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에 실린 일제의 고문들, 이보다 더 야만적일 수는 없다

1933년 망명지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되던 당시 44살 홍남표. 동아일보 1933년 6월1일. 임경석 제공
홍남표(37)는 언론인이었다. 3대 조선어 신문 가운데 하나인 시대일보의 지방부장에 재임 중이었다. 1926년 6월 6·10 만세운동 당시에 그랬다. 지방부장이란 당시 총 4면 발행하던 신문지면 가운데 ‘지방면’의 편집을 책임지는 편집국 간부다. 지방면은 서울 이외 조선 13도 각 지방의 시·군 단위 소식을 싣는 지면이었다.
홍남표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그는 조선공산당원이었다. 단지 가맹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간부의 일원이었다. 7명으로 이뤄진 중앙집행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해 5월2일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뒷날 6·10 만세운동이라고 부르게 될,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전국적 범위의 대규모 군중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는 데도 참여했다. 홍남표는 6·10 만세운동의 기획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신문사 지방부장 직책은 합법적 신분과 생계를 보장할 뿐 아니라, 비밀결사 활동에도 유리했다. 각 지방 지국과 연락하거나 지방 출장을 손쉽게 다녀올 수 있었다. 각 지방의 야체이카(세포단체)와 연락을 유지하는 데 적합했다. 그래선지 조선공산당은 이 당시 조선어 신문사의 지방부장 직책을 둘이나 장악하고 있었다. 홍남표는 시대일보 지방부장이고, 조선공산당 서울시당 위원장인 홍덕유는 조선일보 지방부장에 재임 중이었다.
홍남표는 6·10 만세운동 직후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 6월23일 새벽에 서울시 예지동 128번지 자택에서 종로경찰서 경찰대에 체포됐다.1 그가 체포된 까닭은 증거가 발각됐거나 먼저 체포된 동료의 발설 때문이 아니었다. 고등경찰의 심중 의심 때문이었다. 홍남표는 잘 버텼던 것 같다. 체포된 지 보름이 지난 7월7일, 증거불충분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됐다.2
경찰이 그를 일단 풀어주기로 결정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추후에 증거가 발견되거나, 체포된 다른 피의자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토설된다면 언제라도 다시 붙잡아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홍남표는 일단 석방됐지만 다시 붙들려가게 되리라고 예견했다. 그는 국외 망명을 결심했다.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 국경을 넘었다. 중국 단둥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망명지에 안착한 홍남표는 자신이 겪은 야만적인 고문 실상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 1926년 11월30일 지면에 일본 경찰의 악행을 고발하는 통렬한 폭로의 글을 게재했다.3 거기에는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했거나 동지들이 겪은 고문 사례가 생생히 실려 있다. 이 글은 ‘이홍구’라는 가명으로 발표됐다. 연구자 박경목 교수가 밝혔듯이, 이 가명을 사용하는 자는 곧 홍남표이다.4
경찰서 취조실에 잡혀 들어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막론하고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은 집단 구타였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형사들의 구둣발길이 좌우에서 날아왔다. 온몸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때리고 찼다. 죄가 있든 없든 그랬다. 피의자의 얼을 빼놓으려는 목적이었다.
죄가 있다 싶으면 더 나아갔다. 삼줄로 꼬아 만든 굵고 튼튼한 밧줄로 손과 발을 결박했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피의자를 에워싸고 경관 두세 명이 둘러섰다. 그들은 우신봉(牛腎棒)을 휘둘렀다. 속칭 ‘쇠좆매’라고 부르는, 소의 음경 속에 철봉을 박아넣고 말린 몽둥이였다. 취조실의 경찰은 누구나 이것을 지팡이 삼아 짚고 다녔다. 그들은 머리, 가슴, 팔다리를 가리지 않고 난타했다. 30분가량 폭행만으로도 피의자를 기절시킬 수 있었다. 정신을 잃으면 경찰에 배속된 의사를 불러서 회생케 했다.
홍남표도 이 관문을 거쳤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만족할 만한 진술을 받아내지 못한 취조관들은 홍남표의 옷을 모두 벗겼다. 양팔을 등 뒤로 돌렸다. 한쪽 팔은 어깨 위로 돌리고 다른 팔은 허리 쪽으로 돌려 등 뒤에서 마주치게 하고, 엄지손가락 두 개를 묶었다. 경찰은 천장에 박아놓은 쇠고리에 밧줄을 걸어 한쪽 끝을 피의자 등 뒤 엄지손가락 매듭에 연결하고, 다른 끝을 거머쥐었다. 밧줄을 잡아당기면 홍남표의 몸뚱이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비행기 태우기’였다. 경찰은 피의자를 승강기처럼 오르락내리락 조종했다. 홍남표는 온몸에 땀을 흘리고, 고통에 못 이겨 대소변을 지렸다. 혀를 빼물고 죽음과 같은 통증을 겪었다. 취조관들은 자기네들끼리 담소를 나누면서 낄낄거리곤 했다. 홍남표는 하루 걸러 두 차례나 이 고문을 당했다.
또 있었다. 저들은 십자가를 이용했다. 홍남표를 발가벗긴 뒤 사지와 머리를 십자가에 결박했다. 꼼짝할 수 없었다. 머리를 아래쪽으로 다리를 위쪽으로 향하게 한 채 십자가를 35도쯤 비스듬하게 세웠다. 그런 자세로 물고문을 가했다. 뜨거운 물과 찬 물을 교대로 얼굴에 쏟아부었다. 입과 콧구멍으로 물을 들이켠 홍남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요동쳤다. 요동 끝에 결박한 머리가 풀리기라도 할 것 같으면, 가차 없이 구둣발이 머리를 짓이겼다. 복부에 물이 차고 숨이 막혀 호흡하지 못한 채 축 늘어지면, 배에 찬물을 인공으로 밖으로 통하게 하여 소생시켰다. 깨어난 피의자는 같은 고문을 계속 받아야 했다. 홍남표는 이 고문도 두 번이나 당했다고 토로했다.
손가락 고문도 당했다. 손가락 사이에 철봉을 끼운 채 손가락 끝을 포승으로 결박한 후 잡아 비트는 악행이었다. 살과 뼈가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흥남표는 이 고문도 직접 겪었노라고 얘기했다.
홍남표뿐만이 아니다. 6·10 만세운동과 비밀결사에 연관된 혐의로 체포된 사회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고문을 당했다. 홍남표는 경찰서 유치장 수감 중에 목도하거나 전해 들은 동료들의 피해 상황도 낱낱이 기록에 옮겼다. 홍남표보다 이틀 늦게 대구에서 체포됐다가 서울로 압송된 이상훈(李相薰)은 32살의 보통학교 교사였다. 그는 종로경찰서에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악행을 당했다.5
“수신인(受訊人)을 나체로 하고 삼각 죽편(竹片)을 팔이나 볼기나 넓적다리에 수없이 승(繩)으로 합박(合縛)하고, 1개씩 잡아 뽑으면 살이 벗어져 뼈가 드러나 아픈 것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것.” 6
그자들은 벌거벗긴 이상훈의 팔과 엉덩이, 넓적다리에 잘게 자른 대나무 조각을 대고서 노끈으로 겹겹이 묶었다. 단면이 삼각형이 되도록 뾰족하게 자른 조각들이었다. 취조관들은 피의자를 고통에 빠트리기 위해서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좋았다. 살갗에 맞닿은 삼각 죽편을 하나씩 뽑아내기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거듭된 죽편 뽑기로 인해 이상훈의 살갗이 벗겨지고, 벗겨진 자리에서 뼈가 드러났다.

일본 경찰이 6·10 만세운동 투사들에게 자행한 고문을 폭로한 홍남표의 가명 기사. 독립신문 198호, 1926년 11월30일. 임경석 제공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의 두 중앙 간부인 이지탁(李智鐸)과 김경재(金璟載)도 혹독한 고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홍남표는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두 동료가 당한 고문의 상처를 목격했다. 상처가 난 경위는 이러했다.
“마승(麻繩)으로 양수(兩手)의 손목으로부터 어깨까지 칭칭 감아서 혈액의 순환을 불능케 하여, 양수를 묶어 공중에 달고 잔 채로 난타.”
경찰들은 피의자의 양팔을 칭칭 동여맸다. 질긴 삼줄로 손목에서 어깨에 이르기까지 수십 바퀴를 돌려 감았다. 혈액 순환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피의자를 공중에 매달았다. 온몸의 체중이 동여맨 팔뚝에 실렸다. 공중에 매달린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그자들은 거기에 더하여 무자비하게 난타까지 했다.
이지탁은 이 고통을 견뎌냈다. 6·10투쟁지도특별위원회 위원 세 명 중 한 명인 그는 자신의 역할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비밀결사와 6·10 만세운동의 내적 연관을 끝끝내 부인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 부과될 형벌 수준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지하운동의 비밀도 보존했다. 그러나 김경재는 이때 고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다. 경기도 경찰부의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이름 곁에는 ‘귀순자’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7 경찰에게 협력했음을 의미하는 표시다.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경찰이 요구하는 대로 지하운동의 비밀과 인명을 진술했던 것 같다.
일본 경찰은 악명 높은 전기고문도 자행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이인자라고나 할까, 강달영 책임비서를 보좌하며 비서부를 관장하던 이준태가 이 고문을 겪었다. “전기 철사로 전신을 지져가며 심문하는 형”을 받았다.8 생식기를 희롱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고문도 있었다. 불에 달군 철봉을 음경과 유두에 갖다 대고, 피의자를 나체로 세워둔 채 담뱃불로 음경을 지졌다. 피의자의 음경을 희롱하여 발기하게 한 뒤 대나무 회초리로 그를 타격했다. 6·10 만세운동 참가자들도 같은 유형의 고문을 당했다. 인쇄물 10만 장을 남몰래 찍어낸 인쇄노동자 양재식(楊在植)이 그 꼴을 당했다. 결국 양재식은 생식기능을 잃고 말았다.9
가혹한 고문은 신체 부상과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갔다. 시대일보 기자 박순병은 취조관의 폭압에 맞서 저항했던 것 같다. 홍남표의 기사를 읽어보자.
심문할 때에 조금 강경하다든지 반항하면 철봉 곤봉으로 박살(撲殺)하나니, 그 실례가 많거니와, 최근 6월 사건으로 인하여 박순병 동무가 갈비 3개가 부러지고 대장이 끊어져서 참사한 것이 그의 실증이다.”
박순병의 사망 경위가 드러나 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926년 7월17일이고, 사망한 날이 8월25일이다.10 그 한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문으로 죽게 되자 그는 ‘맹장염’이라는 터무니없는 병명으로 병원에 이송돼 수술받았다. 그러나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홍남표의 폭로기사는 어둠 속에 묻힐 뻔한, 6·10 만세운동 투사들의 고난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일본 경찰이 저지른 17개 유형의 고문 방법을 상세히 묘사했다. 또 여자에게 특별히 부가한 열 가지 고문도 폭로했다. 그의 구체적인 폭로 덕분에 6·10 만세운동에 대한 일본 경찰의 이른바 ‘범죄’ 수사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는지 드러났다. 시대일보 기자 홍남표는 진정한 저널리스트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반동적, 폭압적 본질을 효과적으로 폭로한 유능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1. ‘又復 6명 검거’, 동아일보 1926년 6월24일.
2. 具然欽, ‘朝鮮共産黨と高麗共産靑年會大獄記’, 梶村秀樹,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9 (朝鮮 5), 東京, みすず書房, 1972, 430쪽.
3. 李洪九, ‘왜놈의 惡刑種種’, 독립신문 198호, 1926년 11월30일, 7~8면.
4. 박경목, ‘6·10 만세운동과 일제 경찰의 권오설 등 고문 사건’, ‘제7회 6·10 만세운동 학술심포지엄, 6·10 만세운동의 주체와 전개과정’, 6·10 만세운동기념사업회, 2025년 10월24일, 109쪽.
5. ‘종로서의 급보로 대구 이씨 경성에’, 동아일보 1926년 6월28일.
6. 李洪九, 앞의 글.
7.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共産黨事件ノ檢擧顚末’ 大正15年8月 ; 梶村秀樹,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9 (朝鮮 5), 東京, みすず書房, 1972, 30쪽.
8. 李洪九, 앞의 글.
9. 李智鐸, ‘독립운동과 학생–6·10 만세사건을 회고하며 (3)’, 조선일보 1960년 6월12일, 석간 4면.
10. ‘朴純秉씨 요절’, 동아일보 1926년 8월27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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