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논리적이거나 호소력이 있다. 현실은 예상하기 어려운 우연이 가득한데, 거짓말쟁이는 청중의 입맛에 맞게 ‘믿을 만한’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공화국의 위기>에서 집권 연장을 위해 거짓말을 동원하는 현실정치를 비판하며 내놓은 주장이다. 정치인과 정당만 정치 행위를 하는 건 아니다. 2023년 5월16~18일 공개된 <조선엔에스(NS)> <조선일보> <월간조선>의 분신 방조 및 유서대필 의혹 보도는 언론의 ‘거짓 정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각 보도는 기사의 꼴을 갖췄으나, 뉴스의 질은 저급했다. ‘동료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의혹의 중대성에 견주면, 취재진의 사실확인 노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뜻이다. 팩트체크 전문매체 <뉴스톱>의 김준일 수석에디터는 “자살방조는 범죄인데 의혹 당사자 취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 기사에 ‘당사자가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며 면피용 문구를 써놨는데, 이 정도로 큰 사안이면 보도 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당사자나 주변인에게 사실확인을 더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서 위조·대필 의혹을 제기한 <월간조선>은 “굳이 필적감정을 하지 않고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연한 차이가 났다”고 했으나, 유족과 엠비시(MBC)가 문서 감정을 의뢰한 전문가 3명 모두 ‘동일인이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사실이 5월23일 밝혀졌다.
장상진 <조선NS> 대표는 5월24일 <한겨레21>에 “애초 기사에 (일각에서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사실이 다 들어 있다”고 반박했다. 기사에는 홍성헌 민주노총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부지부장이 경찰 조사에서 “내가 도착했을 때 양씨는 이미 온몸에 시너를 뿌린 상태여서 이미 말리기엔 늦어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기사는 홍 부지부장의 말을 ‘익명의 목격자’ 진술로 뒤집는 흐름으로 구성됐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당사자, <와이티엔>(YTN) 기자 등 현장을 가장 잘 알고 신뢰할 만한 이들의 진술을 배척하고 익명 취재원에게 무게를 둔 이유가 충분해야 하는데, 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음성 없는 폐회로티브이(CCTV) 화면을 결합해 무리한 추정만 했다”고 봤다. <한겨레> <경향신문>, MBC 등이 후속 보도로 조선 계열 보도에서 사실에 어긋난 부분을 잇달아 지적했지만, 기사 수정이나 정정 보도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선NS>는 <조선일보>에 온라인 기사를 공급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회사인데, 해당 보도는 <조선일보> 5월17일치 종합면에도 실렸다. 이날 전국언론노동조합과 건설노조가 보도 내용을 바로잡는 긴급 기자회견까지 열었지만,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5월18일 신문 1면과 종합면 하나를 모두 할애해 건설노조 집회를 맹비난했다. 소음, 교통 방해, 쓰레기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내용이었다.
‘건폭’(건설업 폭력배)으로 내몰리며 경찰 수사를 받다가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선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윤석열 대통령, 윤희근 경찰청장이 조선 계열의 ‘불법 시위’ 보도에는 적극 호응했다. 윤 청장은 조선 계열의 보도 당일인 5월18일 브리핑을 열어 “경찰은 일상의 평온을 심대하게 해친 이번 불법집회에 엄중하게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5월23일 국무회의에서 이 집회를 언급하며 “과거 정부가 불법 집회·시위에 경찰권 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결과 확성기 소음, 도로 점거 등 국민들께서 불편을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며 “정부는 그 어떤 불법행위도 방치, 외면하거나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안정국’을 바라는 <조선일보>와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노조의 자율성·도덕성을 깎아내리는 보도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볼 주체는 정부·여당이다. 김민하 시사평론가는 “윤 대통령이 노동개혁을 약속했지만 그 내용이 불분명하다. 그러다 2022년 화물연대 파업에 강경 대응한 게 지지율에 긍정적 영향을 주니, 노동개혁 방향을 노조 단속으로 잡은 듯하다. 단속 근거는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만들어주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이번 보도를 단순 ‘오보’ 사건으로 넘길 수 없는 정치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김준일 수석에디터도 “정부·여당이 노조에 강경 대응하는 건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목적이 있다. 또 중도층에서 반노조 성향이 있는 사람이 꽤 있기 때문에 지지율 상승 효과도 바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이 언론진흥재단의 뉴스검색 서비스 빅카인즈에서 ‘건설노조’를 키워드로 2022년 1월부터 2023년 5월24일까지 보도된 <조선일보> 기사 147건을 살펴본 결과, 정부·여당의 강경 발언에 앞서 건설노조와 ‘조폭’을 연계한 보도가 꾸준히 이어졌다. ‘노조인가 조폭인가’(2022년 1월20일), ‘조폭식 횡포 민노총을 ‘사업자단체’ 규정 공정위, 해법 될 수도’(2022년 4월16일), ‘건설노조 비리는 빙산의 일각, 노동개혁 출발점 삼아야’(2022년 4월28일) 등의 기사와 사설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의 ‘건폭’ 신조어 발언(2023년 2월21일)이나 2022년 5월 취임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건설노조 때리기’ 프레임은 조선 계열 보도로 일찌감치 완성됐다.
이번에 문제시된 보도들은 언론이 진실을 좇는 저널리즘의 취재 원칙·윤리보다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보도 참사’로 기록될 만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5월17일 논평에서 “양회동 열사의 사망과 <조선일보>의 악의적 보도를 일회성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윤 정부의 ‘노조 혐오’ 정책과 (노동) 혐오를 자극하는 <조선일보>의 보도 시스템이 만난 결과”라고 지적했다. 책 <조선 평전>을 쓴 손석춘 건국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는 “(조선 계열 보도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민중운동이 도덕적으로 크게 타격받으면서 보수정권 연장에 성공한 과거사를 되풀이하려는 정치 행태”라고 말했다.
<한겨레21>은 보도를 둘러싼 비판과 관련해 <조선일보> 경영기획부, 선우정 편집국장, 각 취재 기자에게 입장을 물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고소당한 <월간조선> 관계자는 5월23일 <한겨레21>에 “경찰에서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조사 요청이 오면 성실히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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