을 바라보며) 나 기억 못할 거예요, 나 모를 거예요. 나, 떨어요. 나, 무서워요.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선다. 니읍 앞을 무심히 지나쳐 대기실을 나간다.

 

(니읍) (대기실을 걸어 나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먼저 사장님이에요. 먼저 사장님 때문에 나, 더 떨어요. 나, 무서워요.

 

노인이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다.

 

(니읍) 나, 무섭다는 생각만 해요.

 

제107호 형사법정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온다. 그녀 앞으로 걸어온다. 그녀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남자) 읽을 수 있어요? 쓸 수 있어요?

 

그녀는 종이를 들여다본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남자가 종이를 챙겨 들고 돌아선다. 제107호 형사법정으로 다시 퇴장한다.

 

(니읍) (제7호 형사법정을 바라보며) 저 안에 뭐가 있는지 나는 몰라요.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나, 생각 안 해요. 안 하고 싶어요.

친구는 못 왔어요. 친구는 캄보디아로 갔어요.

 

*

 

제107호 형사법정 안. 대기실에 있던 노인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니읍) 나, 떨어요. 나, 무서워요.

 

소리 없이 혼자 떨던 그녀가 일어선다. 증인석으로 걸어간다. 앉는다.

 

(판사) …변호사는 여행을 가서 참석을 못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녀가 일어선다.

 

(판사)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판사) …선서 후에 허위 진술을 하게 되면 처벌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 선서하고 증인석에 앉는다.

 

(검사) 그때도 사실대로 말하고, 본인이 말한 대로 적혀 있는 것 확인하고 이름 적었어요?

(검사) 그때도 사실대로 말하고, 본인이 말한 대로 적혀 있는 것 확인하고 이름 적었어요?

(검사) 그때도 사실대로 말하고, 본인이 말한 대로 적혀 있는 것 확인하고 이름 적었어요?

(검사) 그때도 사실대로 말하고, 본인이 말한 대로 적혀 있는 것 확인하고 이름 적었어요?

 

(피고인 변호사) 피고인 농장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나요?

 

(니읍) 하우스에서 일했습니다.

 

(니읍) 몰랐어요.

몰랐어요.

 

(검사) (피고인석의 노인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람, 돈 못 받으면 처벌하길 원해요?

4. 비닐하우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 아들의 비닐하우스에서 딸기, 고추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친구 이씨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친구 윤씨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친구 안씨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친구 김씨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친구 ‘고용주 미상’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땄다.

그녀는 먼저 사장님의 친구 ‘고용주 미상’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땄다.

 

(니읍) 날 상속했다는 걸 몰랐어요.

 

날 임대했다는 걸 몰랐어요.

 

날 증여했다는 걸 몰랐어요. 

5. 

(니읍)<em> ‘희생’의 뜻은 ‘시간’이에요.</em>

 

먼저 사장님이 시간을 갈아먹어요.

하루 11시간을 8시간으로 갈아먹었어요.

한 달 319시간을 226시간으로 갈아먹었어요.

 

먼저 사장님이 갈아먹은 시간을 찾고 싶어요.

 

엄마가 아파요, 엄마한테 돈을 보내야 해요, ‘엄마는 왜 아플까?’ 엄마가 아파서, 돈 못 벌어서, 내가 돈 벌어야 해서, 열여덟 살에 말레이시아에 가정부로 갔어요. 식구가 일곱 명이었어요. 일곱 명이 날 향해 큰소리, 큰소리, 큰소리… 큰소리로 “promise?” 그럼 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promise.” 주인하고 promise, 주인 아내하고 promise, 주인 아들하고 promise, 주인 딸하고 promise. 앞치마를 두른 앵무새가 되어 promise, promise….

<em> 그래서 promise 잘 알아요. </em>

<em> 그래서 약속은 잘 몰라요.</em>

스무 살에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돌아와 학교 식당에서 서빙 일을 했어요. 3개월 동안 한국어 배우고 비전문취업비자를 받았어요. 프놈펜에 2014년 3월13일 밤 12시에 비행기를 탔어요.

내가 혼자 탄 비행기에 백 명쯤 타고 있었어요. 다들 나처럼 혼자였어요, 다 혼자.

 

그녀는 불을 끄고 눕는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처벌받길 원합니까?

그녀는 눈을 감는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다. 노란 꽃들은 조용하다.

6. 지난 9년 동안

십 년 전.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 니읍은 스물두 살이다. 두 시간 전까지 그녀는 비행기에 있었다. 비행기에 함께 탔던 사람들이 버스에 함께 타고 있다. 베트남 사람, 미얀마 사람, 태국 사람, 캄보디아 사람.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은 번호표를 목에 두르고 있다.

 

(니읍) (혼잣소리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혼잣소리로) 아는 말言도 없네.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다. 그녀는 여자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녀는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녀는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하지 않다. 그녀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엄마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녀의 엄마는 아프고 두 동생은 어리다. 아버지는 그녀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엄마는 시장 노점에서 국수와 죽을 팔아서 자식들과 살았다.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다닌 그녀는 학교가 끝나면 시장으로 가 설거지하고 야채를 다듬었다.

(어떤 목소리) 어디서 왔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묻는 소리가 아니다.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짐을 챙겨 내린다. 그녀도 따라서 내린다. 다들 자신들을 데리러 올 ‘사장님’을 기다린다. 그녀도 자신을 데리러 올 ‘사장님’을 기다린다. 그녀는 사장님 얼굴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기다린다. 어디선가 차들이 달려온다. 사장님들이 내린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둘씩, 셋씩, 넷씩 차에 태우고 떠난다. 그녀의 사장님은 오지 않는다. 어디선가 차가 달려온다. 키가 큰 노인이 내린다.

(여자) 74번!

니읍은 자신이 74번인 걸 깨닫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여자) 75번!

그녀와 비슷한 피부색에,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지은 여자가 앞으로 걸어 나온다.

(여자) 74번, 75번 여기 사장님 따라가요.

그녀는 노인을 흘끔 바라본다. 노인이 따라오라는 눈짓을 해 보인다. 74번인 니읍과 75번 여자는 노인의 차를 타고 어떤 집으로 간다. 비닐을 앞뒤로 둘러친 낡고 오래된 집이다.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먹빛 지붕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폭삭 무너질 것 같다.

이튿날, 노인은 니읍과 75번 여자를 숙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비닐하우스로 데리고 간다. 그녀는 비닐하우스라는 곳에 생전 처음 들어간다. 이상하게 습하고, 이상하게 덥고, 이상하게 환한 그곳에서 그녀는 딸기를 처음 본다. 집 주변에 과일나무가 넘쳐나는 그녀의 고향에는 없는 과일이다. 노인은 ‘큰소리로’ 니읍과 여자에게 딸기 따는 방법을 알려준다.

 

*

 

첫 월급. 84만5300원. 백만원이 안 된다. 그녀는 지난 한 달 동안 이틀을 쉬고,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점심시간 한 시간 빼고 10시간을 꼬박 딸기를 땄다.

 

(니읍) 사장님, 욕하지 마. 열심히 할게요.

사장님, 큰소리치지 마. 열심히 할게요.

 

그녀는 깻잎도 딴다. 그녀는 딸기보다 깻잎이 좋다. 깻잎이 딸기보다 가볍기 때문이다. 딸기는 무겁다. 딸기는 꽃과 잎을 헤치고 따야 한다. 딸기의 꽃과 잎은 찌른다.

밤이 되고, 니읍의 옆에서는 종일 비닐하우스에서 함께 깻잎을 딴 여자가 자고 있다. 여자도 그녀만큼 멀리서 왔다. 여자의 옆에서 또 다른 여자가 자고 있다. 그 여자도 함께 종일 깻잎을 땄고 그녀만큼 멀리서 왔다. 그 여자 옆에서 또 다른 여자가 자고 있다. 그 여자도 함께 종일 깻잎을 땄고 그녀만큼 멀리서 왔다.

 

*

 

그녀는 여전히 상속되고, 임대되고, 증여되고 있다. 그녀는 사장님이 숙소의 월세를 빼고 월급을 지불한다는 걸 알게 된다. 네 명이 방 한 칸을 같이 쓰고, 선풍기도 없고, 에어컨이 있지만 전기를 아껴야 해서 틀지 못하는 숙소의 월세는 28만3천원이다. 그녀의 월급통장에는 월세를 정확히 뺀 금액이, 정확히 입금된다.

 

(니읍)<em> ‘니읍’의 뜻은 ‘행복’이에요.</em>

돌아가신 아빠가 지어줬어요.

 

니읍, 불행해. 니읍, 비닐하우스에 들어가기 싫어.

 

태어나 처음 맞는 겨울, 그녀는 닭볶음탕을 해먹는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냄비를 들고 욕실로 간다. 온수기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기름이 벌써 떨어졌지만 사장님은 기름을 넣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씻을 때 냄비에 물을 데워 쓰고 있다.

 

(이웃 농장의 여자) (니읍을 향해) 도망 가!

 

(또 다른 이웃 농장의 여자) (니읍을 향해) 도망 가!

 

니읍은 도망가고 싶다. 그냥 어디로든 가고 싶다. 캄보디아로는 갈 수 없다. 차비가 없어서 못 간다. 그냥 어디로든, 돈 벌 수 있는 데로 가고 싶다.

 

*

 

참새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고, 크고 누런 개가 부름을 받은 순례자처럼 지나간다. 까만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가 흙먼지가 이는 길을 초조히 걸어간다. 니읍이다. 그녀의 뒤로 비닐하우스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비닐하우스들은 백내장이 두텁게 낀 눈동자다. 맹목. 비닐하우스들이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비닐하우스들이 호수처럼 보이는 곳까지 걸어간다.

멀리서 보면 비닐하우스들은 호수처럼 보인다.

 

(니읍) (조금 떨리는, 조금 다급한, 많이 초조한, 그러나 다정하게 느껴지려 애쓰는 목소리로) 언니?

 

(조금 더 많이 초조한 목소리로) 언니?

 

언니, 나 밀양에서 열 시간 일해요.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해요. 점심시간 한 시간 줘요. 왜 사장님 돈 여덟 시간 계산 줘요. 왜 두 시간 계산 안 줘요.

 

(고용센터 상담원) 밀양 다 똑같아요. 우리 못 도와줘요.

7.

(니읍) <em>‘권리’의 뜻은 ‘의미가 안 나와요’예요.</em>

 

<em> ‘열심히’의 뜻은 ‘빨리, 빨리, 그냥 빨리, 빨리, 빨리빨리 딸기 따고, 빨리빨리 깻잎 따고’예요.</em>

 

내가 열심히 일해야 내가 살아요, 엄마가 살아요, 동생들이 살아요.

 

<em>  ‘양심’의 뜻은 ‘쉬운’이에요.</em>

8. 여자들

쥐가 침대 매트리스 스티로폼을 갉는 소리.

 

(완나) 매일 밤 들려와.

 

불타고 있는 공책

 

(메싸) 공책을 불로 태웠어. 매일매일 일한 시간과 날짜를 적은 공책. 사장님이 내 가방을 빼앗았어. 공책을 꺼내 가져갔어. 공책에 불을 질렀어.

 

내 심장에 불을 지른 것 같았어.

 

고장 난 세탁기

 

(텡) 세탁기가 고장 났어. 사장님이 화를 냈어.

 

(텡) 한국말을 모르니까, 네. 사장님이 물으면 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네. 웃으며 네.

(완나) 임금을 안 줘서 친구한테 빚져서 생활했어. 어느새 빚이 300만원.

(텡) 사장님이 하루 근로 시간을 박스 개수로 정했어. 박스 개수를 채웠어. 사장님이 박스 개수를 올렸어.

기숙사비 45만원을 빼고 월급을 줬어. 온수기가 고장 났어. 사장님, 안 고쳐줬어. 방 보일러 기름이 떨어졌어. 사장님, 기름을 안 넣어줬어.

(메싸) 집 떠나온 지 8년 됐어. 집에 갈 수 있을까? 한국에서 돈 벌어 보내주겠다고 하고 8년이 지나도록 한 푼도 못 보냈어. 일도 못하고, 못 받은 임금도 못 받고, 집에도 못 가고.

 

(완나) 금방 줄게, 사장님이 약속했어.

(텡) 내 공책을 불태웠어.

(메싸) 밭 팔아서 줄게, 사장님이 약속했어.

 

(니읍) <em>‘약속’의 뜻은 ‘깜박했어요’예요.</em>

 

(완나) 믿었어.

(텡) 내 공책을 불태웠어. 내 심장.

(메싸) 믿었어.

 

(완나) <em>나, 믿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em>

 

(메싸) <em>나, 집에 갈 수 있을까?</em>

 

(텡) <em>나, 쫓아내지 마.</em>

9. 산나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그녀는 몸을 일으킨다. 똑똑. 다른 방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녀는 문으로 걸어간다. 문을 연다.

(니읍) (자신의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산나예요. 다른 농장에서 일해요.

(산나) (웃으며) 깻잎.

(니읍) 그냥 찾아와요, 연락 없이 찾아와요, 똑똑, 문 두드려요, 문 열어요.

(산나) (웃으며) 그 사람.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는 그녀들 앞에는 노란 바나나가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다.

(니읍) 그냥 서로 얼굴 보며 앉아 있어요.

(산나) (웃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좋아요.

10.

불타고 있는 공책은 계속 불타고 있다.

 

고장 난 세탁기는 계속 고장 중이다.

 

침대보다 거대해진 쥐

11.

(니읍) 다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요. 프놈펜에서 같이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 인천공항에서 같이 버스 타고 온 사람들…

 

흩어졌어요…

 

<em> 나, 아는 사람 만나고 싶어요,</em>

<em> 나, 아는 사람 되고 싶어요.</em>

 

아는 사람 되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으면, 찾아와요, 그냥, 찾아와요, 옆집에 살면 매일, 멀리 살면 가끔, 가끔, 매일 보고 싶지만 차비가 드니까 가끔 찾아와요, 똑똑, 문 두드려요.

 

<em> ‘죄’의 뜻은…</em>

 

<em> 어려워요, 어떡해, 어떡해.</em>

 

똑똑, 문 두드려요.

 

나, 문 열어요.

 

나, 떨어요.

 

김숨 소설가

* 스레이 니읍은 노동을 제공했던 전 농장주 성아무개씨를 상대로 ‘매일 두 시간분의 추가 노동수당 착취’와 ‘퇴직금 미지급’에 대해 경남 양산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고 고소했다. 그녀는 2014년 3월14일부터 2018년 12월17일까지, 2019년 3월28일부터 2021년 1월27일까지 성씨의 농장에서 근로계약을 맺고 노동을 제공해오다 2021년 1월27일 퇴사했다. 고소 사건은 수사가 완료, 창원지방법원 밀양지원에 송치됐고 2024년 4월24일 니읍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농장주 성씨는 또한 3~4명이 방을 함께 사용하는 숙소의 월세로 월급에서 28만3천원을 제했다.

* 완나(가명)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딸기밭 농장에서 1년2개월 동안 노동을 제공하고 4개월 반치 임금과 퇴직금 포함해 1400만원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지 못했다.

* 텡(가명)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2015년 6월부터 2021년 7월까지 경기도 이천 농장에서 노동을 제공했다. 140만원 상당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

* 메싸(가명)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 2015년도에 한국에 들어와 4년 가까이 노동을 제공하고 3년7개월치에 해당하는 5천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G-1비자를 받고, 한국에 4년째 무직 상태로 머물고 있다.

2024년 4월24일 니읍(왼쪽)과 김숨 소설가가 대화하는 모습. 류우종 기자

2024년 4월24일 니읍(왼쪽)과 김숨 소설가가 대화하는 모습.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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