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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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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기엔 “요즘처럼만 지낸다면 행복하다”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⑬박현진
끊임없이 도전한 언니를 기억하기 위해 동생은 매일 언니 글을 읽는다
등록 2023-01-10 13:01 수정 2023-01-17 01:32
박현진(31)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박현진(31)씨.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계속 쓸 사람.’(현진의 ‘브런치’ 발췌) 작가로 살고 싶던 서른 살 박현진의 자기소개는 이 문장 하나로 충분했다.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적은 자기소개대로, 현진은 꾸준히 글을 썼다. 7년 동안 브런치에 올린 글만 125편. 계속 쓰겠다는 그의 다짐은 2022년 10월에서 멈췄다.

현진은 어려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했다. 수영과 클라이밍, 서핑 등 몸을 쓰는 활동과 영어, 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새로운 언어도 배웠다. 엑스트라로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밴드에서도 활동했다. 가장 좋아한 것은 책이었다. 방 한쪽 벽면엔 책이 가득했다. “문학으로 등단하는 게 가장 큰 꿈이었어요.” 동생 은진(29)씨의 말이다.

현진씨의 방 한쪽은 책이 가득하다. 유가족 제공

현진씨의 방 한쪽은 책이 가득하다. 유가족 제공

질문을 달고 살았던 ‘물음표 살인마’

그는 어릴 적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성적인데다 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그는 ‘아힌’이었다가 ‘옥남’이었고 ‘현희’였다. 작가로 활동할 땐 ‘박힌’이라는 이름을 썼다. 나중에 커서는 자신의 한자 이름 뜻(어질 현에 보배 진)이 꽤나 좋아졌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내 이름을 사랑하기까지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왜? 이건 왜 이렇게 된 거야?” 질문을 달고 사는 현진을 은진씨는 ‘물음표 살인마’라고 불렀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궁금해하던 현진은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자기 뜻과 맞지 않던 직장을 다니면서도 책을 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뜻이 맞는 이들과 모여 독립출판사를 차리고 책도 두 권 출간했다.

내성적인 동생과 달리 현진은 성격이 밝았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내 곁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도 많이 아팠던 것 같은데,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괴롭다는 이유로 나는 그들의 상처와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이해해주지 않았다.’

“한번은 제가 영화 작업을 하면서 현진에게 히스테리를 심하게 부린 적이 있어요. 불면증도 심했거든요. 그런데 현진이 하는 말이 주체할 수 없는 제 모습이 너무 슬퍼서 속상하다는 거예요. 정말 이타적이라고 느꼈어요.” 현진과 가깝게 지낸 최진영 영화감독의 기억이다.

밖에서 현진은 ‘청각적 감각’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동생 앞에서는 달랐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닫힌 동생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 현진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늘 은진씨 옆에 누워 그날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모든 힘든 감정을 털어놓은 현진은 언제 기분이 안 좋았냐는 듯 은진씨에게 뽀뽀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현진은 영상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동생을 위해 2022년 11월 첫 주말 사진전을 예약해놨다. “스위스대사관에서 사진전을 한다던데 가서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고 오자.”

박현진씨가 출판한 책들. 유가족 제공

박현진씨가 출판한 책들. 유가족 제공

동생이 해준 단장을 받고 나선 이태원

은진씨와의 약속을 일주일 앞둔 10월29일. 현진은 원래 친구들과 홍대 인근에서 만나기로 했다. 핼러윈을 앞두고 마음이 바뀌었다. 현진은 핼러윈 때의 이태원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남자친구와 상암동 하늘공원에 가기로 했던 은진씨도 마음을 바꿔 이태원에 가기로 했다. 현진의 핼러윈 단장을 은진씨가 해줬다. 준비한 옷이 너무 얇아 자신의 카디건도 빌려줬다. 그리고 함께 집을 나섰다. 은진씨는 현진의 친구들이 있는 한남동까지 함께 갔다.

그 뒤 헤어져 남자친구와 밥을 먹은 은진씨는 저녁 8시30분께 해밀톤호텔 뒤편, 세계음식거리로 향했다. 거리에 들어선 뒤 어느 지점부터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을 쉴 새 없이 밟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30분 만에 겨우 빠져나왔다. 이때까지 현진은 세계음식거리 반대편인 퀴논거리에 있었다. 인파를 피해 반대편으로 넘어온 은진씨는 밤 9시가 넘어 현진을 만났다.

현진의 얼굴은 설렘과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은진씨를 붙들고 현진은 자신이 본 재미있는 핼러윈 복장에 관해 얘기했다. 은진씨는 해밀톤호텔 뒷골목에 사람이 많다고 얘기해줬다. 그리고 현진과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줬다. 그때가 밤 9시28분이었다. “재밌게 놀고, 조심해. 이따 집에서 보자.”

이후 현진의 행적을 유가족은 알지 못한다. 함께 있던 현진의 친구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현진의 휴대전화 마지막 기록은 밤 9시38분 지인과의 통화였다. 당시 현진은 녹사평역 앞 공원에 있었다고 한다. “메인 거리(세계음식거리)에 있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 했다더라고요.”(동생 은진씨)

가족은 그날 밤 뉴스로 이태원 참사 소식을 알게 됐다. 현진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은진씨는 미친 듯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에스엔에스(SNS) 관련 게시물과 모자이크 없이 올라오는 영상들을 3초마다 새로고침 하면서 봤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한 게시물 속에서 현진과 함께 있던 친구의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벽 3시30분이었다. 무작정 순천향대병원으로 향했다. 그 뒤 오전 11시30분에야, 현진이 경기도 고양시 일산 동국대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신없던 와중에도 은진씨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경찰관이 마약 이야기를 꺼내며 부검하겠냐고 물었다. 너무 어이없어서 “아니요”라고 했다. 그 뒤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많았다.

아빠 박경남씨는 참사 한 달이 지나서야 은진씨와 함께 이태원 골목을 찾았다. 경남씨는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딸이 죗값을 받았나보다”라고 말했다. 은진씨는 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골목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는 박현진씨. 유가족 제공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는 박현진씨. 유가족 제공

어쩌면 알 수 없는 곳에서 또 다른 탄생을 할지도

2년 전, 은진씨는 현진과 죽음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서, 서로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공유하자고 했다. 지금 은진씨는 매일 현진의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현진의 휴대전화엔 수많은 일기와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진이 보고 싶을 때 은진씨는 천천히 그가 남긴 기록을 들여다본다. 외출할 때면 현진의 옷이나 물건을 한 개 이상 꼭 챙겨서 나간다.

기록하기를 좋아하던 현진은 손으로도 많은 일기를 썼다. 2022년 10월25일, 현진이 손으로 써서 남긴 가장 마지막 일기엔 “요즘처럼만 지낸다면 살아갈 만하다. 행복하다. 요즘 사는 것에 만족한다”고 적혀 있었다.

현진은 2016년 4월 쓴 ‘꽃의 생 그리고 삶’이라는 글에서 삶을 꽃에 비유했다. ‘피어나고 지는 것, 개화와 낙화. 이 아름다운 순환은 사실 우리의 삶과도 같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에서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또 다른 탄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 다른 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생을 활짝 피우다 그렇게 낙화하는 것이다.’ 1992년 7월14일 태어나 이번 생이 마지막인 것처럼 배우고, 읽고, 쓰고, 도전했던 현진은 2022년 10월, 이태원에서 낙화했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생인 박은진씨(오른쪽)와 현진씨. 유가족 제공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생인 박은진씨(오른쪽)와 현진씨. 유가족 제공

<은진씨가 현진씨에게 쓴 편지>

내 사랑, 나의 반쪽, 나의 전부인 현진이. 현진이는 나와 영혼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고 항상 말했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한 몸이라고 항상 말했잖아. 어떤 음식을 먹고 싶거나, 전시를 보러 가거나, 여행을 가고 싶을 때면 항상 언니와 똑같은 생각 하곤 했는데. 그러고선 둘이 항상 놀라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도 그런 생각을 했어? 어떻게 항상 똑같은 생각을 하지?! 진짜 신기하다!”면서 둘이 깔깔거리면서 좋아하고 모든 순간을 함께했잖아. 이게 30년을 가까이 같이 산 사람의 연대인가 하면서 좋아했는데. 둘이 함께 여행을 가거나 데이트하면 어린애들처럼 신나서 깔깔거리고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별일 아닌 것에도 웃음이 끊이지가 않았는지.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네 생각이 많이 나. 집에 오면 먼저 잠들어서 닫혀 있는 내 방문 앞에 와서 노크를 했지. “자~? 들어가도 돼?” 하면서 내 방에 들어와서는 조잘조잘 오늘은 누굴 만났고, 누구 때문에 힘들었고, 회사가 어떻고, 별의별 이야기를 늘어놓고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잖아. 서로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언제 기분이 안 좋았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 그만 잔다고 잘 자라며 사랑한다며 뽀뽀하고 돌아가서 잠들었잖아.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몇 년 전만 해도 일하는 게 너무 바쁘고 집에 와도 잠깐 잠만 자고 가니까 현진이랑 시간을 많이 못 보내서 현진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더 힘들었을까 싶어. 최근에 이직하고 현진이랑 보내는 시간이 많이 늘고 더 자주 붙어 있어서 현진이가 많이 행복하다고 했던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 내가 더 들어주고 챙기고 현진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그래도 생각해보면 너랑 함께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어. 평일마다 같이 운동이나 수영을 가고 저녁이면 먹고 싶은 걸 시켜서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틀어두고 같이 껴안고 누워서 봤는데. 여행이 가고 싶으면 가장 먼저 네가 생각나서 자주 여행도 다녔는데. 우리 같이 안 다닌 곳이 없었잖아. 유럽, 일본, 동남아, 러시아, 제주도, 진주, 태안 등 진짜 많이도 돌아다니고. 우리 현진이는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해외나 국내나 다 돌아다녔는데. 

항상 나랑 여행할 때면 다른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지만 가장 마음이 편한 건 나라고 이야기하면서 온전히 현진이 그대로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네가 했던 모든 말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같아서 더 사무치게 그립고 생각이 나. 

우리 현진이는 늘 글을 쓰고 적는 것을 좋아했지. 꼭 등단해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우리 현진이 글들은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우며 강한 느낌이어서 너무 좋아. 네가 남기고 간 글들과 책들을 차근차근 읽어보고 있는데 네가 얼마나 엄마와 아빠를 애정했는지,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이렇게 큰지 몰랐어. 항상 우리 집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속상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만 봐와서 네가 가족에 대한 애정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미워하는 마음은 어쩌면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너의 글들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 

네가 사랑한 가족을 내가 더 많이 애정하고 사랑하면서 단단하게 지키기 위해서 노력할게. 우리 가족에 너의 자리가 비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네가 없다고 해서 내 마음속에 우리 가족들 마음속에 비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해.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너의 말처럼 의지를 가지고 너의 순간순간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울지 않고 웃는 날이 오기를 기다릴 거야. 우리 웃으면서 대화하는 날을 기다려보자. 이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나에게 사랑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그런 존재. ‘미쁘고’ 예쁜 현진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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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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