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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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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갔던 노회찬의 실사구시

한국 진보정치사 망라한 평전, 이광호 작가 4년 동안 221명 인터뷰해 펴내… “흔들리던 다양성 가진 ‘슬기로운 이중생활’ 포착하려”
등록 2023-07-14 11:18 수정 2023-07-16 03:23
2005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시절 노회찬.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2005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시절 노회찬.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4년이다.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사람을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몰랐던 사람을 이렇게 만나 알아갈 수 있구나 싶었다.”

2023년 7월23일 5주기를 앞두고 <노회찬 평전>이 나왔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기획한 600쪽짜리 ‘정본 평전’인 동시에 한국 진보정치사를 망라한 책이다. 출판사 사회평론아카데미는 출간과 동시에 중쇄에 돌입했다. 7월12일 현재 3쇄를 찍고 4쇄를 눈앞에 둘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노회찬(1956~2018)이라는 불세출의 정치인을 사후에 만난 이광호 작가는 기자 출신으로 <미디어오늘> <노동과 세계> <진보정치> <레디앙>을 창간했다. 재단의 요청으로 집필을 시작한 2019년 7월부터 4년 동안 221명을 인터뷰하고, 원고지 3600장을 썼다. 그중 책 한 권 분량을 덜어낸 뒤 원고 1300장으로 책을 완성했다. 7월1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이광호 작가를 만났다.

<노회찬 평전>을 쓴 이광호 작가. 박승화 선임기자

<노회찬 평전>을 쓴 이광호 작가. 박승화 선임기자

‘구원과 깨달음’, 오버가 아니라 진심

―처음엔 집필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제안을 수락한 것이 2019년 5월이다. 개인적으로 노회찬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다. 평생 후회할 짓 하지 말자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노회찬의 첫인상은 어땠나.

“1992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으로 일할 때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노회찬을 만났고, 큰 인상은 없었다.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일했지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회의 중 노회찬 서거 소식을 듣고 ‘악’ 비명을 질렀다. 비현실적이었다. 상상도 못한 일,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책을 쓰고 나서 노회찬에 관한 인상이 달라졌나.

“파면 팔수록 생각보다 훌륭했던 정치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것도 있지만 노력이 대단했다. 어떤 사람인데 저런 꾸준함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추적하다 탁 걸린 게 1982년 직업학교 때의 일이다. 노회찬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구원과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썼다. 20대 중후반인데, 약간 오버하는 게 아닌가 했다. 그저 ‘전두환 정권에 맞서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고쳐야 하니 힘들지만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정도가 상식 수준 아닐까. 그런데 종교적 단어까지 써가며 얘기하니까. 2~3년간 쭉 인생을 추적하다보니 그게 노회찬의 진심이었다는 점을 알게 됐다.”

1981년 노회찬은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 직업노동운동가, 직업정치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참당암 결의’라 일컫는다. 이 사진은 참당암에서 나온 직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노회찬재단

1981년 노회찬은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 직업노동운동가, 직업정치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참당암 결의’라 일컫는다. 이 사진은 참당암에서 나온 직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무신론자라고 했지만 그 대목은 마치 사제처럼 들린다.

“노회찬에겐 자녀가 없었고 어떤 개인적인 자산 증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에겐 역사를 접하는 독특한 태도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잡설’이라는 글을 썼는데 소크라테스, 차이콥스키, 나폴레옹, 헤겔, 김일성, 예수와 대화하는 내용이었다. 자신도 그렇게 역사 속에 반영되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있었다고 봤다. 어릴 때 일기를 보면 ‘금욕’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유물론자를 지향했지만 종교적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결정적 결단을 내릴 때 절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 때도 한 달 동안 화엄사에 갔고, 1981년에도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 가서 ‘직업혁명가’ ‘직업정치인’이 되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노회찬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려 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자기를 수단으로 던진 것이다. 그 속엔 깊은 자기애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이타적 삶이지만 사실은 자기 삶을 정말 풍부하게 산 사람이라고 보는 거다. 그걸 강조하고 싶다.”

―개인사에도 처음 밝혀진 내용이 있더라.

“가족사의 잃어버린 고리가 있다. ‘실향사민’ 얘기다. 전쟁포로가 아닌 월남 민간인 가운데 월북을 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명단 속에 노회찬의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 이종사촌의 이름이 있었다. 그 사실은 어머니 원태순씨에게 평생 여진을 남겼다. 연좌제가 살아 있던 시절 자의에 의한 귀향(월북)은 주홍글씨였다. 노회찬은 생전에 비극적인 가족사를 털어놓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상당히 다른 성격이셨다고.

“예술은 어린 시절 집안 가득한 냄새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일기를 보면 혼자 정명훈 피아노 독주회에 가서 위로받고 즐기기도 했다. 첼로를 배운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팔십의 나이에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외국 작가 초대전을 보러 가는 예술애호가였다. 강하고 엄격한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의 영생여고보 동창인 홍현죽씨를 인터뷰했다. 1930년생이신데 기억을 떠올리느라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했다. ‘태순이가 치매에 걸려서 아들의 부고를 듣지 못한 것에 감사기도 드렸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첼로를 켜는 고등학생 노회찬. ⓒ노회찬재단

첼로를 켜는 고등학생 노회찬. ⓒ노회찬재단

‘드립’의 신이지만 경청도 잘해

책의 앞머리는 2004년 3월20일 한국방송(KBS) <심야토론>에서 시작한다.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여야 5개 정당의 ‘싸움꾼’ 의원들이 맞붙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만 30만 명이 운집했다. 애초 민주노동당 토론자는 노회찬이 아니었지만 전투력 강한 그가 교체 투입됐다. 대중에게 ‘듣보잡’ 정치인이던 노회찬은 마침내 입을 열었고 첫 발언에서 ‘빵’ 터트렸다. “열린우리당의 높은 지지율은 길 가다가 지갑 주운 것처럼 횡재한 건데, 이거 경찰서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 민주당에서는 조건부 탄핵이라고 했는데, 사과하면 끝날 일을 가지고 대통령을 탄핵한 겁니까? 길거리 가다가 부딪히면 사과하면 될 일인데, 사과 안 했다고 찌르는 불량 학생과 뭐가 다릅니까?” 양당을 비판하는 ‘양비론 짱돌’을 들고나온 노회찬만 웃지 않았다. 마무리 발언에서 노회찬은 말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첫 텔레비전 토론에서 청산유수로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노회찬이 구사하던 대중적이면서도 고급스럽고 날카로운 유머, 살아 있는 정치 언어가 지금처럼 필요한 때가 없었다.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 언어, 알아듣기 쉽고 핵심을 찌르면서 대중적인 언어 말이다. 국민이 ‘저 사람은 그래도 내 편이네’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 없다. 지금은 유혈이 낭자한 정치언어들만 오간다. 쟁점이 되고 토론해야 할 것들을 배제하는 용어를 쓴다. 예컨대 ‘괴담’이라 말하면서 유언비어 이상으로 낙인찍는 거다. 그러니 문제를 공론의 장에 올릴 수도 없다.”

2018년 7월24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회찬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7월24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회찬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싸움’보다 ‘대화’를 하려던 사람인 것 같다.

“노회찬은 어떤 사람의 말이 어처구니없어도 그 말을 할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봤다. 그걸 인정하고 들어가는 일상의 태도가 너무 많이 느껴져서 책을 쓰며 나 자신도 그렇게 변화하려 노력했다. 그는 상대를 때려잡아서 전쟁하듯 한 게 아니라 진보의 가치가 지닌 보편성을 말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드립의 신’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같이 잘 살자’며 꺼낸 비유가 있다. (부유세를 주장하며) ‘옆에서 굶고 있는데 암소갈비 뜯어도 되느냐, 암소갈비 뜯는 사람들이 불고기 먹으면 옆에 있는 사람은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나는 이게 갈비를 다 가져오자는 것보다 더 혁명적인 이야기라고 본다. 보수는 모두 문제고 진보는 도덕적이고 무결점, 무오류라는 게 아니다. 이런 비유의 바탕엔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공부가 있었다. 그런 얘길 듣고 사람들이 ‘내 편’이라 느끼며 신뢰를 줬던 거다.”

―타고난 것이 아니었나.

“노회찬의 말 잘하는 비결을 알아냈다는 기사(<인터넷 한겨레> 2017년 9월1일 ‘노회찬의 이슈 관리 비법’)를 보면, 에버노트에 100개 이상 폴더가 있고 해시태그가 400~500개 있어 정보를 관리한다고 했다. 농수산물 개방 문제라든지 자동차 관세라든지 구체적이고 다양한 주제에 막히는 게 없었다. 평소 저장한 정보를 어떻게 잘 저작해서 대중에게 보여줄지 고민했다.”

―반면 평소에는 말이 적었다고.

“조직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고독한 사람이었다. 노회찬도 인간인데 어려움을 누구와 얘기했을까 생각해봤는데, 배우자(김지선씨)나 오래된 친구나 그가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이 주위에 한 명도 없었다. 노회찬은 사적인 얘기를 하는 게 두렵고 어렵다고 했다. 1983년 노동운동을 하러 인천에 갔던 20대 중후반 이후 ‘개인’은 없었다. 오죽하면 집안 행사 중 유일하게 간 게 자기 결혼식뿐이라고 했겠나. 기질적인 건지 뭔지,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게 있었다.”

제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31일, 국회에 등원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 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노회찬재단

제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31일, 국회에 등원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 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노회찬재단

반정치 정서는 기득권층에 득이 된다

2004년, 1960년 4월혁명 이후 44년 만에 처음으로 진보정당 의원 10명이 탄생했다. 노회찬은 “당사에서 걸어서 5분, 차로는 1분 걸리는 거리를 정치적으로 오는 데는 5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노회찬은 ‘정치’를 중요한 공적 문제의 합의 과정으로 봤고 정치를 진흙탕 싸움으로 폄하하는 것이야말로 기득권층이 노리는 반정치 정서의 토양이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국회 정치는 ‘지하운동’과 차원이 달랐다.

―노회찬은 ‘사상투쟁’에 몰두하는 ‘골방 진보’와 달랐다.

“물론 나머지를 그저 싸잡아 ‘골방’이라 비판하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노회찬은 달랐다. 대중은 우리를 점수 매기는 사람이지 우리의 생각을 집어넣어 우리 편으로 끌어당기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실사구시, 생활진보 그리고 ‘세속화’라는 표현도 썼다. 문제의식은 같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다. 지하에서 혁명운동을 한 사람이 지상으로 올라와 어쩌면 저렇게 대중정치인으로 살게 된 건지 놀랍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노회찬이 말하는 ‘혁명’은 무엇이었나.

“그는 정권이 바뀌는 것과 세상이 바뀌는 것을 분명히 구분했다. 촛불로 권력을 바꿨어도 일상은 안 바뀌지 않았나. 노회찬은 ‘사회의 공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공기’는 노회찬의 고유한 표현이었다. 지역에서 태어나도 아이를 잘 키우고, 학교를 잘 보내고, 비정규직 차별을 받지 않고, 악기를 하나씩 하는 이런 소박한 일상의 변화. 일상을 바꾸는 길은 진보정당의 장기 집권으로 가능하다고 봤다.”

노회찬은 주요 정파들의 교조적인 노선을 비판했다.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 분단에서 시작한다는 민족해방파(NL)와 계급갈등과 모순을 중시하는 민중민주파(PD)로 진보 진영이 나뉜 상황에서 관념과 교조를 극복하려 ‘실사구시’를 추구했고, 이것이 진보의 생명이자 기본 노선이라 봤다.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결성과 1997년 국민승리21,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때 두 진영은 함께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에도 만나고 헤어지길 거듭했다.

노회찬 김지선 부부 결혼식. 노회찬은 노동운동가였던 김지선을 동지로서 존경하고 신뢰했다. ⓒ노회찬재단

노회찬 김지선 부부 결혼식. 노회찬은 노동운동가였던 김지선을 동지로서 존경하고 신뢰했다. ⓒ노회찬재단

―‘NL 대 PD’ 정파 싸움에선 어떤 입장이었나.

“노회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진보의 재구성’을 말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례에서 보듯 실패했다. 통합진보당이 깨지기 전 이석기, 유시민, 심상정이 만난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밝힌 것이다. NL과 PD뿐만 아니라 (민주당계) 자유주의도 포함해 더 높은 가치와 전망 속에 진보를 통합해냈으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는 좋은 본보기가 됐을 것이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았던 페미니스트’라고도 평가했는데.

“사회적 약자가 겪는 차별과 괴롭힘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다른 당에서 국회의원 성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 누군가 ‘그것 가지고 의원직을 사퇴하냐’고 했다가 노회찬이 강력히 문제를 제기해서 굉장히 당황했다고 하더라. 연합정치를 실천할 땐 담대하고 유연했는데 원칙을 지킬 때는 무서울 정도로 양보 없이 단호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 첫 공식 일정으로 국회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노회찬재단

2012년 제19대 국회 첫 공식 일정으로 국회 청소노동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노회찬재단

직업정치인 “이 일 좋아하고 일도 잘해요”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성실하게 성찰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잘 쓰는 표현이 있다. ‘직업전투원’과 ‘70%의 긴장’이란 말이다.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노회찬이 일관되게 견지했던 태도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노회찬한테는 ‘직업’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직업운동가’ ‘직업정치인’이란 말을 꼭 썼다. 어머님께 쓴 편지 속에 ‘나 사실 이 일을 좋아하고 일도 잘해요’라고 얘기했다. 힘든 시절에 조카에게는 ‘내가 좋아서 이 힘든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행복한 사람이었다. 노회찬의 직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실패도 많았는데.

“대선 후보에 세 번 나와 다 실패했고, 3선 의원인데 한 번도 임기를 못 마쳤다. 삼성과 검찰의 기득권 동맹군과 사법부 카르텔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뒤 보궐선거에도 낙선했다. 그걸 2016년 경남 창원의 보통 사람들이 부활시켜줬다. 선거운동을 할 때 기흉이 생겼는데 폐에 피주머니를 달고 정말 열심히 했다.”

2016년 경남 창원성산구에 출마한 당시 노회찬. 문재인 당시 더민주당 대표가 지원유세에 참석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2016년 경남 창원성산구에 출마한 당시 노회찬. 문재인 당시 더민주당 대표가 지원유세에 참석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운동권 출신 정치인 가운데서도 성찰 없이 ‘변절’한 이들이 있지 않나.

“노회찬은 역사가 발전한다는 점을 믿었다. 그 역사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려 했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삶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이다. 대중의 편에 서서 세상 바꾸는 일을 굉장히 사랑했고, 그러니까 자기애가 있었고, 이를 훼손하는 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 봤다.”

―책을 보면, 노회찬만의 존재론이 있었던 것 같다.

“타인이 나를 몰라주면 견딜 수 있지만, 내가 나를 몰라주면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고 노회찬은 말했다. 고등학교 때 일기장에 쓴 표현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됐을 때 나는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수십 년 전 생각이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과 연결하기 어려워 책에는 쓰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초지일관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삶에서 품위가 없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을까.

“그만큼 엄격했다. 마지막 선택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책에서 빼는 것도 그래서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스럽게 썼다. 그에게 당은 확장된 자아였다. 그의 삶을 보면 (마지막은) 허겁지겁 선택한 결정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냉철한 계산과 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결합해 나온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을 지속하기 위해 자기 숨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게 아프긴 하지만…. 그건 분명한 것 같다. 삶의 무게가 있는데 얼마나 존재론적으로 깊은 고민이 있었겠나.”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노회찬의 묘소에 조화가 놓여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노회찬의 묘소에 조화가 놓여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노회찬을 호명하는 사람들

―지금 노회찬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인가.

“노회찬을 호명하는 사람이 많아 속상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약 노회찬이 마지막 선택을 하지 않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여기저기 장기판 위의 말처럼 호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전 저자로서 어떤 점이 기록됐으면 하는가.

“노회찬이 스스로 썼어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 인민노련의 전모를 아는 사람도 노회찬 한 명밖에 없고, 글도 너무너무 좋고, 갖은 정보와 기록도 있었을 텐데. 역사적 사료의 유실이란 측면에서도 큰 손실이다.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삶의 뿌리와 줄기를 가졌으면서도 미식을 즐기고 음악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이중생활’을 하던, 하늘하늘 흔들리던 다양성을 가진 인간이었다. 내가 (평전 집필이라는) 과분한 일을 했는데, 감사하게도 그런 사람의 삶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가웠다. 독자는 이 책에서 각자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 있는 발견은 나의 말이 아니다. 고인의 일기나 기록에서 인용한 100% 노회찬의 말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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