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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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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이자 자매’ 같은 딸, 남은 건 사무치는 후회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⑯조한나
바쁜 엄마 대신해 씩씩하게 큰 딸
“엄마는 너 찾으러 갈 건데 나한테 안 오면 어떡하지”
등록 2023-01-25 02:14 수정 2023-01-25 08:41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은혜 입은 사람’이란 뜻의 ‘한나’는 교회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엄마 이애란(51)씨는 한나가 그저 건강하고 순탄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덕분일까. 한나는 어린 시절 병치레 한 번 없이 자랐다. 9살 때 엄마와 갔던 어린이대공원에서 한나는 분수대 앞에서 뛰어놀다 넘어졌지만 울지도 않고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상처 난 무릎을 감싸고 훌훌 털어내는 아이였다.

조한나씨 어머니가 쓴 편지. 유가족 제공

조한나씨 어머니가 쓴 편지. 유가족 제공

막내까지 챙긴 딸, 불러도 가지 못한 때 생각나

직장일로 바빴던 엄마는 학창 시절 한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한 것 같아 늘 아쉬움이 있었다. 씩씩한 한나가 한번은 일하던 엄마에게 “지금 와달라”며 느닷없이 전화를 걸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놀던 친구와 싸운 뒤였다. “싸운 친구는 엄마가 와서 한나한테 뭐라고 했다던데, 나는 일 때문에 아이가 필요할 때 있어주지 못한 게 많이 속상해요.” 엄마는 그날의 한나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엄마는 서점에서 ‘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글귀가 담긴 책을 발견하면 늘 한나에게 선물했다. 엄마는 커가는 한나를 보며 “우리 단짝 친구처럼 살자”고 했다.

그렇게 한나는 엄마의 든든한 친구이자 자매 같은 딸이 됐다. 중학교 때부터 바쁜 엄마를 대신해 늦둥이 여동생의 어린이집 하원을 도왔다. 한나가 알뜰살뜰 용돈을 모아 엄마 몰래 동생과 맛난 음식을 사먹고 온 날이면 동생은 “내가 크면 언니 먹고 싶은 것 다 사줄게”라고 약속했다.

한나는 커서는 당찬 여성이 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쇼핑몰 피팅 모델과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어 쓰고 대학도 모델과에 진학해 프리랜서 모델 활동과 독서실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한창 꾸미길 좋아하고 사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였지만 한나는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고 독립자금을 모아 혼자 살 집도 척척 구했다. “한나는 정말 재밌고 알뜰한 친구였어요. 단 한순간도 아쉽지 않게 열심히 살았던 친구예요.” 고등학교 친구 강민지(24)씨는 그의 단짝을 이렇게 기억했다.

3년 전부터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혼자 살던 한나는 반려견 ‘젤리’(친구들은 ‘리퐁’이라 불렀다)를 새 가족으로 맞아 ‘엄마’가 돼줬다. 한나는 2022년 초 창업에 도전했는데, 그때 연 카페도 반려동물 출입이 가능한 애견동반카페였다. 오래 장사하진 못했지만, 한나는 이 경험을 계기로 다음엔 어떤 사업을 할 수 있을지 구상했다.

한나는 엄마와 1년에 두 차례씩 여행을 다니곤 했다. 동남아로 첫 국외 여행을 간 뒤부터 엄마는 “휴가 때마다 세계 여행을 하자”고 약속했다. 가족은 2022년 12월 겨울에도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한나씨가 키우던 반려견 젤리. 유가족 제공

한나씨가 키우던 반려견 젤리. 유가족 제공

어떻게 발견돼 두 시간을 차가운 바닥에 있었는지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2022년 10월29일, ‘그날’ 이후 한나가 돌아오지 않아서다. 이태원 참사 다음날인 10월30일 오전 9시45분, 엄마에게 관할 지구대 경찰관이 찾아와 한나의 소식을 처음 알렸다. 경찰이 딸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요즘 보이스피싱이 극성이니까” “내 딸이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밀려들었고, 그렇게 한 시간을 울며 집을 나서지 못했다. 아빠와 한나의 오빠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안치된 한나를 먼저 확인한 뒤 도착한 엄마는 머리카락만 보고도 딸이 그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음날 아침 빈소가 차려졌고 엄마와 가족들은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한나의 휴대전화를 찾지 못해, 한나의 친구들에게 부고조차 전할 수 없었다. 엄마는 딸의 장례식이 쓸쓸해 보여 속상했다. 빈소를 찾은 공무원들이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내 딸만 있으면 되는데요. 내 딸이 필요하다고요.” 엄마의 말에 그들은 말없이 고개만 떨궜다.

한나를 떠나보낸 뒤 엄마의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경찰과 소방서를 수소문해 한나를 안치실로 이송한 구급대를 통해 당시 한나가 어떤 처치를 받았는지 조금이나마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재난의료지원팀(DMAT·디맷)과 행인 3명이 30∼4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했고, 자정이 넘은 12시22분에 구급차로 이송되면서 다시 심폐소생술을 받았다고 했다. 사망진단서에 기재된 한나의 사망 추정 시각은 10월30일 자정이었다. “10월29일 밤 10시15분 압사 사고가 발생한 뒤 12시22분 전까지 그 두 시간 동안 우리 아이는 왜 차가운 길바닥에 있었던 건지, 언제 어떻게 발견된 건지 모르겠어요.”(엄마 이애란씨)

한나씨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유가족 제공

한나씨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유가족 제공

친구들은 뒤늦게야 한나의 소식을 알게 됐다. 민지씨는 한나가 며칠 연락이 되지 않아 불안했다. 한나의 친구들은 성남시청과 분당구청, 세브란스병원, 경찰 등에 전화한 끝에 한나가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한나 가족의 연락처나 한나가 안치된 곳을 끝내 듣지 못했다. 민지씨가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한나가 고등학교 때 살던 집을 찾아갔고, 뒤늦은 부고를 접할 수 있었다. 엄마가 혹시나 싶어 분당구청에 “누가 한나를 찾으면 내 연락처를 알려주라”고 당부해뒀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성남시에 거주하는 다른 희생자 4명의 유가족과 연결해달라고 구청과 시청에 부탁했지만 그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 엄마는 참사가 일어난 지 42일이 지난 2022년 12월10일 유가족협의회 창립선언 모임에서 처음 다른 유가족들을 만났다.

한나씨의 백일 사진. 유가족 제공

한나씨의 백일 사진. 유가족 제공

자유롭게 살라고 아이 다 키워준다 했는데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시작한 엄마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일하는 엄마는 한나에게 습관처럼 말했다. “만약 네가 아이 셋을 낳으면 엄마가 다 키워줄 테니까 너는 너 하고 싶은 일 해.” 진심이었다. 한나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한나가 곁을 떠난 지금 엄마는 다시 딸을 위한 삶을 생각한다. “엄마가 무기력하게 울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희가 왜 이렇게 갈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 엄마가 해결해줄게.” 엄마는 한나가 결혼하면 주려고 간직해둔 상자를 요즘 부쩍 꺼내보곤 한다. 상자에는 한나가 신생아 때 입은 배냇저고리와 한나의 배꼽, 백일 사진 앨범 등이 담겨 있다.

“한나야, 엄마 기다려줘. 엄마는 너 찾으러 갈 건데 만약 나한테 안 오면 어떡하지. 너는 더 좋은 엄마 만나야 하는데, (그래서) 엄마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엄마는 아직 한나와의 이별이 버겁다.

장예지 <한겨레> 기자 penj@hani.co.kr

<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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