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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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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차가운 딸의 얼굴만 만지던 그 구급차 안”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③박가영
패션디자이너 꿈꿨던 열아홉 살 박가영이 만들고 싶었던 옷
엄마 최선미씨가 다시 함께 만들고 싶은 눈사람
등록 2022-12-04 16:05 수정 2022-12-21 08:0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열아홉 살 가영은 ‘옷으로 엮어내는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목원대 섬유·패션디자인학과 2학년 박가영. “엄마, 나 패션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어. 그러려면 옷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아.” 잊혔던 독립운동가가 21세기 도시 한복판에 재현되고 발달장애인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일들이, 옷과 패션 무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가영은 믿었다.

학원에선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다. 엄마도 미술 말고 공연기획을 권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가영은 옷을 향한 자기 마음을 믿었다. 패션디자인과가 있는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친구들이 3시간씩 받는 수업을 6시간, 9시간씩 받았다.

모녀 사이 둘만의 개그 코드

대학 진학 뒤에도 가영은 패션쇼를 더 배우고 싶어 했다. 캐나다 유학을 꿈꿨다. 방학마다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했다. 그렇게 세 번의 방학을 거쳐 모은 돈이 1400만원. “많은 것을 보고 싶어. 유학도 가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 가영이 입버릇처럼 가족에게 하던 말이다.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100㎞가량 떨어진 대전에 있는 대학을 가면서도 가영에겐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더 커 보였다.

가영의 모험심은 타고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차를 타고 홍성에서 천안까지 병원에 다녔는가 하면, 중학교 3학년 때는 혼자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부산 여행을 떠났다. 오히려 엄마 아빠가 불안해 자동차를 몰고 가영을 뒤따라갔다가 들키고 말았다. “이제부턴 혼자 다닐게”라는 가영의 선언에 엄마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마음은 가족과 늘 이어져 있었다. 가영은 수시로 엄마에게 전화해 종알종알 일상을 이야기했다. 친구들과 어딜 갔는지, 자신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엄마랑 이야기하는 게 좋아.” 엄마는 휴대전화 너머 가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집안일하거나 산책하곤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콜라 한잔하러 치킨집 가기’, 집에 늦게 들어오는 동생을 놀리는 ‘상황극 하기’ 등 모녀 사이에는 “둘만의 개그 코드”가 있었다.

박가영씨와 동생이 만든 눈사람. 유가족 제공

박가영씨와 동생이 만든 눈사람. 유가족 제공

함박눈이 내리던 2021년 겨울, 가영과 동생은 엄마 몰래 밤에 나가 사람 키만 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엄마는 다음날 가영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눈사람 사진을 보곤 “어디 한번 보자”며 현관문을 나섰다. 아침 햇살에 절반 가까이 녹아버린 눈사람. 가영과 동생, 엄마 셋이 깔깔대며 웃었다. “이게 뭐야, 너무 웃기게 생겼다.” 엄마에겐 잊지 못할 “겨울 선물”이었다.

대전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가영은 집에 들를 때면 낙지젓갈, 무말랭이 같은 반찬을 양손 가득 들고 돌아갔다. 주변에 자취하는 친구들이나 밤샘 작업하다 기숙사에 못 들어간 친구들이 가영의 자취방에 와서 밥을 얻어먹곤 했다. “(친구들 챙겨주려) 항상 냉장고가 꽉 차 있어야 하는 아이였어요.”

언제나 냉장고가 꽉 차 있어야 했던 아이

가영의 엄마 최선미(49)씨는 한 달이 지났지만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가영은 “친구가 이태원 근처에 사는데 함께 전시회를 보고 오겠다”고 했다. 2022년 10월30일 새벽 1시30분께, 엄마가 설핏 잠이 들었을 때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났어요.” 가영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그 친구한테 ‘왜?’ ‘얼마나 다쳤는데?’ 물으니 ‘사망’이라는 거예요. 얘가 너무 당황해서 잘 모르나보다, 내가 가야겠다 싶어서 아빠랑 옷도 제대로 못 챙겨입고 홍성에서 서울로 갔어요.”

엄마 아빠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장례식장 너머로 구급차에 희생자들이 실려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병원은 아직 신원 파악이 안 됐다며 부모의 장례식장 출입을 막았다. “경찰이 아이 찾으면 연락 준대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었어요. 결국 저희가 아이를 직접 찾아나섰다가 (동주민센터 같은 데서) 아이가 강동성심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갔죠.” 엄마는 병원 앞에 도착한 지 12시간 만인 오후 1시30분께 겨우 가영의 행방을 알게 됐다.

가영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가영이었다. 엄마는 바로 딸을 데리고 집에 오고 싶었다. 하지만 각종 행정 절차가 엄마 아빠를 괴롭혔다. 검시 절차가 늦어져, 병원에서 다시 반나절 가까이 대기했다. 그 와중에 구청 공무원은 아빠에게 전화해 “장례비 지원되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경찰은 통화에서 쾌활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첫인사를 건넸다. 사건 조서를 쓰라는 안내 전화였다. “애 아빠도 저도 너무 기가 막혀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 상황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싶더라고요.”

기다림 끝에 10월30일 오후 5시 가영을 홍성으로 데리고 가는 길. 엄마는 구급차 안에서 2시간 동안 딸의 얼굴을 쉼 없이 어루만졌다. “차가운 얼굴만 만지고 있었어요. 아이가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멈춘 거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 구급차 안에 있어요.”

11월 초 가영의 소지품을 챙기러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체육관에 간 엄마 아빠는 ‘다른 아이들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분향소 쪽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건, 두 평도 안 되는 좁은 분향소와 희생자 위패도, 영정도, 이름도 없는 단상이었다. “얼마나 초라했는지 아세요? 일반 장례식도 위패 하나, 영정 하나를 다 상의하는데 어떻게 정부가 분향소를 그렇게 둘 수 있는지. 우리 아이들 이름을 가린 건, 말이 좋아 비공개지 은폐 아닙니까.”

가족과 나들이 간 가영씨 모습. 유가족 제공

가족과 나들이 간 가영씨 모습. 유가족 제공

한밤중에도 빠르게 사라지는 톡방 읽음 ‘숫자’

가영이 세상을 떠난 뒤 한 달 가까이 모든 만남을 끊었던 엄마는 지금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국가가 가벼이 여긴 죽음의 무게를 알리기 위해서다. “지금 분위기로는 우리 아이가 희생자가 아니라 사회를 우울하게 만들고 세금을 더 많이 나가게 한 가해자처럼 느껴져요. 대통령의 진심 어린 담화문 사과를 받고 싶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싶어요.”

가영의 엄마 아빠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체 준비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늦은 밤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유가족들이 남긴 메시지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쌓여간다. 새벽 3~4시라도 누군가 메시지를 올리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읽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빠르게 사라지는 읽음 ‘숫자’엔 매일 밤 잠들지 못하는 가영의 엄마 아빠도 포함돼 있다.

요즘 엄마는 가영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뇐다. “엄마가 그날 용돈을 줘서 미안하고, 그곳에 엄마가 없어서 미안해. 엄마가 같이 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많은 꿈을 꾸었던 열아홉 살 가영은, 만 스무 살이 된 생일인 2022년 11월1일 발인을 마치고 하늘로 떠났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박가영씨가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그린 그림. 유가족 제공

박가영씨가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그린 그림. 유가족 제공

<한겨레21>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기록할 예정이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답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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