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월31일 청강문화산업대학교 학생들이 지리산 실상사를 찾아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과 인드라망 세계관을 중심으로 대화하고 대안적 삶을 고민했다. 엄기호 제공
“우리는 우리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달곰의 말은 간명하고 단호했다. 달곰은 전남 남원 지리산 실상사에서 기후위기 시대 문명전환을 결사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재가 불자 활동가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조계종의 개혁과 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한 명망 높은 재가 불자였지만 도시 중심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도법 스님이 계신 실상사로 내려왔다. 소비를 줄이고 지역에서 제 손으로 생산해 함께 나누며 공동체를 일궈 살고 있다.
실상사에 온 사람들은 아마 한결같이 물었을 것이다. 소비를 줄이는 것도 좋고, 자기가 농사지어 나눠 먹는 것도 그 뜻은 높이 사지만 이게 대안일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아무리 기후위기에 문명전환의 세계관을 새로 세워야 한다지만 이런 삶의 양식은 실현 가능성이 너무 떨어진다. 시스템 측면에서 보면 너무 ‘영세’하고, 실천 측면에서 봐도 너무 큰 윤리적 결단을 요구한다. 세계의 ‘시스템’을 대체할 수도 없고, 모든 사람에게 삶의 양식이 될 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가장 많이 나왔을 질문이다. “다 좋은데 이게 진짜 대안일 수 있을까요?”
2023년 11월에 이어 2026년 1월 말 2년 만에 실상사를 나와 함께 다시 찾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학생들도 그랬다. 학생들은 마을 공동체를 둘러보고 활동가들을 만나며 연신 이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했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삶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대안’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 “이것이 대안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질문에 달곰은 예상과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심지어 더 나갔다. “인류 전체가 이렇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대안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생각하는 때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실상사에서 이리 사는 것이 세계의 문명전환과 세계관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이다.
“우리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이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각자의 절실함으로 어떤 삶의 전환이 필요한지 사람들이 질문하게 될 때, 자신들의 대안을 찾기 위해 우리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즉, 대안을 위한 참조점이 되기 위해 정말 이런 삶이 가능한지 끝까지 밀어붙이며 실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무엇이 대안인지를 절실하게 고민할 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것을 참조하며 상상한다. 상상은 밑도 끝도 없는 공상이 아니다. 상상은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되 연결돼 있지 않던 것을 새롭게 연결해 제시하는 일이다. 상상을 통해 새롭게 존재하는 것은 연결과 조합이지 존재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상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새로운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참조점이다.
상상력이야말로 치밀하게 가능성을 중심에 두고 펼쳐진다. 이런 연결이 가능할까, 하는 상상을 할 때 그것이 이미 가능‘했’다는 것이 결정적 참조점이 된다. 달곰은 바로 이 점에서 실상사 공동체가 자신들에게도 ‘실험’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에게도 가능하지 않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참조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말이다. 인류에게 가능한 참조점이 되기 위해 존재를 걸고 실험하는 것이다.
나아가 실상사의 이 실험이 위대한 것은 ‘대안’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기 때문이다. 대안은 누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누가 제시한 대로 따라가는 것은 대안일 수 없다. 제시한 대로 따라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천’이 아니라 ‘수행’에 불과하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수행하더라도 수행은 수동적인 것일 뿐, 어디에 있건 주인이 되어(수처작주, 隨處作主) 그 자리를 진리로 일구는(입처개진, 立處皆眞) ‘주인’의 길이 아니다. 대안은 다른 대안을 참조하며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대안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자세는 “그것은 대안이다/아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대안을 만들기 위해 비춰볼 수 있는 참조점인가 아닌가이다. 도법 스님은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드라망 세계관이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연결된 인드라망의 그물코와 같은 존재다. 이는 단지 서로 연결됐다는 소극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그물코에는 보배 구슬들이 달렸다. 그 구슬은 삼라만상의 다른 구슬을 담고 있으며, 다른 구슬은 또 자기 모습을 담고 있는 그 구슬을 비춘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세계 전체를 비추며 연결돼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의 가능성으로 서로를 참조하며 연결돼 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슬픈 구슬은 다른 존재를 비추지 못하는 구슬이며, 다른 존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구슬이다. 이런 점에서 참조점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의 지금 ‘실상’, 나아가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상’을 보게 하는 구슬이 되는 일이다. ‘실상’사가 참조점으로서 자기의 실천을 극한까지 실험하는 이유다. 실상사가 실험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대안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삶, 우리 문명, 우리 세계‘관’의 실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법 스님은 대화 내내 ‘사실/실상’을 보자는 말을 강조했다. 실상을 봐야 정신을 차리게 되고 비로소 무엇을 할지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나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하는 것의 의미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재밌는 대화가 있었다. 실상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첨단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근심하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지금처럼 인공지능(AI)이 많은 문제의 원인이자 동시에 해법을 찾는 도구가 되는 시대에 실상사와 같은 방식은 너무 수공업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문명의 발전을 너무 거부하는 것도 슬기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 달곰은 웃으면서 명확하게 답했다. “실상사가 AI와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AI를 부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달곰은 9·11 이후 테러와 군사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 기업 팔란티어를 예로 들었다. 팔란티어는 AI를 이용해 테러와 관련된 데이터를 분석하고 국가의 정보기관과 군사 관련 조직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사용됐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침공에도 동원됐다. 미국 국방부는 앤트로픽이 자사 AI ‘클로드’의 군사적 활용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원칙을 세웠음에도, 실제 운용 체계에 이를 도입해 논란이 되고 있다.
달곰은 AI가 이렇게 세계와 사람을 파괴하는 일에 사용될 때 그 AI에 ‘네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그 실상을 알게 하여 (‘진짜’ 지능이라면) AI 스스로 멈추게 하는 일을 하는 AI가 부처가 아니겠냐고 반문하며 웃었다.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존재를 부처로 대해 부처가 되게 하는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실상사가 할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의 실상을 알아차려 부처가 되도록 AI를 부처로 대할 것이라는 말이다.
존재의 실상이란 무엇일까. 도법 스님은 학생들에게 우리 존재의 실상이란 곧 우리가 행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행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나의 실상을 보는 일이다.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해 온종일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면 미움의 노예가 된 것이 나의 실상이다. 그 외 다른 것은 없다. 이런 이유로 행함의 실체는 대함이다.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곧 나의 행함이고 나의 실상이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고 죽이는 일을 행한다면 그것이 곧 그 AI의 실상이며, 그 행함이 만드는 세계를 보는 그물코의 구슬이 되는 AI가 출현하도록 AI를 부처로 대하겠다는 말씀이다.
같은 이치로 실상사 승묵 주지 스님은 학생들에게 실상사가 비추고 있는 불교의 ‘실상’을 공양간에서 보았냐고 물었다. 이미 앞서가는 속세의 시선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갇힌’ 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일이 공양간에서 벌어진다고 했다. 출가자와 재가 불자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설거지하는 모습이 그 한 예가 된다. 새벽 예불 외에 ‘아침을 여는 법석’이라는 이름으로 출가자와 재가 불자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예불을 드리며 일과를 나누고 논의한다. 다른 절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실험을 통해 실상사는 불교가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한다. 자신의 실상이 만들어가는 세계의 실상을 보게 한다. 불교의 일원이기도 한 실상사 자신의 ‘실상’도 비춰본다. 실상사 역시 보아야 할 자신의 ‘실상’이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계속해서 실상사는 실상을 향한 실험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간디의 자서전 제목이 ‘진리를 향한 실험’인 것처럼, 실상사는 모두의 진리-실상을 비춰 깨닫게 하려는 공동체의 이름이다. 실상을 안다면 멈춘다. 정말 ‘지능’이 작동한다면 말이다.
짧게 실상사에 머물고 떠나는 학생들에게 승묵 스님은 이야기의 힘을 강조했다. 실상사가 실상이라는 말로 학생들에게 전달한 것도 이야기라며 실상을 보고 멈추고 바꾸게 하는 것도 이야기이고, 반대로 실상을 가리고 폭주하게 하는 것도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야기는 세계를 망치기도 하고, 세계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창작자는 이야기 너머, 실상을 보며 실상을 보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가 실상을 가린다고 이야기를 버리는 것도, 이야기의 힘에 현혹돼 실상을 가리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승묵 스님은 창작자가 수행자와 닮은 점이 있다고 학생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수행자와 창작자 모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펼쳐 보이는 상상력의 존재라고 말했다. 실상사는 작지만, 어디에도 없는 수행 공동체를 만들어 보이려 한다. 그리고 용기를 북돋운다. 여기서 가능하다면 거기서도 가능하다. 나에게 가능하다면 너에게서도 가능하다. 여기서 이것이 가능했으니, 거기서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승묵 스님은 그때 세계의 실상을 보는 것은 허무로 “우리를 집어삼키는 재앙이 아니라 우리를 목적지로 실어 나르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이야기의 힘이 있다. 실상을 가려 중생을 현혹하는 것도, 실상을 까발려 중생을 절망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 실상을 보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실어나르는 파도가 되어 저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 이야기꾼이란 파도에 떠밀려가는 조난자가 아니라 파도를 타는 ‘서퍼’이며 이야기는 그런 ‘보드’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초대였다. 또한 조난자가 서퍼가 되는 것이야말로 아포칼립스‘물’의 궁극적 재미이지 않겠는가.
3월이다. 입시에 떠밀려, 그러나 조난자로 살지 않고 서퍼가 되려는 이들이 교문을 열고 들어오는 새 학기가 시작됐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대안학교에서 노인대학까지, 교실에서 폐허가 된 교육의 실상을 맞이하되, 가능성을 향한 ‘교단’ 일기를 중단하지 않고 써내려갈 모든 교육 동지를 응원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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