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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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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집

등록 2023-03-17 12:24 수정 2023-03-21 01:3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2020년 봄, 동료들과 함께해온 청년들의 기본소득 운동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던 중 전화가 왔다. 전화한 사람은 ‘지원주택'을 아는지 물었다. 영구임대주택 같은 거라 생각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알고 보니 기본소득을 최저임금과 흔히 헷갈리는 것처럼 둘은 상당히 다른 정책이었다. 지원주택은 ‘주거 우선’(Housing First)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모델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장애인, 정신질환자, 만성적 노숙인, 가출 및 폭력 피해와 관련된 취약한 청소년, 청년”들이 시설에 가지 않고 지역에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거와 사회서비스를 결합해서 제공한다.(<자립을 위한 집> 참고)

지원주택 현장 속으로

졸업논문을 마무리할 즈음, “너는 결국 네가 이미 잘 아는 사람들에 대해 쓰는구나”라던 교수님의 말이 뼈아팠다. 안전한 경계선 안에서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만 공유하는 논의를 펼친 듯해 부끄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지원주택에 사는 사람들 또는 앞으로 지원주택이 필요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애사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연구에 운명처럼 초대받았다. 거기에 응함으로써 새 여정이 시작됐다.

몹시 긴장했던 첫 인터뷰 날이 생생하다. 일터에서 장애를 얻은 뒤 14년간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다가 지원주택에 입주한 분을 인터뷰했는데, 이사 첫날 밤새 “후리덤”(자유)을 외쳤다는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 ‘집’이란 그런 곳이었다. 나 자신이 될 자유를 주는 곳. 이후 한분 한분의 생애를 들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다.

이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삶의 마디마다 어떤 구조적이고 사적인 폭력과 돌봄이 존재했는가?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용기를 내어 지금의 삶에 이르렀는가? 들려주신 귀한 이야기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됐다.(<좋은 삶 질문집> 온라인 아카이브(goodlifearchive.kr)에서 볼 수 있다.)

생애사 연구 중에 지원주택 실무자 선생님들께 많이 의지했다. 사회복지 노동자로서 이들이 경험하는 세계도 궁금해졌다. 이분들은 어쩌다 이처럼 도전적인 곳에서 일하게 됐을까? 일하며 마주하는 어려움은 무엇일까? 연구는 이분들의 역량 강화에 필요한 교육 기획으로 이어졌다. 이때의 교육은 일방향적인 지식 전달이 아니어야 했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가 말했듯 “자유가 만들어주는 창조적인 친교”를 통해, 일상적으로 트라우마와 번아웃 상태에 있는 실무자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서로를 돕는 일이자 현장의 지식을 만드는 일임을 깨닫는 과정이어야 했다.

지원주택의 주거 우선 원칙을 생각할수록 기본소득이 떠올랐다. 금주나 취업과 같은 조건과 자격을 내걸지 않고 권리를 보장하는 것. 정책을 경험한 이후 삶의 변화 또한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동료 시민을 신뢰해야 가능한 정책이며 모두의 좋은 삶을 지원하기 위한 기본적인 안전망이란 것.

패러다임을 바꾸는 싸움

기본소득 운동과 녹색당 활동을 거치며 주로 ‘정책’ 형태로 대안을 제안했는데, 하나의 정책이 원칙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구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는지 이곳 지원주택에서 배웠다. 딜레마나 난점이 그 자체로 정책의 효용과 의미를 저버리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 과정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애쓰는 사람들의 고민과 시행착오를 잘 성찰하고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외부의 지원이나 자원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쌓은 일상은 이미 새 토대를 만들고 있다. 지원주택에 연루된 삶의 이야기들이 벽과 지붕이 되어 커다란 집을 짓는다. 탈시설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열린 문틈으로 느껴보길 바란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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