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민주노총 건설노조 간부를 겨냥해 ‘죽음을 막지 않았다’고 쓴 <조선일보> 보도가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2023년 5월1일 노동절에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양회동씨가 경찰의 노조 표적 수사에 반발해 분신했는데 현장에 있던 동료 간부가 죽음을 방관했다는 취지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 기사를 근거 삼아 ‘기획분신설 ’을 제기했고 보수단체는 해당 간부를 경찰에 고발까지 했다 . 이에 건설노조는 “사자 명예훼손”이라고 반발하며 <조선일보> 기자와 원 장관을 고소했다.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동료의 죽음을 막지 않았다고 <조선일보>가 겨냥한 건설노조 간부가 < 한겨레21>과 실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부지부장 홍성헌씨다. 인터뷰 자리에는 강원건설지부 지부장 김정배씨도 동석했다.
두 사람은 한동네에서 자랐다. 어릴 때는 서로 몰랐다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가까워졌다. 2019년 가을, 건설노조에 쭈뼛쭈뼛 발을 들인 성헌씨는 마침 가까이 앉은 회동씨에게 말을 걸었다. ‘집이 어디냐’ 물으니 강원도 속초의 한 동네를 말했다. 성헌씨가 사는 곳과 가까웠다. 여덟 살 어린 고향 동생이 성헌씨는 유달리 반가웠다.
“이름이 뭐냐니까 ‘양회동’이라 하더라고. 그래서 ‘너는 이제부터 희동이다’ 그랬죠. 걔가 ‘희동이가 뭡니까’ 그러길래 ‘자식아, <아기 공룡 둘리>에 나오는 희동이 몰라?’ 그랬죠. 그다음부터는 걜 항상 희동이라고 불렀어요.”
두 사람은 2023년 4월 말까지 같은 공사현장을 다녔다. 자연히 출퇴근도 함께 했다. 일 마치고 속초 돌아가는 길에 막걸리를 한잔씩 기울였다. 그러면서 회동씨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아내는 어디서 일하는지 등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한 이념을 바라고 노조에 가입한 건 아니었다.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에 더 나았다. “노조가 없을 때는 아침에 출근해도 현장관리자가 ‘집 가라’ 하면 가야 해요. 급여 6개월씩 밀린 것 달라고 쫓아다니느라 1년을 허비하기도 하고요. 근데 노조 오니까 한 달 일한 급여는 무조건 다음달 15일에 주더라는 거죠. 건설사들이 원래 안 주던 유급 휴일수당도 주고요. 생활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김정배씨)
노조는 조합원의 일감 소개도 맡았다. 실직과 취업을 반복하는 건설노동자의 고용불안이 큰 탓이다. 이를 악용해 불법 하도급 업체를 연결해주고 중간 수수료를 떼어가는 일감 소개업자(일명 ‘오야지’)가 판쳤다. 노동조합은 소개료를 받지 않고 조합원들의 일감을 구하기로 했다.
회동씨도 2022년 1월 노조 가입 2년 만에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의 ‘지대장’이 됐다. 지대장의 역할은 조합원 일감이 끊기지 않게 구해오는 것. 내국인보다 외국인을 선호하고 조합원보다 비조합원을 쓰는 업계 분위기에서 일자리를 찾긴 쉽지 않았다. 공사장에서 집회를 열고 하청업체 쪽에 협상을 요구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회동씨가 부침을 겪을 때면 성헌씨는 자기 방식대로 그를 위로했다. “희동아 힘드냐, 하면 ‘예 힘듭니다’ 그러는데요. 후회하냐고 물으면 ‘후회는 안 합니다’ 그래요. ‘힘들면 형한테 얘기해라, 막걸리 사줄게’ 했죠. 둘이 술도 많이 마시고요.”
웃고 떠드는 시간도 있었다. “술 먹다가 ‘야, 지부장이 무서워, 내가 무서워’ 그러면 ‘형님이 더 무섭습니다’ 그런 농담을 하는 거야. 그렇게 걔가 장난을 잘했어요. 사람이 진짜 밝고 그랬는데….”
노조 하던 자부심은 윤석열 정부 들어 크게 꺾였다. 건설노조가 수사 대상에 오르고 정부가 ‘건폭’(건설업 폭력배)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면서다. “사람을 좀 비참하게 만든달까요. 요즘은 협상 들어가면 20~30분 만에 경찰이 다 도착해요. 우리 회동이도 ‘어디 다니기만 하면 경찰이 붙는다’고, 전화기 도청당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로 심적 압박을 받았어요.” 정배씨의 말이다.
경찰은 건설노조와 하청업체 쪽 연합체(철근콘크리트 서·경·인 사용자연합회)가 맺은 단체협약의 정당성을 부인한다. 노사가 자유롭고 대등하게 협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노조의 협박에 겁먹은 건설사 하청업체들이 어쩔 수 없이 협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회동씨 등 건설노조 간부들이 전임비(조합원이 있는 사업장에서 노조 전임자가 받는 임금)를 노리고 집회 등으로 겁줘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조합원을 취업시켰다고 봤다. 검찰은 공갈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도 청구했다. 5월1일 노동절에 회동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예정돼 있었다.
“나도 늦둥이 5살짜리 아들이 있습니다. 저한테 날아온 영장을 보면 정말 (아들한테) 쪽팔려요. 노동조합 단체가 아니라 정말 사회에서 격리돼야 할 범죄단체처럼 써놨잖아요. 저희는 그냥 일 없어서 쉬는 조합원들 일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전임비를 노렸으면 뭐 하러 힘들게 현장마다 조합원을 80명씩 넣습니까? 대여섯 명만 형식적으로 넣고 전임비 받으면 그만인데요.”(김정배씨)
회동씨도 공갈·협박범으로 여겨지는 것을 괴로워했다. 주변에도 “공갈이란 말만 좀 빠졌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영장실질심사를 사흘 앞두고 성헌씨가 ‘밥이나 먹자’며 연락했다. 회동씨는 거절했다. “제가 왜냐고 물으니 ‘주택청약을 해지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낼모레 심사받으러 가서 구속되면 그 돈으로 가족들 먹고살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내가 ‘야 이 자식아 미쳤냐, 그렇게 고생해서 붓던 걸 왜 깨냐’며 속상해했던 기억이 나요.”
회동씨는 그날 가족과 노동조합, 4개 정당 앞으로 각각 유서를 남기고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앞에서 분신했다. 법원은 회동씨에 대한 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보름 뒤인 5월16일, <조선일보>는 그날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건설 노조원 분신 순간, 함께 있던 간부는 막지도 불 끄지도 않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것이다. 이 기사는 사건 현장을 비추는 폐회로텔레비전(CCTV) 장면과 목격자의 말을 토대로 “(성헌씨가) 분신 준비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고 어떠한 제지의 몸짓도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현장에 있던 성헌씨가 회동씨 죽음을 보고도 방관했다는 취지의 기사였다.
그러나 성헌씨는 그 시각 회동씨와 계속 대화하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회동씨가 한 손에 라이터를 잡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자 대화로 그를 계속 달랬다는 것이다.
5월1일 오전 9시께, 성헌씨는 ‘법원으로 좀 와달라’는 회동씨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이유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성헌씨가 법원에 막 도착했을 때 정배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메신저 단체방에 양회동 유서가 올라왔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물음이었다. 그때 시너를 뿌린 채 법원 잔디밭에 앉아 있는 회동씨가 눈에 들어왔다. 성헌씨가 놀라서 다가가니 회동씨가 ‘가까이 오지 마라’고 소리쳤다.
“이미 시너를 다 뿌려가지고 몸이 허연 거예요. 한 손에 이렇게 (라이터를) 들었는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에요. 똑같은 말을 계속 하더라고요. ‘형님, 저는 억울합니다. 제가 공갈협박범이래요. 우리 애들이 알까봐 겁나요. 저 억울합니다, 형님….’ 제가 진정시키려고 말렸어요. ‘야, 손에 있는 거 빨리 버려라. 내가 지금 (법원) 올라가서 판사 만나게 해줄게. 이 녀석아, 이렇게 죽을 일이 아니잖아.’”
회동씨 연락을 받고 현장에 온 <와이티엔>(YTN) 기자도 그를 말렸다고 한다. “그 사람도 상황이 급박하니까 ‘선생님 우리 이런 거 안 찍습니다, 하지 마세요’ 그랬어요. 그때 걔가 불을 붙여버린 거예요. 그걸 딱 보는 순간 정신이 없는데 옆에서 어떤 여자가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던 거 같아요. 그러곤 펑 하는 소리가 났어요.”
강릉경찰서 관계자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고인이 라이터를 손에 들고 있어 가까이 다가갈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었다”고 부연했다.
<조선일보>는 성헌씨가 “불을 끄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뒷걸음질을 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고도 보도했다. 동료가 죽었는데 휴대전화를 만진 것이 수상하다는 취지다.
불꽃이 인 직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성헌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크게 충격받아 “기억이 끊겼다”고 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지부장에게 소리친 기억은 있다고 했다. “희동이가 죽었다, 빨리 차들 다 돌려서 오라. 희동이가 죽었다.” 그가 전화기에 대고 외친 말이다.
성헌씨는 해당 기사가 나가기 전 <조선일보> 기자의 카카오톡 연락을 받았다. 기자는 ‘왜 동료의 죽음을 막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묻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왜 안 막았냐’고 물으니까 정말 뭐라 답해야 할지 싶더라고요.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 답을 안 했는데 화가 치밀어서….”
사실과 무관하게 <조선일보> 기사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원희룡 장관은 5월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해당 기사를 인용하며 “동료의 죽음을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고 썼다. 보수단체 ‘신전대협'은 성헌씨를 자살방조죄로 고발도 했다. 마치 노조가 회동씨의 죽음을 알면서도 투쟁을 위해 방관한 것처럼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강원경찰청과 정배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정배씨는 그날 오전 9시26분 메신저 대화방에 올라온 유서를 확인하자마자 경찰 쪽에 ‘양회동을 찾아달라’고 긴급 요청했다. 경찰은 담당 수사관을 출동시키고 119에도 구조요청을 했다. 이후 정배씨가 성헌씨와 통화하며 회동씨가 법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경찰에 다시 알렸고, 담당 수사관들이 법원으로 향하던 중 회동씨가 숨졌다. 건설노조가 상황을 미리 알았다고 보기는 힘든 대목이다.
5월18일 <월간조선>은 유서 대필 의혹까지 제기했다. 남겨진 유서 중 글씨가 반듯한 유서와 흘리듯 쓴 유서의 필체가 서로 다르다는 취지다. 건설노조는 이에 대해 “(양회동씨가) 분신 당일 차 안에서 쓴 유서가 있고 미리 써서 밀봉한 유서가 있다”고 반박했다. 필적감정업체 ‘한국법과학연구원’은 건설노조 의뢰로 <조선일보>가 문제 삼은 두 유서의 필적을 대조한 결과 운필방법과 글자 간격, 필순, 획의 특성 등 여러 면에서 유사성이 발견된다며 “같은 필적으로 사료된다”고 5월 22일 결론 내렸다.
“걔(양회동씨)가 왼손잡이라 글씨를 왼쪽에서부터 쓰거든요. 기가 막히게 써요. 그걸 누가 어떻게 대필합니까. 그런 보도를 하는 사람은 진짜 너무한 겁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추측 보도도 아니고 완전 거짓 보도를 하는 거 아닙니까.”(홍성헌씨)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앞 잔디밭에는 풀이 노랗게 탄 곳이 있다. 애써 찾지 않아도 회동씨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음을 알 수 있다. 높다란 나무에 매달린 잎은 그슬렸고 키 작은 풀도 노랗게 변했다.
성헌씨 일상도 회동씨 죽음 이후 급속도로 시들었다. “길을 지나가는데 행인이 몸에 시너 붓고 불붙인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그걸 저한테는 전화해서 와달라고까지 했으니까. 내가 그 일 있고 진짜 딱 20일을 밥도 안 먹고 술만 먹었습니다. 안 그러면 잠을 못 자서요. 속이 술을 못 받는데도 계속….”
성헌씨는 그날 이후 사람 눈을 잘 못 쳐다보게 됐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날에는 되도록 선글라스를 썼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것은 정배씨도 마찬가지다. “한 시간 이상 잠을 못 자요. 30~40분 자다 깨고 어찌저찌 잠들면 또 깨고. 온몸에서 뭔 땀이 그렇게 많이 나는지. 죽지 못해 사는 몸이지.”
<조선일보>가 현장 폐회로텔레비전을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장을 찍은 각도로 보면 검찰청 옆 종합민원실 폐회로텔레비전일 가능성이 크지만, 검찰은 제공한 적이 없다고 했다.
동료의 분신을 노조가 기획했다거나 방조했다는 식의 무분별한 의혹 제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기훈씨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신 작성한 혐의(자살방조 등)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살았다. 이후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유서 필체는 (사망한) 김기설씨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고, 대법원도 재심 끝에 2015년 강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그러나 결백을 주장하려 농성하고 병마까지 겪으며 살았던 24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15년 11월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을 때도 근처에 있던 ‘빨간 우의 입은 사람’이 가해자로 몰려 경찰 조사까지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2017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기획된 극악한 시나리오의 억지 주인공이 될 뻔하다 빠져나왔다. 때론 아직도 그 시나리오가 진행 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람을 펜으로 죽이면 안 되잖아요. 그것도 죽은 사람을 한 번 더 죽이고 산 사람도 같이 죽이려 했잖아요. 검경이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면 저희가 판사 앞에서 법리 싸움이라도 할 수 있죠. 근데 언론은 한 번 쓰면 끝이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양심에 따라 펜을 좀 썼으면 좋겠어요.” 정배씨가 말했다.
“저한테는 사과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유가족한테는 사과하시고 용서를 구하세요. 정정보도도 하시고요.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성헌씨가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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