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5월25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건설노동자 탄압중단 및 수사대상 건설노동자 1000명 인권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유서 대필 사건이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게 되길 바랍니다. 법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어떤 ‘편견’을 가지게 되면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참고자료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제가 겪어온 시절은 아무렇지도 않게 털 수 있겠다는 마음입니다.”
20년 이상을 ‘유서 대필자’로 모함받았던 강기훈씨가 2014년 1월 재심 최후진술에서 밝힌 바람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혐의를 벗었지만 그의 바람은 지켜지지 않았다. 2023년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전국건설노동조합 지역 간부를 겨냥해 자살방조와 유서 대필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이들 매체는 2023년 5월1일 경찰의 표적수사에 반발하며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양회동씨가 분신하자 현장에 있던 강원건설지부 간부를 겨냥해 ‘동료의 죽음을 말리려는 몸짓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양씨가 썼다는 여러 통의 유서도 육안상 필체가 다르다며 ‘유서 위조 및 대필 의혹’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동료가) 양회동씨의 죽음을 말리려고 했다. 그를 자살방조로 입건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유서 필체가 다르다는 의혹은 필적감정업체 감정 결과 같은 필적으로 결론 났다. 하지만 조선 계열 보도는 이미 일파만파 퍼져나간 뒤였다. “동료의 죽음을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 아니냐”(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는 억측이 나돌았다. 인터넷 댓글은 이미 건설노조를 동료 죽음을 정치투쟁으로 악용하는 비정한 집단으로 낙인찍었다.
다시 강기훈을 생각한다. 그는 24년 만에 혐의를 벗었지만 ‘유서 대필자’로 낙인찍힌 삶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유서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신세”라고 말했다. 자신을 가리켜 ‘저런 새끼는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던 노인, 버스에서 그를 알아보고 쌍욕을 하던 승객, ‘유서는 왜 써주신 거냐’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던 업무 파트너를 모두 기억했다. 누군가를 ‘자살방조자’로 보도한다는 건 공동체의 멸시로 그를 밀어넣는 일일 테다. 2023년에도 그런 폭력이 존재한다.
동료를 떠나보낸 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부지부장 홍성헌씨를 인터뷰하는 일은 몇 번이고 망설여졌다. ‘말리려는 몸짓’이 있었는지 그에게 묻는 것조차 폭력처럼 여겨졌다. 조선 계열의 보도로 그는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대중 앞으로 불려와 자기 행동을 해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다. “‘희동이’(양회동씨를 부르던 별명)를 위해서라면 이겨내겠다”고 했다. 이제 ‘조선’이 그 용기에 답할 차례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조선일보> 기사 속 ‘A씨’ 홍성헌 건설노조 부지부장이 말하는 ‘그날’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900.html
팩트보다 정치…‘조선일보’가 가면 정부가 온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899.html
※<월간조선>은 <한겨레21> 표지 기사 마감(2023년 5월 25일) 닷새 뒤인 2023년 5월 30일 ‘분신 사망 민노총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 유서 위조 및 대필 의혹 기사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월간조선>이 필적 감정 업체 2곳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세 통의 유서 작성자가 동일인이라는 회신을 받았다며, 앞서 제기한 유서 대필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것이다. 반면 ‘자살 방조’ 의혹을 제기한 <조선일보>와 <조선NS> 등은 현재까지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은 상태다. (2023년 5월30일 오후 6시20분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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