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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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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고 내가 아빠가 되었구나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⑥이현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빠 대신 아빠 노릇 한 아들
수백 명 친구 장례식장 찾아 마지막 길 배웅
등록 2022-12-19 16:55 수정 2022-12-22 08:49
생일파티 하는 이현서군과 여동생들.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생일파티 하는 이현서군과 여동생들.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아빠는 아이가 어질게 세상을 살아가길 바랐다. ‘어질 현’에 ‘펼 서’, 현서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빠 이호곤(48)씨의 바람대로 현서는 너그러우면서 착하게 자랐다. 현서에게는 15살 터울인 막냇동생을 포함해 여동생 셋이 있다. “아빠가 없으니까 네가 아빠 역할을 해야 한다. 내가 오토바이를 타니까 언제 죽을지 몰라. 내가 언제 죽든지 현서 네가 동생들 잘 챙겨.” 마트에서 일하는 아빠는 퇴근한 뒤에는 오토바이 배달일을 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새벽에 들어왔다. 한 달에 한 번 다 같이 밥 먹는 날이 유일하게 가족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부탁하면 어디서든 집에 돌아와준 아들

아빠의 당부를 현서는 충실히 따랐다. 아빠가 없는 집에서 현서는 아빠 노릇까지 했다. 친척 결혼식 같은 가족행사에서도 아빠의 자리를 현서가 메웠다.

막냇동생 다현(2)을 현서는 특히 아꼈다. ‘엄마 힘드니까 빨리 와서 애 씻기는 것 좀 도와줄래?’ 엄마 박유순(47)씨의 문자를 받으면 현서는 어디에 있든지 서둘러 집에 들어왔다. 아빠보다 오빠를 자주 봤던 다현은 현서에게 “아빠, 아빠” 했다. 밥 먹을 때도 다현은 늘 현서 옆에 앉았다. “아빠 누구야?” 엄마 아빠가 농담하듯이 물어보면 다현은 현서 품에 폭 안겼다.

다현이 태어난 뒤로 현서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지 않았다. 혹시나 어린 동생이 코로나19에 걸릴까봐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주로 집에서 다현과 놀았다. 동생의 사진을 찍거나 무릎에 앉히고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퍼즐 맞추기도 좋아했다.

그런 현서가 처음으로 친구들과 놀러 간 것이 올가을 제주도로의 수학여행이었다. 고등학교 첫 수학여행. 제주도도 비행기도 난생처음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현서는 수학여행을 다녀와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수학여행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현서군이 2022년 9월 제주도로 첫 수학여행을 가며 찍은 비행기 티켓. 유가족 제공

이현서군이 2022년 9월 제주도로 첫 수학여행을 가며 찍은 비행기 티켓. 유가족 제공

수학여행 이후로 현서는 그동안 못 갔던 영화관, 노래방에 친구들과 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도 동생을 걱정해 실내든 실외든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현서는 기계를 만지고 조작하는 것을 좋아했다. 기계장비 다루는 일을 했던 아빠를 보며 어릴 때 배운 손재주였다.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현서가 고쳤다. 엄마 아빠가 휴대전화를 사면 현서가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을 깔아줬다. 아빠를 따르고 또 닮고 싶어 한 현서를 아빠는 믿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 날이면 현서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서로를 의지했던 부자가 의견이 달랐던 적이 한 번 있었다. 대학 진학을 두고였다. 마이스터고 2학년 현서는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아빠와 함께 돈을 벌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에선 대학 안 가고 회사에 들어가면 힘들게 살아야 해. 아빠는 네가 나중에 후회 안 하려면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 늘 아빠의 뜻을 따르던 착한 아들이었지만 취업만큼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0월30일 아빠는 이게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서군이 막냇동생을 안고 컴퓨터를 하는 모습. 유가족 제공

현서군이 막냇동생을 안고 컴퓨터를 하는 모습. 유가족 제공

현관엔 현서의 신발이 없었는데

그날, 현서는 엄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올게요.’ 현서는 같은 반 친구인 동규와 다른 반 친구 2명과 함께 이태원에 갔다. 10월29일 밤 호곤씨는 배달일을 하다가 자정 무렵 식당에 들어갔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봤다.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 2시께 퇴근한 호곤씨는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멍하니 이태원 참사 관련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봤다.

10월30일 오전 9시15분.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들고 둘째 딸이 말했다. “아빠, 경찰이라는데?” 호곤씨는 어리둥절해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한번 오토바이 신호를 잘 지켰나 돌이켜봤다. 호곤씨에게 경찰이 물었다. “이현서씨 아버지 되십니까.” 경찰은 믿기지 않는 말을 이어서 했다. 호곤씨는 늦게 들어올 때면 현관에 놓인 아이들 신발을 확인하곤 했는데, 그날따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4층으로 뛰어올라온 아빠는 현서 방문을 벌컥 열었다. “현서 어디 갔어?” 외출 뒤 막 집에 도착한 엄마 유순씨도 어리둥절했다. “친구네서 잔다고 했는데, 허락 맡는 문자 안 왔어?” 호곤씨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너졌다.

현서 고모의 손에 이끌려 겨우 도착한 이대서울병원 안치실에서 누워 있는 현서를 봤다. 경찰은 하얀 덮개를 내려 얼굴만 살짝 보여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망진단서엔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10월30일 00시 사망 추정.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179 해밀톤호텔 옆 노상.’

조용하고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현서의 장례식엔 친구가 수백 명 찾아왔다. 고등학교 친구부터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시절 친구까지 와서 현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친구들은 현서에게 편지를 썼다. ‘당장에라도 네가 반에 들어올 것만 같은데 너를 볼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 우리는 널 잊지 않을 거야. 너도 항상 우리 곁에 있어줘.’

현서 친구들이 쓴 손편지. 유가족 제공

현서 친구들이 쓴 손편지. 유가족 제공

수십 년 동안 보지 않고 지낸 가족, 사소한 다툼으로 연을 끊었던 호곤씨의 친구가 모두 장례식장에 왔다. 호곤씨가 안아주면 울던 다현도 장례식이 지난 이후부턴 그에게 아빠라고 부른다. “현서가 저와 사람들을 이어준 것 같아요, 마지막 선물로.” 호곤씨가 말했다.

정부가 차린 임시분향소엔 이름도, 사진도 없었다. 현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름조차 가려지는 것은 막고 싶었다. 때마침 한 언론사에서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을 땐 항의할 마음이 없었다. 호곤씨가 현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듣던 친구가 “세상에 그런 애가 어딨어”라고 하던 애다. 제대로, 이런 착한 아이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더 많이 이야기할걸

아빠는 일이 쉬는 날이면 경기도 파주 추모공원에 있는 현서를 찾는다. 여태껏 일만 하며 얘기를 많이 못 나눠 미안하다고,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만 반복한다. 현서가 떠난 뒤 호곤씨 눈가엔 눈물 자국이 지워질 틈이 없다. 다현이가 아빠라고 부르면서 다가올 때 눈물이 흐른다.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늘린 가족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다가도 눈물이 떨어진다. 매일 잠들기 전 거실의 불을 끄면 또 눈물이 난다. 어두컴컴한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에서 현서 얼굴만 유난히 또렷해서.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한겨레21>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기록할 예정이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답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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