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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하연이 토요일 7시50분이면 꼭 하는 일

한국 20년차 이주민센터 상담사 결혼 이주 몽골인 하연… ‘몽골인이고 한국인인 걸 떠나서’ 엇비슷한 고민을 하며 사는 우리들
등록 2024-07-12 21:04 수정 2024-07-19 11:3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인터뷰를 바탕으로 소설과 에세이 혼합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우리는 하연의 몽골인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하연은 그곳에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방이 있다며 인터뷰하기에 좋은 장소일 거라고 말했다.

하연이 알려준 식당은 역 근처 상가건물 지하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까운 자리에 앉은 두 여성이 보였다. 점심때가 지났기 때문인지 식당 안은 한산했다. 나는 수줍게 인사를 건넨 뒤 하연을 따라 안쪽 방으로 향했다.

“여긴 몽골인들이 모여 얘기도 나누고 노는 곳이에요.”

 

-

 

하연이 문을 열자 노래방과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에 미러볼과 파란색 조명등이 설치돼 있었고, 노래방 기계와 탬버린이 보였다. 제법 커다란 탁자가 놓인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터뷰하기 좋은 장소가 노래방이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하연이 조명등을 켜자 우리의 얼굴이 파랗게 보였다. 노랑과 분홍빛을 내쏘는 미러볼이 빙글빙글 돌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어떠세요?”

“분위기 좋은데요.”

하연은 안도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펼치며 말했다. “일단 음식부터 주문하죠.” 나는 가볍게 점심을 먹고 왔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고기를 먹을 줄 아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자 하연은 친구에게 몽골어로 음식을 주문했다.

“여기가 예전엔 인력사무소였어요.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원래 가죽 공장에 다녔는데, 그건 남자가 하는 일이에요. 여기에 식당을 열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랬어요. 갑자기 무슨 식당이야. 너 조리사자격증 있어? 친구가 낙천적이에요. 까짓것 따면 된다고 했어요. 가끔 친구가 나한테 물어요.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걸 말해요.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여기 오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요. 친구가 해놓은 거 나는 먹기만 해요.”

그런 친구가 없는 나는 부러운 마음이 살짝 일었다.

“개명은 언제 하셨어요?”

“3년 전에요. 원래 이름은 알파벳이 스무 자가 넘어요. 어느 날 은행에서 서명하다가 깨달았어요. 이름이 너무 길다는 걸.”

말미에 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은행 창구 앞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연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웃음이 났다.

“소설가님, 오늘 제가 어떤 얘기를 하면 되나요?”

“살아온 날들에 대해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그게 소설이 될 수 있어요?”

“그럼요. 그게 소설인걸요.”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미리 작성해 온 질문지를 힐끗 보며 말했다.

“한국엔 언제 오셨어요?”

“2003년에요.”

“결혼을 그때 하신 거죠?”

“아니요. 결혼은 나중에 했어요. 저는 선교 활동하러 한국에 온 거예요. 원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교회에서 통역하고, 기타 치면서 찬양 인도도 했어요. 그러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경기도) 안산으로 왔죠.”

하연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내심 당황했다. 질문이 잘못됐음을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인터뷰하기 전 하연이 이주 여성이라는 정보를 전달받았고, 당연히 결혼을 계기로 이주한 여성일 것이라 짐작했다. 나의 편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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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하연의 친구가 들어왔다. 양갈비와 군만두, 500㏄ 맥주잔에 가득 담긴 홍차가 탁자 위에 놓였다. 설탕 단지를 가리키며 하연이 물었다.

“차에 설탕을 넣어 드시나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먹어본 적이 없어서…. 혹시 몽골에선 그렇게 먹나요? 그럼 저도 설탕을 넣어보겠습니다.”

“저는 단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먹어요.”

설탕을 넣지 않는다고 말하면 무례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서둘러 대답을 바꿨지만 하연은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누군가는 단맛을 선호하고 다른 이는 그렇지 않은 것뿐인데 나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해가 비롯될까봐 혼자 염려하고 있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이와 같은 반에 다른 이주 여성 어머니가 있었나요?”

“저뿐이었어요. 그래서 놀이터에 아들을 데리고 가서 한국인 엄마들한테 말을 걸었어요.”

“한국어는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거울을 보면서 혼자 연습했어요. 한국인과 대화하는 순간을 상상하면서 혼자 묻고 답했죠. 제가 먼저 한국인 엄마들한테 다가가야 했거든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아이한테 친구를 만들어주려면 변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중엔 한국인 엄마들이 문구점에 같이 가주기도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종이에 써주기도 했어요. 그걸 보고 아이한테 필요한 물품을 챙겼어요. 어쩌다 아이들끼리 싸움이 나면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여기는 몽골이 아니라 한국이야. 한국인한테 맞춰줘.”

나는 젊은 시절의 하연을 상상으로 떠올렸다. 거울 앞에 서서 한국어로 묻고 답하는 단정한 옆모습을. 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로 바삐 걸어가는 뒷모습을. 결심을 세우느라 팽팽해진 입매와 아이를 다부지게 붙잡고 있는 손을.

“아이를 몽골 방식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남편이 반대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많이 했어요. 우물물 길어다 쓰고, 장작불 피우는 전통 가옥에 살았으니까. 여기는 그런 게 없지만 저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내버려두라고, 때가 되면 알아서 할 텐데 공부하기도 바쁜 애를 왜 괴롭히냐고 했어요. 한국인 엄마들도 아이들이 학원 다니느라 바쁘니 쉬게 해줘야 한다고 그랬고요.”

“아드님은 지금 몇 살인가요?”

“스물하나요. 아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아요. 이주민 엄마들이 모이면 그런 말을 해요. 아이에게 네가 엄마를 도와야 한다고 자주 말하라고. 저도 아들한테 엄마가 한국에서 20년간 살았다고 다 알 거라 생각하지 말고 뭐든 물어보면 자세히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어요. 한국인인 네가 엄마한테 알려줘야 한다고.”

“아드님은 몽골어를 하나요?”

“아니요. 가르쳐주지 못했어요. 남편이 한국어부터 떼고 나서 몽골어를 가르치라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그 시대 이주민 엄마들의 절반 정도는 모국어를 가르치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 엄마들은 가르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들이 얼마 전에 몽골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책을 사다 줬어요. 기특해요.”

아들에 대해 말할 때마다 하연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들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과 하연이 몽골인인 줄 모르고 있었던 그들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서 깜짝 놀라더라는 얘기를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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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로 일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2007년부터 외국인센터에 다녔어요. 그땐 지금처럼 센터가 많지 않아서 안산에서 서울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했어요. 거기서 다문화 강사 교육을 받았고 한국어도 배웠어요.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상담 일을 시작했죠.”

“주로 어떤 종류의 상담을 하세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외국인 입장에서 상황을 보는 역할이에요. 외국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당사자들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요.”

얼핏 듣기에도 하연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해 보였다. 한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의 룰을 따라야 한다는 강압적 태도를 내세우면 갈등의 골만 깊어진다. 하연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런 말을 자주 들은 듯했고, 상담할 때 그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내담자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것 같았다.

“음식 좀 드시면서 하세요.”

하연이 내 쪽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서 양갈비를 작게 잘라 먹었다. 진한 양념에 졸인 고기는 부드럽고 고소했다.

“맛있네요. 서울에 분점을 내보셔도 되겠어요.”

“그래요? 친구가 요리를 참 잘해요. 몽골 음식이 먹고 싶으면 여기 와서 먹으면 되니까 좋아요. 몽골 친구들도 여기서 만나요. 이 방에서 술도 마시고, 속상했던 얘기도 다 해요. 남편들도 같이 어울려 놀고요. 이젠 남편들이 우리가 몽골인인 걸 잘 모르겠다 그러고, 우리도 남편들이 한국인인 줄 모르겠다고 해요. 서로가 편한 거예요. 몽골인이고 한국인인 걸 떠나서.”

하연의 마지막 말이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몽골인이고 한국인인 걸 떠나서.” 그 말대로 나는 하연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몽골인 여성과 한국인 여성으로, 이주민과 원주민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잊고 하연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하연은 한국에 와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더 알고 싶었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 처음엔 명절마다 싸웠어요. 몽골은 집안일을 남녀가 다 같이 하는데, 한국 남자들은 화투나 하고 여자들만 주방에서 종일 일하잖아요.”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가면 눈치가 더 보였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손을 댄 건 큰형님이 나중에 다시 했어요. 차라리 조금 늦게 가서 설거지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계속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남편이 그걸 알아챈 것 같아요. 가족들한테 얘기했나봐요. 형님이 저한테 너무 일찍 안 와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할 줄 모르는 걸 하려고 노력하느니 저도 그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김치 담그는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남편한테 당당하게 말했어요. 맛대가리 없는 걸 만들어봤자 욕만 먹으니까. 차라리 김치 살 돈을 벌어 오는 게 낫지요.”

하연은 강요받은 일 대신 할 만한 일을 택해 갈등을 줄이고 있었다. 유쾌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하연을 만나기 전, 나는 가부장제 기반의 한국 사회에서 핍박받는 이주 여성의 이미지를 자주 떠올렸다. 과거에 썼던 소설의 내용 역시 그러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도망쳐 꿈을 이루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나는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계속 자문하고 괴로워했다. 소설에 이주 여성을 등장시키면 그가 겪은 폭력과 차별에 대해서도 꼭 말해야 하는 걸까? 그걸 쓰지 않으면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왜 썼느냐는 준열한 물음 앞에 서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결국 폭력적인 장면을 생략하는 우회로를 택했지만, 그 소설은 끝이 날카로운 물음표로 남아 오랫동안 나를 찔러댔다. 나는 하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로 오는 길에 이주 여성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봤어요. 짐작했던 대로 가정폭력과 차별에 대한 기사가 많았어요.”

하연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오늘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 역시 그와 관련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저는 어떤 소설을 써야 할까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하연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의문이 더욱 강해졌다. 나는 무얼 상상했던 걸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걸까. 내 질문을 귀 기울여 듣던 하연의 어깨가 점점 경직되었다.

“가정폭력과 차별은 개선되어야 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모든 이주 여성이 어렵고, 힘들고, 가정폭력을 당하고 사는 건 아니에요. 행복하게 사는 가정도 있어요. 정말 노력을 많이 하고 고비를 여러 번 넘겼기 때문에 행복해진 거예요. 그 과정은 말로 다 못해요. 고부 갈등, 친정과의 경제적 부분이 있고, 집집마다 고민이 많아요. 그걸 하나씩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힘든 순간이 왔을 때 잘못된 선택을 해서 결과가 안 좋아지면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걸 아셔야 돼요.”

방 안을 비추는 파란 조명 덕분에 문득 하연과 심해에 마주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깊고 고요한 장소에서 울리는 하연의 목소리는 다부졌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정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뒤에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가정을 잘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주 여성들은 정말 많은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원치 않았지만 어두운 길로 간 여성들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으나 마음과 달리 그 길로 간 거고요. 우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회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이혼했다는 말을 하면 누구 잘못인지 묻지도 않고 여성의 잘못으로 생각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어요. 다 얘기할 수 없는 과정이요. 편견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

 

말을 마친 하연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다시 편안한 자세로 돌아온 하연을 보다가 나는 아이 얘기를 꺼냈다. 이내 하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희미한 슬픔이 깃든 밝음이었다.

“요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어요. 토요일 저녁이 되면, 살까 말까 엄청 고민해요. 그러다 7시50분이 되면 결국 달려가서 로또를 사요.”

로또를 매주 사는 마음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이어지는 하연의 말 역시 내 고민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사십 대가 금방 지나갈 것 같아요. 요즘 들어 내가 너무 늙었구나 싶고, 노후 걱정을 자주 해요. 수입은 적지만 연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계산해보고,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고민해요. 한국어능력시험 급수를 올리려고 책을 샀어요.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려고요. 출퇴근하면서 시험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책이 너무 무겁더라고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요.”

하연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어느덧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외국인이 센터에서 하연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하연은 음식이 절반 이상 남은 접시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많이 못 드셔서 어떡해요.”

“포장해 갈게요. 가족들하고 나눠 먹으려고요.”

하연은 방 밖으로 나가 용기와 비닐을 가져오더니 양갈비를 여러 겹의 비닐로 야무지게 포장하며 말했다. “몽골 사람들도 양고기는 이렇게 해서 가져가요.”

나는 재바르게 움직이는 하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설가님, 오늘 제가 도움이 됐나요?”

“그럼요. 그리고 재밌었어요.”

‘행복한 가정이든 불행한 가정이든 그 이면엔 똑같이 당사자의 많은 노력이 있다고 말했을 때, 엇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다르다고 생각할까요. 왜 그리 쉽게 탓할까요.’ 나는 전하지 못한 말을 표정에 담아 하연을 마주 보았다.

“도움이 됐다니 참 다행이에요.”

하연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심해에서 나눈 우리의 대화가 빛으로 된 꼬리를 길게 그리며 밖으로 힘차게 헤엄쳐 나갔다.

 

이서수 작가

 

*동료시민 이주민: 인구절벽으로 나아가는 한국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는 선택일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이주인권’을 소재로 한 소설가들의 연속 기획을 선보인다. 4주마다 연재.

 

이서수 작가 이서수 제공

이서수 작가 이서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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