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녀는 J시행 기차에서 내게 건넬 질문들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보름 전,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해 소개받은 그녀는 소설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나와 인터뷰하고 싶다고, 인터뷰한 내용은 소설처럼 각색해 시사잡지에 실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몇 해 전 인터넷에서 읽은 댓글들이 떠올랐다. 내 이야기를 다룬 기사에 달렸던 것이었는데, 표정과 온기가 없는 마네킹으로 연상되는 누군가(들)가 쓴 그 글들은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마음을 한동안 헝클었고 아프게도 했다. 또다시 그런 댓글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내가 결국 인터뷰에 응하리란 걸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대개 거절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왔다.
내 이름은 파샤, 열여덟 살, 한국 출생, 제1 언어는 당연히 한국어, 가족은 부모님과 세 동생, 사는 곳은 남쪽의 J시, 그리고 또 하나.
미등록이라는 신분….
J시 역으로 가는 버스 뒷자리에 앉아 그렇게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을 나열해봤다. 나는 평범한데, 간절히 평범해지고 싶은데, 마지막 조각 하나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내 존재가 공개될 수밖에 없는 인터뷰에서는 되도록 사진 촬영을 사양하는 것도 미등록 신분이라는 그 조각 탓이다.
그렇다.
나를 규정하는 법적 용어는 ‘미등록 이주 아동’이다.
미등록은 서늘하고 이주는 고단하게 들린다고, 그래서 미등록 아동은 제 몸집보다 큰 보따리를 이고 가는 어린이의 뒷모습을 연상시킨다고 쓰인 책(은유, ‘있지만 없는 아이들’, 돌베개)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아동’이라는 단어가 제일 맘에 들지 않는다. 하긴, 아동이든 청소년이든 미등록으로 사는 건 녹록지 않다. 어른도 다를 것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부모님의 고된 노동과 농도 짙은 불안을 지켜봐왔다.
미등록 이주 아동은 일단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다. 친구들과 떡볶이나 팥빙수를 먹고 계산할 때면 나 혼자만 계좌이체를 못한 채 주섬주섬 현금을 꺼내야 했는데, 그때마다 내 마음속 침울함의 영토는 갑자기 확장되곤 했다. 은행계좌가 없으니 신용카드와 교통카드를 신청할 수 없고 내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장학금을 신청하거나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려면, 혹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입장이 가능한 곳에서 진행되는 체험학습에 참여하려면 여러 행정직원을 만나야 했고 매번 똑같이 내 특별한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예외적 상황에 당황하거나 귀찮아하는 그들의 표정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잔뜩 주눅이 든 채로. 모든 게 불편하지만 그중에도 최고는 쇼핑이다. 시내에서 버스로 사오십 분 거리에 있는 우리 집 근처엔 마트가 없고 올리브영과 다이소도 없다. 수시로 바닥나는 식료품과 생필품뿐 아니라 저마다 갖고 싶은 기호품도 누군가의 아이디와 신용카드를 빌리지 않으면 구매할 수 없다. 5일에 한 번 집 근처에서 장터가 열리긴 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들은 5일 단위가 아니라 수시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더욱이 그런 장터에는 필기도구나 립밤 같은 건 없다.
버스가 기차역 앞에 멈췄다.
그녀가 인터뷰 장소로 정한 역 근처 커피숍으로 가려면 1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9월인데도 내리쬐는 햇살은 뜨거웠고 온몸엔 금세 땀이 차올랐다. 지도 앱을 보며 커피숍을 잘 찾아가긴 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간판이 떨어져 있고 셔터까지 반이나 내려온 걸 보면 아예 폐업한 듯했다. 인구가 꾸준히 줄고 있는 이곳에서 상가 폐업은 흔했다. J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구 감소는 한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사회문제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인구 수치에 우리 여섯 가족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녀에게 도착하면 전화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그늘을 찾아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주 오던 할머니가 나를 스쳐 가다 멈칫했다. 불길했다. 조금 걷다 흘끗 돌아보니 역시나 할머니는 멈춰선 채 내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2023년에야 난생처음 방문했던 파키스탄이 돌연 그리워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과 이모, 고모들, 그리고 사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부모님이 살던 동네는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대신 편안했다. 내가 보고 나를 보는 사람들이 다 나와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파키스탄에서야 나는 비로소 평범함이라는 옷을 입어본 것이다. 집 밖에 나간 순간부터 시작되는 시선의 감옥과 한국말 잘하네, 같은 말로 내 정체성을 새삼 고민하게 했던 사람들의 허락 없는 참견에서 해방된 것이 마냥 좋았다. 모르진 않았다. 한국 사람들의 시선과 참견에는 적대감보다는 호기심이 훨씬 더 많이 함유돼 있음을. 누군가는 정말 무구하게 나를 신기해하는 것뿐이란 것도.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구사하며 살아왔다. 한국 학교에 다녔고 친구들은 모두 한국 사람이며, 내게는 라마단만큼 설날의 세배도 중요하다. 여전히 내 쪽을 향해 있는 저 할머니의 시선은 그런 나를 순식간에 이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무심한 폭력이기도 하다는 걸, 대다수의 한국 사람은 잘 모르는 것 같다.
파키스탄을 떠나던 날, 엄마와 외할머니는 해후했을 때처럼 울면서 웃었고 웃다가 다시 흐느꼈다. 아빠와 친척 몇몇도 돌아선 채 눈가를 훔쳤다. 다들 알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파키스탄에 갈 수 있었던 건— 나와 동생들에게는 첫 국외여행이었고 부모님에게는 20여 년 만의 귀향이었다— 2022년 2월부터 나 같은 장기체류 미등록 아동에게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가 시행된 덕분이다. 드디어 나와 동생들에게도 합법적인 신분증 번호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인권위가 권고하여 법무부가 시행한 이 제도는 아동의 부모까지는 해당하지 않아서 부모님은 자녀들의 보호자 자격으로 체류 허가를 받기 위해 꽤 큰 액수의 범칙금을 내기도 했다. 게다가 2025년 2월이면 이 제도의 시행 기간이 끝난다.
내년에 운 좋게 제도가 연장된다 해도 그 혜택은 영원하지 않다. 성인이 되면 더는 ‘아동’이 아니므로 체류 자격은 다시 박탈된다. 나와 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거나 회사에 취업해 다른 종류의 비자를 받게 된다 해도 그 비자는 부모님의 체류까지 보장해주지 않는다.
부모님이 예전처럼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우리 곁에 머무는 게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법’으로 존재한다는 건 언제든 발각돼 추방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부모님은 이제 더는 젊지 않다. 더욱이 아버지는 일하다 왼쪽 눈을 다쳐 실명된데다 평균치를 밑도는 혈소판 수치 때문에 작은 상처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10살인 막냇동생마저 성인이 되는 10년 후면 부모님은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 있을 터였다.
가족 전체가 파키스탄으로 이주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나와 동생들에겐 한국이 더 익숙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한국의 공기를 흡입하고 한국에서 재배한 작물로 요리한 음식을 먹으며 키가 자라고 뼈대가 굵어진 우리가, 파키스탄에서 파키스탄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 형제는 한국어처럼 파키스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한다. 자식들이 한국에 정착하길 바랐던 부모님은 우리 앞에서 가능한 한 한국말만 썼고 파키스탄말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파샤, 꿈이 뭐니?
어른들은 내게 묻곤 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땐 천진하게 웃으며 가수라고 대답했다.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했으니까. 그 꿈에 대한 열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보다 노래 잘하고 끼도 많은 한국 아이들 역시 가수로 데뷔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된 뒤부터였을 것이다. 가수를 포기하고 품게 된 꿈은 어린이집 교사였다. 동생이 셋이나 있는 내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안타깝게도 그 꿈 역시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아이들의 부모가 나 같은 외모의 선생을 좋아하지 않으리란 걸 모를 수 없었으니까. 그건, 내 마음 어딘가를 다쳐가며 터득한 쓰라린 깨달음이었다.
입시를 앞둔 요즘은 사회복지사라는 꿈을 ‘발견’했다. 사회복지학과는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몇 곳 있는데다, 사회복지사로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아직은 많다고 알고 있어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학교에 다니는 내내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 공부가 싫어서라기보다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입이나 취업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텐데, 학생비자나 취업비자를 받지 못한다면 어차피 나는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는 ‘불법’이 될 텐데, 이런 내가 공부를 잘해서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등록금에 대한 부담감도 한몫했다. 아버지는 오래전 공장을 그만두고 간간이 동네 농사일을 돕고 있는데 그 일로 받는 돈은 우리 여섯 가족의 생활비로도 빠듯하다. 내가 대학에 가면 동생들은 지금보다 더 갖지 못하고 더 누리지 못할 터였다. 지금도 또래보다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 동생들이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다시 문 닫힌 커피숍 쪽으로 걸어가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인터넷에 아직 커피숍 정보가 남아 있어서 폐업한 줄 몰랐다며, 그새 다른 커피숍을 알아봤으니 그쪽으로 가자고 말했다.
덥죠?
네, 정말 더워요.
일찍 왔어요?
버스 배차 시간이 길어서 어차피 시간에 딱 맞춰 오는 건 어려워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가 찾아낸 커피숍이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음료 두 잔을 시킨 뒤 우리는 곧 빈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간간이 내 근황을 물으며 가방에서 서류와 노트북을 꺼냈다.
인터뷰가 곧 시작될 터였다.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다. 꿈을 묻는 말에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발견’했다는 내게 그녀가 직업 말고 그저 하고 싶은 걸 생각해보라고 말한 순간, 혼자 떠나는 여행을 떠올리리라곤….
나는 거리낌 없이 출국 심사대를 지나 비행기를 탄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 커다란 배낭을 메고 무작정 걷다가 저녁이 되면 그곳 어딘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불꽃놀이, 모닥불, 따뜻하게 구워진 음식, 웃음소리, 밤벌레 소리, 나무 냄새…….
밤이 깊어간다.
누군가 내게 기분 좋으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좋은 게 아니라고 나는 대답할 터였다.
내 삶에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으니까.
그 말끝에서, 나는 자유롭게 웃게 되리라.
조해진 소설가
*동료시민 이주민: 인구절벽으로 나아가는 한국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는 선택일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이주인권’을 소재로 한 소설가들의 연속 기획을 선보인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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