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독일에서 발행된 50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얼굴. 그가 평생 연구한 곤충을 상징적으로 그려 넣었다. 나무연필 제공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가 끝나갈 때쯤, 한 여성이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곤충과 식물을 직접 그리고 설명한 책을 펴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화가이자 곤충연구자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1647~1717)이 엮은 <수리남 곤충의 변태>(금경숙 옮김, 나무연필 펴냄)다. 책에는 60여 개의 꽃과 어우러진 사실적이면서 아름다운 곤충 그림 동판화가 실렸다.
이 책은 우아하고 고전적인 17~18세기 유럽 동식물 화집의 대표작인 동시에 지성과 뚝심을 겸비한 어느 여성과학자의 유산이다. 저자 메리안은 독일에서 고액권에 얼굴이 실릴 정도로 유명하고 특히 과학사·여성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집요한 관찰력으로 곤충학 연구를 거듭하고 섬세한 세밀화 스타일을 구축해 자연사 일러스트의 선구자가 된다. 또한 곤충 연구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메리안의 새아버지 야코프 마렐이 그린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초상>(1679). 나무연필 제공
당시 유럽인들은 혐오스러운 곤충이 부패물에서 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생물학자와 곤충학자가 17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애벌레·번데기·성충이 단일 개체의 발달단계라는 주장을 폈고, 메리안은 그들과 교류하며 곤충 생태를 직접 기록해 화집으로 남겼다.
메리안은 164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자였던 친아버지를 세 살 때 여의고 새아버지 밑에서 자란 메리안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새아버지의 지도 아래 양피지 다루는 법과 수채화를 배웠다. (당시 독일 화가 길드에서는 여성의 유화 작품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다.) 메리안은 어린 시절부터 관찰을 통해 애벌레에서 아름다운 나비와 나방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고, 애벌레를 기르면서 곤충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출판과 인쇄업의 중심지였고, 메리안은 그의 그림을 본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동판에 그림을 새겨 책을 출간했다.
결혼 뒤 두 딸을 낳은 메리안은 부유층 여성들에게 그림과 자수를 가르쳐가며 28살 때 채색 동판화집 <꽃 그림책>(1675)을 낸다. 이때 곤충은 꽃을 돋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식이었다. 1674년 곤충의 변태를 진지하게 연구할 결심을 한 그는 1679년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독특한 꽃 먹이>를 내며 곤충과학자로서 공식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메리카에서 ‘인디언 재스민 나무’로 부른 식물. 한국어로는 ‘붉은꽃플루메리아’라고 부른다. 한국어판은 라노출판사에서 네덜란드 왕립도서관의 감수를 받아 펴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수리남 곤충의 변태>(2006)에 정리된 학명을 참고했다. 항목명 아래 메리안이 사용한 이름, 한국어 이름, 영어 이름, 학명, 분류체계를 정리했다. 나무연필 제공
개인사는 풍요롭지도, 순탄하지도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편을 떠나 메리안은 어머니와 두 딸을 데리고 네덜란드 북부 마을에 있는 개신교의 한 종파인 라바디파 공동체에 들어간다. 라바디파는 평등주의와 경건주의 운동을 지향했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의 미네르바’라고 일컫는 안나 마리아 판 스휘르만의 자취가 공동체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스휘르만은 모든 여성이 제약 없이 학문을 하고 재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의무라고 봤다. 그러나 세속을 등진 채 검박한 삶을 추구한 이곳은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매혹됐던 메리안과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1690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공동체를 떠난 메리안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지식인·예술가와 교류했고, 동인도회사의 관리자이며 지도제작자인 니콜라스 비천과 메리안의 작품에 매료됐던 러시아 표트르대제와 만나게 된다.

“수박은 네덜란드의 오이처럼 땅바닥을 향해 뻗으며 자란다. (…) 과육은 반짝이며, 입안에서 설탕처럼 녹는다. (…) 가장 평범한 애벌레가 가장 아름다운 나방과 나비로 변하는 일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고 메리안은 적었다. 나무연필 제공
52살에 둘째 딸을 데리고 1699년 수리남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1701년까지 관찰과 연구를 이어갔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 속에 선주민의 지식을 전수받고 동식물을 기록하던 메리안은, 열대병에 걸려 예상보다 일찍 귀국길에 오른다. 살아 있는 곤충을 관찰한 뒤 양피지에 세밀하게 그린 그림은 동판화로 옮겼다. 네덜란드어로 만든 이 책은 라틴어판, 영어판으로도 나왔다.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메리안의 세밀화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15~17세기에 꽃피운 플로럴리지엄(식물 화보 선집)의 전통 가운데 있는 저작이라고 평가했다. 플로럴리지엄은 당대 출판의 최고 기술을 집약한 결과물이었고, <수리남…>과 이번에 함께 번역돼 나온 <새로운 꽃 그림책>(허정화 옮김, 나무연필 펴냄)의 1680년 초판은 2011년 6월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92만5826달러(당시 한화로 약 10억646만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임소연 과학기술학 연구자(동아대 교수)는 메리안의 작품이 서구 근대과학 발전에 수공예 기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열정적으로 삶을 불태운 17세기 코즈모폴리턴이자 여성과학자 겸 화가인 한 인물을 전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3만3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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